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도 아니고 몹쓸 이라함은, 낭만주의를 염려 어린 애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권태와 부조리에 빠져 있는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의 지배적 가치의 근거를 묻고, 때로 정체된 상황에 돌파구를 열어주는 영웅적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이 가능하기 위한 힘의 축적이나 그것이 실패한 후의 추락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치명적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때로 몹쓸 것이 된다. 작가들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극히 현실적이거나 냉정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것의 탄생, 적어도 무엇인가를 또 다른 맥락에 놓는 것은 주어진 현실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현실에 대한 긍정은 감성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사다리일 뿐이다.
결국은 어떤 공백, 여지, 잉여, 초과의 몫이 굳어진 것들을 해체시키고 또 다른 것을 낳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근대 낭만주의에 내재된 저주, 또는 축복의 몫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낭만주의는 지배적 질서를 재현하는 고전적 아카데미에 대항하여, 이성에 의해 타자화 된 자연에서 예술과 사회를 갱신하는 힘을 발견하려 한다. 그들은 유한한 문명과 대조적인 무한한 자연의 편에 서며, 이 자연에는 인간의 본성도 포함된다. 루소적인 자연 회귀는 근대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파괴되는 자연에 직면한 현대의 대안적 가치가 되었다.
제주의 바다 같은 숲을 그린 박병춘, 숲을 에덴으로 표현한 이혁준, 시작과 끝이 모호하여 정처 없는 헤맴을 야기하는 권대훈의 숲, 곰팡이 같은 미시적 차원으로 미지의 대륙을 변모시킨 박재환, 문자에 의해 단절되는 생의 약동을 표현한 김신일의 작품은 자연을 영감과 회귀의 원천으로 삼으며, 자기지시적인 동어반복에 머무는 문명 반대편에 놓는다. 바다는 무한한 자연의 상징으로, 강소영의 [검은 파도], 조이수의 [검고 깊은 호수], 김지아나의 [빛 소리], 최종운의 [수직의 바다] 등에 출몰한다.
예술사는 근대 낭만주의에 와서 비로소 ‘저주받은 예술가’와 ‘천재’ 등이 나타났음을 알려준다. 근대 사회의 이상과 상당 부분 조응했던 고전주의가 보편적 이성을 앞세운다면, 낭만주의는 절대 자아를 주장한다.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근대라는 격동기에 직면했을 때 자아는 예술가가 의지할 유일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낭만주의의 속박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주장은 예술가를 선지자나 예언자와 같은 위치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격상은 예술에 더 우호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 없는 냉혹한 사회에 대항한 자기 보호 본능 및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요구하는 합리주의적 개인과 달리, 대체되지 않는 개성을 주장한다.
사회 또한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면제된 예술가를 새로움과 진기함을 가져다 줄 괴짜로 간주하곤 한다. 그때부터 예술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시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들은 ‘왜 나는’이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으며, 그것에 대답하려는 노력을 통해, 낭만주의자로 대변되는 근대예술가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최승훈+박선민의 작품 속 노숙자는 집(home, house) 없는 예술가를 떠오르게 한다. 강민수는 잃어버린 아이들과 유년기로 상실감을 표현하며, 물건이 잔뜩 쌓인 복잡한 실내에 멀뚱하게 서있는 김진의 초상은 환경과 괴리감을 드러낸다. 이혜인은 주체와 객체를 과정으로 해체시키며, 이세경의 머리카락 무늬 도자기는 인간의 본체 보다 나머지를 부각시킨다. 이창원은 보도 사진에서 오려낸 인물들로 허상화 된 인간과 구조의 긴밀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몹쓸 낭만주의 전의 특이점은 19세기에 발생한 낭만주의를 21세기에 다시 호출하면서, 정보혁명이 예술에 끼친 영향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기계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게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 맞게 낭만주의 또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정보는 물질도 정신도 아니지만, 유심론을 고무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보화 사회를 낳은 주역들의 면모를 보면 낭만적인 데가 있다. ‘모든 나라의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신경과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여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환상’으로 정의되는 사이버스페이스, 그 말을 널리 확산시킨 윌리엄 깁슨의 소설 제목이 [뉴 로맨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보를 무한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데이터 뱅크는 새로운 자연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조타수는 낭만적 이미지를 가진다. 정보사회 또한 선지자와 몽상가, 그리고 저항자를 낳는다.
독일의 전자음악 그룹 Kraftwerk의 [autobahn](1974)을 들어 보면, 1960년대의 히피를 비롯해, 자연주의에 바탕 한 낭만적 이상주의가 사그라들었을 때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비전을 열어준 매개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autobahn]은 전능한 기술을 매개로 하여 지평선 너머의 저곳까지 무한 속도로 질주할 수 있음을 예시한다. 정보화 사회의 낭만주의는 시시각각으로 펼쳐져 다가오는 세계에 몰입하는 주체를 낳는다. 몰입은 역설적으로 주체의 확산이나 해체를 야기한다. 다양한 인터페이스 앞의 현대인들은 미디어 간의 상호반사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게임의 방식을 취하는 이준의 작품은 날씨나 감정만큼이나 불확실한 인공생태계를 전제하며, 한정림의 [바벨의 도서관]은 객관적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정보의 표면들을 보여준다. 회전판에 스쳐가는 사람들을 투사하는 이동주, 수백 개의 짝퉁 인형들과 명상을 시간을 권하는 정승은 정보의 바다라는 새로운 숭고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선다.
출전; 월간미술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