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진과 영상; 유목연, 이진영, 안경희, 자우녕

유목연
초상, 사물, 풍경, 몸, 추상 등 다섯 가지가 섞여 있는 유목연의 사진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별들이 모여 별자리를 이루는 것처럼 무리지어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든다. 장면들은 완결된 구도를 갖추면서 자족적으로 서있기 보다는, 서로를 보충하며 공명한다. 이러한 군집적 형식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다. 구성요소들은 언제든 다른 묶음에 속할 수 있다. A4 사이즈 정도 크기로 직접 인화한 대여섯 개씩의 묶음은 작품(work)보다는 텍스트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어딜 먼저 펼쳐도 상관없는, 순서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유동적인 재 맥락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기치 못한 부가적 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구조여야 한다. 회화와 다르게 순간적으로 어떤 시공간을 포획할 수 있는 사진이라는 형식 자체가 무한한 수집과 조합의 가능성을 내장한다. 유목연은 수집된 것을 소재별로 보여주거나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하거나 하는 시리즈 작업을 거부한다. 대신에 이질적인 요소들과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접촉의 지점을 늘려 나간다. 일상에서 건저 올린 소소하고 주변적인 것,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확실치 않은 것, 흐릿한 것, 변질 중인 것,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것들은, 지각과 기억의 매개를 거쳐 서로 다른 이야기를 짜 나간다. 그의 사진들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산문적이기 보다는 시적이다.

이진영
이진영의 작품에는 반짝이고 투명하고 매끈한 것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파괴되고 있으며 파괴시킨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변형과 죽음을 기록한다. 다리, 차, 의료기 같이 인간을 보호하고 편리를 극대화시키는 현대적 사물들은 기능을 상실하고, 심지어 인간을 위협한다. 깨져서 날카로워진 사물과의 접촉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로덴키르헨의 다리]는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깨진 모습을 찍어 재구성한 것으로, 지시대상을 재현하는 사진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세계를 보는 투명한 창 또한 깨뜨린다. 깨진 자국과 풍경이 중첩되는 배치에서 풍경을 이루는 지반이나 기층은 무너진다. 사고 난 차를 광내고 광고 사진처럼 찍은 [폐차]는 처음 생산 되었을 때의 번쩍거리는 모습을 다시 갖춘다. 그것은 생산과 소멸의 주기가 점차 빨라지는 상품을 떠오르게 하며, 속도의 문명에 내재된 죽음의 그림자를 예시한다. 의료 기기가 가득한 병원을 모습을 담은 [폴리클리닉]은 건강과 정상에 대한 강박관념이 불러오는 죽음과 이상이 도처에 편재한다. 기계에 둘러싸인 문명의 이물감은 매체의 투명성을 교란시키려는 작가의 태도와 연결된다. 구식 스캐너를 개조한 사진기로 찍은 몸은, 어두운 몸을 낱낱이 드러내려는 임상의학적 시선을 무화시키고, 불투명해진 언어의 물질성 속에서 몸의 징후와 증상, 흔적들을 담는다.

안경희
안경희의 작품에는 오래된 사물인 책이 있다. 작품 속 책은 대부분 가족이나 자신의 손때가 뭍은 작은 책들이다. 거기에는 그 책을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소유했던 이의 체취가 묻어난다. 기능화 된 환경 속에서 체계적 코드의 소비를 통해 금 새 진부한 것이 되는 현대적 상품에 비해, 이 오래된 사물은 인간화된 세계를 반영한다. 작가는 책을 직접 만듦으로서 손때 묻은 책이라는 비유를 말 그대로 실현하기도 한다. 책은 또한 중세 후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인쇄를 통해 대량 생산된 상품의 하나였지만, 이제는 나날이 갱신되는 미디어에 비한다면 전통적 사물의 편에 속한다. 안경희의 작품은 단순히 인간을 비추어주는 사물을 넘어서 사물 그자체에 다가선다. 그것은 사물의 편에 섰던 작가 퐁주--‘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사물들 내부의 뚜껑을 열고, 그 두께 속으로 여행하길 제안한다’--처럼 사물의 두께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관객 또는 독자로 하여금 그 사물의 두께를 편력하게 하는 또 다른 방식은 설치이다. 라이트 박스로 만들어진 [beyond the books]는 7-8개의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서 페이지에 깊이를 주었다. 북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책은 사진 뿐 아니라, 공간으로 확장되는 매체이다. 개인의 연장으로서의 오래된 사물은 그 안에 들어가 보도록 연출된다.

자우녕
자우녕의 작품에는 현대 도시사회의 이주 노동자가 등장한다. 그들만큼이나 떠도는 삶을 살았던 작가에게 이주는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미래인의 전형을 유목민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것은 ‘목동의 유목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화된 불안정함의 유목’이다. 유목에도 계급적인 차이가 선명하다. 자우녕의 작품 속 유목은 세계 여행과는 무관하다. 현대화된 도시의 황량한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며, 보이지 않는 힘은 사람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이리저리 배치한다. 주체는 구조의 산물이며, 구조의 그물망은 탈주의 대상이다. 거기에는 체계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떠밀리듯 흘러가는 이들의 실상이 있지만, 그것은 전체적 풍경과 분위기 속에서 묻어나는 것이지 그들의 비참함을 폭로하거나 지식인적 계몽의식이 앞서 있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가 분명치 않은 현대적 영상은 건조하게 상황을 드러낸다. 막 찍은 디카 사진으로 여권처럼 만든 사진첩은 제목 그대로 [urban drawing]이다. 작가가 그리는 곳은 이주민이 많이 사는 유럽의 도시, 선진국 모델을 따라 압축 성장 중인 아시아의 도시, 그리고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떠오른 한국의 도시 등이다. 도시의 쓰레기와 동족의 시체를 파먹는 갈매기는 이주자의 상징이다. 지배사회가 그은 경계를 넘어서는 안되는 이 존재들은 위반의 가능성으로 인해 비천하면서도 신성하게 다가온다.

2. 회화; 예미, 한경희, 윤종주, 이자영

예미
공학을 전공했던 작가 예미에게 회화는 일관된 형식이 관철된 세련됨 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개성껏 풀어내는 장이다. 작품은 일상의 일화나 현실을 반영하거나 있음직한 일들을 재현함으로서 관객과 대화한다. 회화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작가에게 제목 역시 그림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 위주로 지어진다. 색채 또한 따스한 기운이 돈다. 이 소란스러운 대화의 장은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축제를 닮았다. 이러한 소통에서 유모어와 위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활달한 화면 속에서 재현적 금기는 종종 무너지곤 한다. 그렇게 구현된 풍자적 현실 속에는 날카로운 현실비판 또한 있다. 특히 권위에 복종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적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동일한 코드를 통해 보편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언어에서, 탈코드화한 언어를 추구하는 예술 분야로 이동한 작가의 이력과 관계있을 것이다. 육식이나 약육강식과 관련하여 다양한 동물이 등장하는 작품은 동물 권 보호나 생태적 사고가, 병원 시리즈에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타자화 된 자연과 여성의 관련성이다. 출산하는 여성, 동물과 교감하고 유대 하는 여성, 요리하는 여성은, 각각 모성의 보편성, 소수자의 특수성, 욕망의 생산 등을 상징한다. 문명과 구별되는 자연의 질서에 속해왔던 여성은 결여와 부재를 넘어 풍요와 만난다.

한경희
한경희는 혼자 보는 그림일기를 쓰듯 일상의 소소한 장면이나 거기서부터 떠오르는 단상을 표현한다. 작가의 시선은 거대한 구조나 체계로부터 벗어난 주변적인 것들에 꽂혀있다. 시장가는 아줌마들의 꽃무늬 옷, 새장을 끌고 가는 아버지, 하얀 비단으로 만든 빈 집 등이 담긴 작품들은 노동이 아니라, 놀듯이 만들어진다. 들고 다니며 펼치기 쉬운 화첩이나 열쇄 고리 같은 작품들은 그 형식 또한 소박하다. 작가는 얇고 가벼우면서도 내밀하고 밀집되어 있는 것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무거움과 거창함, 강함과 새로움 등이 주장하는 핵심과 본질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주변들 중심에는 내가 있다. 작품에는 이 중심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작업하는 태도에는 그것이 있다. 세계의 중심에 나를 두는 태도는 이전 세기의 낭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을 자신이 낳은 자식이나 흔적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태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어디서 온 것인가? 나는 체계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것인가? 조형 언어를 통해 말하는 주체는 언어적 존재, 즉 구조적이고도 상징적이며 사회적 체계로 부터 온 것이다. 주체는 그러한 구조들과 등치되어서는 안 되지만, 최소한 그 관계성 속에 있다. 중심과 주변 간의 긴장 관계없이 주변만을 배회하는 태도는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주변적 현실과 동일한 질서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윤종주
미묘한 색으로 가득한 윤종주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자연을 연상시킨다. 수평선들이 내재한 화면은 추상과 재현이 서로 멀기만 한 관계는 아님을 보여준다. [flow]는 흐르는 물이라는 자연은 물론, 끝없이 흘러가는 자연적 과정을 닮았다. [flying]은 좀 더 역동적이다. 흐르거나 나는 과정 속에서 자연이 연상되지만, 공간은 점차 색 같은 조형적인 요소에 의해 만들어진다. 색을 통한 공간감은 조형적 언어를 통한 환영인 것이다. 화면은 붓터치가 남아 있기 보다는 연하고 부드럽게 칠해진다. 여러 번 집적된 색의 층은 바다나 우주 같은 무한한 깊이를 표현한다. 30번 이상 색을 올려서 만든 화면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바다나 연못처럼 무수한 기원을 가진 것들이 한데 모이는 장이 된다. 윤종주의 작품에서 회화적 공간성은 색의 층으로, 또는 두 가지 색의 대조로 만들어진다. 테라코타나 파라핀 같이 불투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재료를 이용한 작품의 공간 역시 층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색채로 가득하다. 명확한 형태가 없이 색채와 물성이 두드러진 화면은 고요하다. 단지 바라보기보다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또는 스며들기를 원하는 작품들은 눈이 아니라 몸을 향한다. 신체의 일부에 빛을 준 작품 [from body]는 마치 혜성 같다. 몸 안에 우주가 있다. 찍은 사진을 천에 프린트하고 마감재 칠한 이 작품은 확대와 축소 없이도 서로 다른 차원을 중첩시킨다.

이자영
이자영의 [아코디언 방] 시리즈는 주름으로 이루어진 소리를 내는 작은 상자와 방, 몸과 정신 등을 중첩시킨다. 얇은 막이 접혀지고 펼쳐지는 세계에서 안과 밖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다. 내면 공간으로서의 방은 들어서면 아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깥이다. 공간의 안쪽은 평원이다. 주어진 한계는 무한을 위한 조건이 된다. 작품들은 아코디언 소리처럼 다소간 애잔하다. 그러나 작품은 단지 자아의 부산물로서의 우울에 침잠되지 않는다. [깊은 지붕]이나 [저마다의 깊이]처럼 깊이와 높이는 서로 호환된다. 원래 물리학을 전공한 작가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생의 의지를 끌어내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자영에게 작업이란 순간으로 분절된 가혹하고도 권태로운 일상의 시간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작가에 의하면 [아코디언 방]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수렴과 발산이 교차되는 무한대의 영역이다. 이 구조 속에서 사건이 끝없이 이어진다. 지속이란 물리적인 연속이나 더 나은 곳으로 전진하는 진보가 아니라, ‘나에게 온기를 만드는 것’이다. 작업은 분절된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종교의 본래적인 의미와 닿아있다. 한눈에 들어오기보다는 그 내부로 들어가길 유도하는 대작들은 관객과 호흡한다. 모인 작품들은 서로를 향한 통로를 만든다. 그것은 순간 이동의 통로인 [웜홀]처럼 질곡의 지금여기를 탈주하는 통로가 된다.

3. 설치; 이보라, 최종희, 조현익

이보라
이보라의 작품은 드로잉을 3차원 공간에 구현한다. 뜨개질 같은 방식으로 확장되는 점과 선, 그리고 꼬여지며 복잡해지는 면은 드라마틱한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선이 아니라, 지시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 표현 수단이 된다. 그녀의 작품은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이행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나 네트워크가 짜여 지는 방식을 은유한다. 짜이거나 꼬이거나 늘어뜨린 선도 중요하지만, 그림자나 허의 공간도 중요하다. 공간은 무엇인가를 담는 중성적 용기가 아니라, 그자체가 주인공이 된다. 작가는 이렇게 유클리드적인 차원을 넘는 공간을 상대성 이론과 비교한다. 그것은 공간에 부가된 시간의 차원을 강조한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선에는 시간성이 내재해 있다. 드로잉을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은 대면하는 대상으로서의 조형이 아닌,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선에 내재된 시간성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지각적 체험과 조우한다. 뜨개질은 음악이나 무용처럼 몸을 매개로 시간을 타고서 공간을 엮어가는 방식이다. 반복적 노동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지만, 작품에 이성 대신에 욕망의 기호를 새겨 넣는다. 그렇게 짜여 진 문자는 해독 불가능하지만, 의미는 계속 부가되며 보충된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만일 의미의 보충이 없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커뮤니케이션만이 있을 것이다.

최종희
조각난 신체를 가상으로 통합하는 거울은 환영을 통해 사회적 요구를 주체에게 관철시킨다. 요구는 강요가 되기도 한다. 거울을 통해 가상의 통합 상을 바라보게 되는 생애 초기부터 자아정체감이 형성된다. 이러한 요구는 원초적인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의 상징적 언어에 내재된 욕망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아와 주체를 구축한다. 최종희의 작품은 실제의 거울이나 전자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비디오가 설치 및 몸과 함께 등장한다. 그는 거울이라는 미디어에 내재된 심리적, 재현적 과정의 가상적 통일성에 틈을 벌린다. 거울이나 비디오는 즉각적인 자기 반사를 통해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을 부추키곤 하지만, 최종희는 거울 보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통일된 자아에 대한 요구나 사회의 지배적 재현 질서를 반복해야 하는 거울의 요구를 현대의 작가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자전적 이력과 관련되지만, 그의 작품은 막연한 불만이나 콤플렉스의 표현이 아니라, 재현적 장치나 형식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바탕으로 게임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시각적 실험들은 이제 특정한 상황에 자신을 던져 놓는 지각적 체험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거울 앞이 아니라 거울 저편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며, 이 미로와도 같은 여정에서 되돌아올 때 자유로운 예술과 개인을 억압하는 재현의 질서는 전복될 것이다.

조현익
조현익의 작품에는 사랑과 욕망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그러나 그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피 흘리는 전쟁이며, 여자든 남자든 어느 하나는 희생되어야 끝나는 잔혹극이다. 그의 작품은 같은 남성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상대편 여성에게는 불편함을 준다. 오필리아나 메두사 같이 신화 속 여성 이미지로 분장한 모습만이 그녀들의 수난을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사랑이 누군가 희생물이 되는 잔혹극이나 수난극으로 변모되는 것은, 한 개인의 이러저러한 경험을 반영한 것이기 보다는, 그자체가 끝내 붙잡기 힘든 신기루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과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순간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잔혹극의 무대는 희생 제의가 수행되는 방처럼 연출된다. 당혹스러운 제의실은 현대성을 멀리 거슬러 올라가, 빛과 어둠이 대결하는 고딕적 분위기로 채워진다. 어두운 조명, 흔들리는 촛불, 거대한 창이나 단두대처럼 위에서 내려오는 육중한 철제 샹들리에, 무겁게 깔리는 음악 등은 희열에서 죽음에 이르는 사랑의 단계들을 구현하는 여성의 도상과 함께 총체적으로 작동한다. 녹슬고 갈아낸 철판 사이로 드러나는 여성상들은 팜므 앙팡부터 팜므 파탈까지 다양한 계열을 이룬다. 제의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촛불들은 불타오르면서 사위어가고, 붙잡으려면 꺼져버리는 주제와 내적으로 연관된다.

4. 전시기획; 도종준, 오재우, 정윤주, 김아미

도종준
도종준이 기획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유서 깊지만 쇠락해 가는 지방도시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그가 선택한 경주의 황남은 신라시대 임금이 살았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고 그나마 노인들이 많이 사는, 농촌 지역 같은 면모를 가진 장소이다. 공공미술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낙후된 지역이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문화재가 많은 관광지로 유동인구가 많은 특수성을 가진다. 문화재 보존 지역이다 보니 장소를 변형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공공미술을 함께 수행할 주체인 주민의 정체도 불확실해서 공공미술이 진행되기에는 힘든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곳도 한국의 다른 지역처럼 (재)개발에 관련된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는 곳이지만, 용산이나 대추리처럼 정치적 쟁점이 부각된 곳도 아니다. 주변에 문화재 천지인, 이 역사의 오랜 흔적이 있는 장소에서, 정작 토착 주민들은 문화와 호흡하고 있지 못하다. 도종준의 프로젝트는 이 장소에서 인간이 살아왔던 생활 흔적과 그 변화를 찾아내려는 목적을 가진다. 거시적인 역사 지평이 아니라, 보다 단기적인 변화, 생활의 시간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관이 유물을 발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시공간의 층들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그곳에 사는 이들의 자존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문화 속에 지역 주민을 참여시키고, 참여 작가들 간의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목적이 있다.
오재우
오재우가 기획한 ‘collectors choice’, 즉 소장자 대여 전시는 작품 자체보다는 현대사회에서 작품이 유통되고 소통되는 여러 통로들을 재조사한다. 그는 현대 미술이 개념화되면서 화장실 변기부터 벽의 낙서까지 모든 것이 다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시대에,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물음은 창작과 비평에 비해 부차적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술계를 돌아가게 하는 실제적인 역학관계를 드러낼 수 있다. 그는 작품을 살 수 있으며, 교양을 갖춘 전문가 계층을 주로 상대했다. 그가 이 기획을 위해 진행한 컬렉터와의 인터뷰에는 ‘가까이 둠으로서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예술을 사랑하는 소박한 이들부터 ‘좋아하는 그림과 사는 그림은 별개이다’라는 합리적인 투자가에 이르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된다. 거기에는 미술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의 구매 동기와 작품의 의미에 대한 담론이 포함되어 있다. 전시는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수집할 여력이 없는 컬렉터들에게 그들의 원하는 작품을 제작해서 증여하고, 이 가짜 작품을 대여하여 전시까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뷰 또한 꾸며져 있다. 관객은 전시된 작품을 진짜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해상도 낮은 재생산 매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짝퉁 원본들은 미술사 자체가 시뮬라크르로서의 역사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김아미
김아미의 기획은 권력과 담론의 관계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했던 미셀 푸코가 생애 말년에 천착하던 철학적 주제인 ‘parrhesia’와 아티스트를 결합시킨다. 전시 제목인 ‘파르지아티스트’는 미셀 푸코가 말한, ‘자신의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다. 김아미는 작가들에게서 그러한 유형의 사람들을 발견한다. 기획자는 지금의 소통 방식이 매우 폭력적이어서 대안의 소통방식에 대해 고민하였고, 작가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인가가 전시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특이한 주제 같지만, 실험과 창조를 요구하는 대안의 소통은 예술의 영원한 화두였다. 미술 또한 현실에 속해 있어서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전시 부제를 파생시킨 푸코를 따른다면, 담론 자체가 권력과 함께 감을 인식해야 한다. 권력이 있어야 담론이 가능하고, 담론은 권력을 낳는다. 권력과 담론은 상호배제적인 것이 아니다. 전시가 성공하려면 권력/담론을 생산하는 강력한 예술가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지만, 작가 선정기준이나 그들을 설득할 만한 컨셉은 확실하지 않다. 어떤 권력이며 어떤 담론이며 어떤 소통인가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화 수화기에 녹음기를 설치하여 친구와의 대화 같은 사적 대화를 전시장에 방송한다는 부대 행사는, 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이 권력의 그물망 속에 감시되는 미디어 지배 사회에서, 대안의 소통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윤주
정윤주가 기획한 그룹전 ‘unframe’은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실행될 계획이다. 전시장이 아닌 곳에서의 전시는, 미술이 소수에게만 향유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미술관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문턱이 있다. 미술인들조차도 고해상도의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전시 관련 정보만을 접할 뿐 동업자들의 전시도 잘 가지 않는 형편이다. 그러나 기획자가 제안한, 검정 대리석으로 마감처리 된 사옥 로비인 ‘로비 갤러리’는 전시 장소로는 최악이다. 지하철이나 사옥의 로비 같은 곳은 대중들이 많이 오가지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지나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대도시 자체가 머물고 대화하는 곳이 아니라 시각적인 방해물을 뚫고 통과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미술계에는 몇몇 로비 갤러리가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지거나 전시장의 형태로 개조되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작품’이라는 작품 선정 기준은 사방으로 뚫린 장소에서 전시물의 응집력을 보장하지 못한 채, 로비의 버라이어티 한 장식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전시는 기획자의 컨셉, 그것을 받쳐주는 작품들, 공간의 응집력이 모두 부실하다. 또 하나의 기획인 독도 관련 전시는 독도를 분쟁 지역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 주목하자는 목적을 가졌으나, 전시될 작품의 면면이 지나치게 대중적 코드에 맞춰져 있다. 예술적 자의식이 부족하고, 기획사의 대중 이벤트 같은 성격에 머문다.

출전; 아르코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