폐쇄회로 속 가상의 유희



이젤과 작업실 풍경이 있는 박종호의 전시는 폐쇄 회로 속 가상의 유희가 벌어지는 시각의 실험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의 방 같은 어지러운 난반사 속에서 관객의 공간 감각은 교란된다. 그림을 그리는 손과 작업도구, 그림이 그려지는 공간만이 가득 펼쳐진 그림들은 거듭 반복되는 자기지시성과 함께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자기반성이 구현되는 장이다. 전시부제인 ‘경계; 재현의 재현’ 전은 작가의 파토스 대신에, 재현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로고스가 가득하다. 재현 및 재현의 해체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벨라스케스와 마그리트에 대한 미셀 푸코의 연구가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들에 의하면, 회화가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 이상의, 대상의 분류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이 자연이 아닌 체계 인한, 인위적인 것이고 역사를 가진다. 전시부제에 있는 경계란 이러한 체계들의 역학관계와 관련된다. 박종호의 작품에서 체계의 주요한 구성요소는 그림, 거울, 창 등이다. 작품에는 이러한 재현의 장치들이 여러 겹으로 드리워져 있다.

그는 그림이 그려지는 면, 작업실, 작가라는 자못 분명한 참조대상을 코드 화 하고, 이를 가지고 게임한다. 관객 또한 작가가 드리워 놓은 시각적 함정들을 퀴즈나 퍼즐처럼 풀어볼 수 있다. 그의 초기작 [계단](2005)년에는 요즘 작품의 단초가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안에 같은 그림이 스케일의 차이를 두고 무한 반복되는데, 작가로 추측되는 인물은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으로만 나타난다. 불가능성과 역설에 탐닉하는 기하학자들의 유희처럼, 가도 가도 끝없는 계단은 그의 그림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다가온다. 어디가 정확한 시작인지 알 수 없는 무한 반복의 코드는 이 전시를 지배한다. 2009년 [경계] 전의 한 작품은 그리고 있는 자신이 그림 안에서 반복된다. 옆에 걸린 그림, 또는 그림이 반사되는 거울 이미지가 가세하여 재현의 장은 미로가 되어 버린다. 작가들이 때로 자신의 작품에 갇혀있듯이 이 무한 반사의 장을 빠져 나갈 길은 없어 보인다.

그리기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은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을 낳은 것이다. 이 전시의 반을 차지하는 이젤을 그린 그림은 이젤 위에 빈 캔버스가 놓이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그것은 어떤 이미지를 그렸다기 보다는 하얀 캔버스가 계속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 속의 이젤화(畵)는 공간의 이젤화(化)가 된다. 스케일의 차이를 두고 바깥으로 끝없이 연장될 수 있는 이 이미지는 안과 밖의 경계 또한 무화시킨다. 그림은 무엇인가를 담거나 표현하기 보다는 다른 그림과의 연결 고리만을 이룰 뿐이다. 차이를 둔 반복은 한정된 캔버스 안에 시간성을 불러들이는데, 그림 안의 그림에는 그림의 진척 상황이 드러나기도 하고, 인물이나 사물의 위치가 조금씩 변화한다. 반복해서 나오는 물건이 어떤 작품에서는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어, 위치가 이동된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품들끼리 서로를 반사하는 상황은 작품 소재가 작업실이라는 것에서 온다. 실제 작업실은 그림 속 작업실만큼 정갈하지 않지만, 작업실에 놓여있는 소품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물건들이다.

이젤과 화구 박스는 그림과 함께 전시장에도 설치되어 있다. 학부 때부터 계속 써왔던 물건들인 화분, 거울, 파란 의자, 화구 박스 등은 작업실 풍경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그것들은 작업실에 이렇게 저렇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박종호의 작품은 환영의 장치들이 조율될 뿐, 상상이나 환상과는 거리가 있다. 두세 가지 색 섞어서 탁 색을 만들어버린 회색조의 화면 역시 매우 건조하다. 고요한 정지 가운데 시각적 수수께끼가 만들어내는 사건만이 다양한 속도로 진척 중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존재 또한 희미하다. 그는 손으로만 나타난다. 그는 장면의 주재자가 아니라, 장면의 일부에 속해있다. 예전 작품에는 자화상이 많았지만, 요즘 작품에는 자화상도 그림 속 정물처럼 간접적으로만 나타난다. 작가는 작업실 자체가 자신의 모든 것 같다고 말한다. 작업실은 자신이 확장된 일종의 미디어인 셈이다. 그의 그림들은 자화상 아닌 자화상이다.

공간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또 하나의 미디어는 거울이다. 작품에 거울 이미지가 나올 뿐만 아니라, 반시시트지와 수퍼 미러, 그리고 실제 거울을 캔버스와 혼용하거나 그 위에 이미지를 그리기도 한다. 캔버스 위에 반사시트 지가 붙어있는 작품 [그리기](2010)는 화면 왼편 소실점까지 반복되는 그림 그리는 뒷모습이 있다. 반사시트지로 나타나는 그림 속 거울도 서로를 반사하며 반복한다. 수퍼 미러 위에 유채로 그린 작품은 거울 위에 이젤 이미지가 무한 반복된다. 거울 위에 그린 그림은 실재와 그 재현에 대한 의문을 야기한다. 실재를 투명하게 반영하기 위해 비워져야 하는 대상은 또 다른 언어의 그물망으로 선점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비추는 거울은 크기를 변주해서 계속 연결되면서 차이와 반복의 유희를 행한다. 그것은 허상의 느낌을 강조한다. 이러한 무한 반사의 상황은 실재를 화면이라는 중성적인 용기에 담아내는 재현의 역할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것은 재현주의가 가정하는 것처럼 무엇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담아 전달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실재와 허상의 경계에 대한 사고는 재현에 대한 반성, 즉 ‘재현에 대한 재현’을 낳았다. 재현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작업을 다른 매체가 아닌 그림을 통해 한다는 점에서 박종호는 화가이다. 그는 실재를 재현하는 화가의 역할에 대해 자문한다.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과정 속에서 시점과 종점은 불확실해진다. 우연인 듯 그림 속 정물로 들어가 있는 A4 복사지 박스는 재현이라는 이원적 과정이, 복사의 복사라는 시뮬라크르로 해소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끝없는 복마전 같은 게임이 일어나는 장인 이젤은 화가로부터 소실점으로 달아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바깥도 무시하고 그 앞의 작가(또는 관객)에게 쇄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무한 반복되는 화면들은 비어있다. 화면은 차이와 반복의 유희를 위한 장이지 무엇인가를 담아 전달하는 장이 아니다.

작품 [그리기](2011)는 소실점으로부터 무한 반복된 이젤 위의 빈 화면을 그리는 손이 나타나는데, 경계를 긋는 손은 경계를 가로지른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젤위의 화면에 그림이 그려지는 여러 단계가 붓질하는 손과 함께 나타난다. 작업실 그림은 이젤 그림보다는 숨통이 트인다. 관객과 평행으로 놓인 이젤이 2차원적이라면, 작업실 풍경은 3차원의 공간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난반사의 상황은 계속 된다. 한 작품에서 뒷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다른 작품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빈 캔버스는 다른 작품에서 조금씩 채워진다. 그림 속에 축소모델처럼 들어앉은 작업실 그림 안의 작업실 그림을 필두로 해서,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를 추적해 보면 작업실 공간 자체가 조금씩 위치를 바꾸며 서서히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전 궤도의 보이지 않는 중심에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박종호의 작품에서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차이의 계열은 고전적인 투시도법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데이비드 서머스는 [재현]에서 투시도법은 가상공간 안에서의 관계들을 양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하나의 주체를 위한 가상공간을 통합한다고 지적한다. 투시도법은 객관적 공간질서보다는 주관적 시점에 대한 은유로서 근대적 언어로 등장한 것이다. 주체를 위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은 시공간적 지평을 보여주며, 세계의 통일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주체의 통일성으로 인해 통합된다. 이와 같은 통합 내에서 재현은 도식적이며, 모든 경험에 선행하는 잠재적 관계로 규정된다. 상상력은 주체를 통하여 인간적인 현실을 만들어내며, 바깥 세계를 복제하지 않는다.

들뢰즈도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가 ‘나는 생각한다-’로 시작되는 방식이라고 본다. 들뢰즈는 재현에는 어떤 수렴하는 세계, 어떤 단일 중심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일한 원근법은 거짓된 깊이만을 지닐 뿐이다. 재현이라는 말에서 접두사 재(再,re-)는 차이들을 잡아먹은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뜻한다. 재인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에 해당하는 어떤 공통 감을 요구한다. 재인식의 형식은 일치나 합치들을 고취하는 것이다. 박종호의 작품은 언어기호와 시각적 재현에 내재된 위계화 된 질서를 가속시킴으로서, 오히려 그 질서를 흐트러트린다. 질서의 중심을 이루는 주체 또한 해체된다. 데이비드 서머스는 베이컨을 따라 철학과 종교의 체계들을 극장의 우상들이라고 부른다. 베이컨에게 그것들 모두는 합리성에 부합한 후에야 비로소 실체로서 여겨져야만 했던 것이다. 니체적인 이해방식에 의하면, 재현은 이제 우리 자신의 질서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한 어떤 질서, 어떤 세계에 대한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단순히 정신으로부터 투사된 것이 아니라, 제작된 것이다. 그것이 틀인 한 조작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틀과 틀의 반복, 그로 인한 틀의 파괴가 나타나는 박종호의 작품에서 현실을 단단한 지반을 갖지 못한 채 조금씩 엇겨 있다. 관점이 차이가 야기하는 무한한 계열은, 사실이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 의한 해석의 산물임을 예시한다. 퍼트리샤 워가 [메타 픽션]에서 말하듯이, 의미는 텍스트의 언어가 지시하는 텍스트 외부의 대상들에 있다기 보다는 허구적인 텍스트 내의 기호들 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한 진실의 세계가 아니며, 대신 일련의 구성이고 가공이며, 한정적인 구조일 뿐이다. 원근법의 기원이 연극의 무대장치였던 것처럼, 박종호의 작품에서 이젤이나 작업실은 끝없이 열리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그의 이전 작품 [건물](2005)처럼, 하나의 창이 아니라 여러 창이 나타나고, 창마다 각각의 퍼스펙티브를 가지는 주체가 자리한다.

이전 작품 속 자화상에서 나타나는 빈 동공이 예시하는 응시는 시각과 욕망이 얽히는 지점을 표현한다. ‘응시와 응시된 것 사이의 틈’이라는 라깡적 주제는 이 전시에서 바라봄과 보여짐(gaze)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무대로 나타난다. 이 무대에서 어긋나는 시선은 대상과 결코 일치되지 않는다. 빈 캔버스는 빈 거울만큼이나 오싹하다. 이전에 투명한 수단으로 여겨지던 틀과 구조가 작품의 내용이 된다는 점에서, 박종호의 작품은 메타 픽션이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일상세계에서는 대상이 묘사를 결정하지만, 픽션에서의 세계는 전적으로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고 본다. 메타 픽션의 극단에 이르면 언어자체 속에, 즉 어떠한 탈출구도 없는 자의적인 의미체계 속에 갇혀버린다. 픽션에서는 그 세계의 담론들을 재현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현실을 허구와 분리시키는 그 틀을 탐구하는 메타픽션은 경계의 자의적 본질을 명시하면서 시작한다. 메타 픽션은 무한한 체계들과 구조들로 구성되어 어떤 놀이의 세계를 구성한다.

조합과 순열에 의한 놀이의 문제는 메타픽션에서 잘 사용되는 장치이다. 이러한 놀이의 형식을 통해 일상이나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와 해방이 이루어진다. 박종호는 그림을 통해 체계와 게임의 세계를 증식시킨다. 이러한 자족적인 언어놀이를 하는 가운데 메타 픽션에서 ‘침묵의 예술’ 또는 순수한 형식주의, 즉 자신의 언어과정에만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퍼트리샤 워는 언어가 어떤 일관성을 가진 의미 있는 객관적인 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주장될 수 없다고 본다. 언어는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가 된다. 그러나 이 방향이 가속될 때 언어의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만다. 세계를 이젤과 작업실로, 주체를 그리는 손으로 삭감 시켜버린 박종호의 작품에서 유폐는 더욱 집요하다. 그의 그림에는 바깥이 없다. 빈틈없는 구조와 관련된 메타의 세계는 진공의 세계이기도 하다. 구조화 할 수 없는 현실계로 탈출하기 위한 작가의 다음 선택이 무엇이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