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환의 작품은 주체의 시선에 비율이나 각도의 변화를 준다. 이를 통해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데 있어 ‘환상(fantasy)’의 역할과 비중을 강조한다. 이성과 의식에 의해 억압되지 않는 환상은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방법이다. 그에게 환상은 자동기술적인 것이기 보다는 구성(construction)적이다. 그의 작품은 유사 실험실적인 장치들을 통해서 세계를 구성한다.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세계나 풍경이기에 앞서 건축적 구조를 이룬다. 작품 제목 [invisible architecture]처럼, 구조는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정되며,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보이는 것을, 또는 역으로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서사는 정교한 장치로 구현되는 공시적인 구조에 시간을 흐르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성은 유기체의 변화(변질)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에는 생명의 발생과 소멸, 적응과 도약이라는 진화론적 서사가 있다. 작가가 창안한 소우주 속에서 가속된 시간은 변화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시간의 주기 또한 작가가 창조한다.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discovery of Erops](2010)에서 그가 만든 ‘EC’라는 시간의 단위를 통해 대륙의 생성, ‘Erops’의 발견, 문명의 형성, 기후 이상, 2차 문명의 형성 등의 거시역사가 전개된다. 바게트 빵의 썩는 과정을 이용한 작품은, 빵에 물을 뿌리면 우기, 찢으면 지진, 말리면 건기나 이상 기후가 됨으로서, 작가는 창조주 같은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치이든 서사이든 어디까지나 꾸며낸 것임은 변함없다. 그런데 그는 이 꾸며냄이 꼭 예술에만 한정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 과정 자체에, 특히 가장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에서도 관철되는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전시장은 실험실이나 자연사 박물관과 닮아있다.

박재환의 작품은 인식과정의 불안정성에서 출발한다. 19세기의 리얼리즘처럼, 객관적인 대상을 명료하게 반영한다는 식의 인식 모델은 과학에서 온듯하지만, 그것은 가장 비과학적인 가정이다. 과학은 진리에의 합치가 아니라, 진리에 무한히 접근하는 가설과 실험에 바탕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언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현대의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 구성한 것만을 예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상이한 그물들은 상이한 세계 기술체계들에 대응한다. 기술될 수 있는 것은 또한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발견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찾았는지 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은 단지 소박한 있음에서 출발하는 유아론과 실재론의 공통된 가정을 전복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유아론이 엄격히 관철되면, 그것은 순수한 실재론과 합치된다고 본다. 유아론의 자아는 연장 없는 점으로 수축되고, 그것과 동격화 된 실재가 남는다는 것이다. 구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현대의 언어철학적 담론에 의하면 사물들의 선천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는 언어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언어는 투명하지 않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남아있고, 세계에 신비를 남겨둔다. 특히 신이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을 남김없이 포착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박재환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과정은 전적으로 낯설고 미지의 것으로 다가온다. ‘ERUSSISIOM’이라는 낯선 이름은 변질되는 유기물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탐험하듯이 다른 비율의 시야를 빌려 재인식한 세계’를 말한다.

그는 ‘하나의 비율로만 세상을 인지하는’ 동일자의 시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환상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긴다. 그의 작품에서 환상성은 공상이나 상상을 통해 형태를 기이하게 왜곡하는 방식이 아니다. 환상은 그에게 평범한 사물이나 현상에 단지 각도와 비율의 미세한 변화를 도입하게 한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장황한 장치를 필요로 한다. 물리학에서 입자 가속기처럼, 미소한 원자 단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기 위해 거대한 구조물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발상을 약간 바꾼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령 작품 [invisible architecture ; two geometric lands](2008)는 광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규칙적인 인공 구조물이 탁 트인 공간에 도열한 미래파적인, 또는 SF적인 풍경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특이한 소재도 아니고 합성도 아니다. 점자 보도블록에 밀착하여 찍은 하늘 사진일 뿐이다. 특이한 각도는 대중들이 매일 밟고 다니는 일상을 낯선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solar eclipse](2010)에서는 항성처럼 동그란 빵이 썩어가는 과정에 그것을 매일 관찰 하는 작가의 머리통까지 포함시킨다. 일식이라는 우주적 현상은 빵을 보는 각도와 배열 상태에 따른 것이다. 현대 물리학 이론이 예시하듯이, 관찰이라는 행위는 현상 자체를 변화시키고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는 대상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형을 야기하고 지속시키며 때로 가속시킨다. 작품 [ERUSSISIOM](2011)처럼 상해 가는 빵이 만드는 미지의 대륙이나 지도 형상은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변형은 객관적인 자료를 다르게 배열하거나 조작함으로서도 이루어진다. 작품 [invisible architecture] 시리즈에서는 맥락이 조금씩 변조된 다양한 정보들이 사실임직한 세계를 구축한다. 작품 [discovery of Erops](2010)에서 벽에 붙어있는 사진과 아래에 나열된 실험 접시는 서로 아무 관련 없는 것들이다.

마치 그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묘사나 설명 같지만, 각각의 원천은 다르다. 말과 사물 간의 거리는 멀리 벌어져 있다. 작품 [Climate change in ERUSSISIOM](2008)에서 곰팡이 피는 유기물의 변화 옆에는 온도 변화 따위를 나타내는 복잡한 도표들이 있는데, 그것은 인터넷 등에서 다른 과학실험의 데이터들을 긁어와 붙여놓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진리에 내재된 오류가능성, 사실에 스며있는 허구의 몫을 드러낸다. 박재환의 작품은 몇 가지 구성요소를 정하고 그것을 조합하여 게임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학과 예술을 관통하는 실험의 방법이다. 고안된 장치와 주어진 장에서 놀이하는 방식은 관객의 참여가 가능한 열린 작품을 지향한다. 지난 11월 중순 홍은창작센터에서 오픈하여 한 달 간 진행된 지역 연계 프로그램 [objects to space]에서는 타임캡슐 같은 장치 안에 스튜디오 주변의 초중고 학생들이 가져오거나 선택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하고, 검색도 되도록 연출했다.

여러 실험 접시들에 변질되는 유기물을 진열하여 미지의 대륙을 연출한 이전 작품 [invisible architecture](2011)처럼 각각의 사물은 하나의 신세계처럼 간주되었다. 벽에 붙은 투명 반구 안에는 따지 않은 참치 캔부터 지우개 가루로 그린 그림까지 다양한 사물이 안치되어 있다. 일상의 질서는 고고학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작가는 학생들에게 물건을 하나씩 선택하게 하고 걸리버처럼 자신이 커지거나 작아졌다고 생각한 뒤 그 속을 탐험할 수 있게 유도했다. 맥락을 잃고 나열된 사물들의 분류하는 원칙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수집된 것들은 초현실주의적 오브제처럼 그 핵심이 감추어진 채 표면을 떠돌게 한다. 그것들은 끝없이 첨가되는 물신적 수집품처럼 단지 일련의 것들을 이룬다. 장 보드리야르가 [사물의 체계]에서 말하듯이, 사용되는 것과 소유되는 것, 이 두 가지 기능을 가지는 사물과 달리, 기능이 없거나 사용이 모호한 사물은 수집 속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된다. 수집가에게는 단 하나의 사물로는 충분치 않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수집가는 언제나 점차 증가될 수 있는 일련의 사물만을 갖는다. 기능이 없거나 그 사용이 모호한 순수한 사물은 주관적인 지위를 가진다. 수집은 아이에게는 외부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초보적인 방식, 즉 배치, 분류, 조작이다. 일련의 것이 없다면, 가능한 유희도 소유도 없을 것이며, 사물도 없을 것이다. 수집된 사물의 본질보다 체계가 중요하다. 박태환의 작품은 체계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체계는 유일의 것이 아니라, 바게트 빵에 피어나는 곰팡이 무늬만큼이나 많은 체계가 생성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을 보는 상투적 방식을 소격시키는 그의 작품은 ‘다른 것(different)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 올 것’(퐁주)을 천명한다. 그의 작품에서 작가의 역할은 전무후무한 것을 꿈꾸는 공상가가 아니다. 온통 인간주의적 시선에 길들여진 자는 더더욱 아니다.

19세기 부르주아적 사실주의 소설을 비판하는 현대 소설가 미셀 뷔토르에 따르면, 사물들로 가득 찬 세계에 있어서 사물들은 그저 인간에게 끝없이 인간 자신의 모습을 반사해 주는 거울에 지나지 않았다. 뷔토르는 한 작품의 허구적 요소들이 현실세계와 평행하는 단 하나의 세계로 통일됨으로서 이 현실 세계를 보완하고 밝힐 경우에만 작품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품을 보는 방식과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을 조금씩 바꿀 것이고, 따라서 사물들은 새로운 일시적 균형을 취할 것이며, 그 균형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모험을 시작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대의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내재한 신비를 탐색하게 될 것이다. 작품 [migration of ERUSSISIOM](2008)에 나타나듯이, 작가의 눈 바로 아래 피부 조직에 정착한 미지의 생물체처럼, 박태환의 작품에서 환상, 즉 3차원 이상의 세계나 사건은 이미 항상 일어나고 있으며, 단지 새로운 관점에 의해 발견되기만을 기다린다.

출전; 홍은 예술창작 센터 멘토링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