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수 전 (12.1--12.30, 카이스 갤러리)
강민수와 이혜인의 작품은 혼합 매체를 활용한 두터운 질감을 배경 삼아 그 안팎에 단편화된 자연, 인물, 사물들을 배치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여러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 둘의 전시에서 불연속적인 화면을 은유적으로 이어주면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는 어린아이다. 그들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지각하며, 기억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려 감은 후 이를 통해 다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잠깐 비추고, 다시 미지의 시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천진무구한 아이들은 잃어버린 것을 만나게 하지만, 특정한 추억의 재현이나 아련한 향수에 머무르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들과의 만남은 부재와 박탈감, 그리고 멜랑콜리에 빠져들게 하지만, 그렇게 파헤쳐 놓은 밑바닥, 또는 심연에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갈일만 남았다는 여지도 만들어낸다.
희미한 유령 같은 강민수의 아이들이나, 골조만 남은 인형 같은 이혜인의 아이들은 습관화되고 표준화된 시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 있다. 타자로서의 대상(das Ding)은 ‘기의 바깥에 있어서’ 침묵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회환으로서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 뿐’(라깡)이다. 이들 작품에서 타자의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사물과 내가 사유하는 관념 주위에서 내 지각의 변두리의 세계, 즉 배경을 조직하는 것’(들뢰즈)이다. 강민수의 작품에서 이러한 배경은 속도감 있는 두터운 물감이 휩쓸고 지나간 회백색 판들에 의해 조직된다. 이혜인의 작품에서 배경은 맹목적인 파괴와 생성을 반복한다. 강민수는 밀어서 지우고, 이혜인은 뒤섞고 들쑤신다. 공간을 초토화시키는 시간의 스케일이 숭고함을 자아낸다. 이들은 그 흔적과 파편들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 한다.
강민수의 [IDYLL-아이들의 나날들] 전에서 멀뚱하게 서있거나 놀고 있는 아이들은 실내인지 바깥인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흩어져 있다. 그 공간을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이며 기억의 공간이다. 지나간 유년기나 실제로 잃어버린 아이들(미아)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속 아이들은 대개 모노톤이다. 낡은 흑백 사진 속 이미지처럼 현실감이 없다. ‘idyll’이라는 독일어에 내포된 ‘소박하고 목가적인 정경’은 유령 같은 주인공들의 모습에 의해 심리적이고도 가상적인 장소로 변환된다. 사라짐과 부재는 공간이나 배경을 만드는 방식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서로 구별되는 층들을 말소 하에 둔다. 작품은 ‘IDYLL-풍경’, ‘기억의 공간’, ‘유년의 공간’으로 나뉜다.
작품 [IDYLL-카페트의 방](2011)에서 그림 속 소년은 흑백 톤이다. 소년은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으며, 두터운 물감 층의 흑백 벽에 둘러싸인 장소에 있(었)다. 작품 [IDYLL-공원](2010)에서 장난감이나 놀이기구, 나무, 그리고 뚫린 회색 벽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고유색이 있지만, 여기저기 모여서 노는 아이들은 흑백 톤이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 없다는 암시이다. ‘기억의 공간’에서 여러 기원을 가지는 풍경을 반투명한 막으로 봉인하고 그 위에 또 다른 시공간을 시작한다. ‘유년의 공간’은 안팎의 관계가 모호하다. 빙벽 같은 회백색 바닥을 뚫고 식물이 자라는가 하면, 야생의 동물도 있다. 강민수의 작품 속 실종된 유년은 그것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 운동은 군데군데의 단절과 균열로 인해, 되돌리면 회복될 것이라 기대되는 유기적 통일성이 없다. 두터운 물감 층으로 힘차게 밀어서 만들어진 공간은 흩어진 것들을 그러모으려는 상자 같은 곳이다.
각각의 작품이 상자이고 상자들이 모여 미로를 이룬다. 이 미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지각만으로는 부족하고 기억이 필요하다. 관객은 다시 비슷한 벽을 조우하게 될 수도 있지만, 반복이나 순환은 아니다. 기억은 시간을, 미로는 공간을 의식하게 한다. 이 방향과 좌표가 없는 장소에서 관객은 낯선 도시에 방문한 이방인처럼 길을 잃는다. 낯선 풍경과의 갑작스런 조우는 의도되지 않는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베일처럼 쳐지거나 막처럼 뒤덮은 그림 속 공간에서 유년기의 환상과 상상이 무한대로 뻗어 나갈 수는 없다. 그림 속 식물은 제대로 뿌리를 내린 것인지 표면에 드리워진 패턴인지 불확실할 정도이다. 이 얇은 공간 속에 배치된 아이들은 종잇장처럼 창백하다. 아이들은 꿈속의 인물처럼 일시적이며 비현실적이다.
눈이나 얼음을 떠오르게 하는 회백색 물감의 층은 그 얼어붙는 듯한 봉인으로 인간적 온기를 휘발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유년기는 마냥 순수한 천국은 아니지만, 아이 특유의 미숙한 또는 거리감 있는 눈으로 본 풍경은 이국적이다. 춤추는 광대, 홍학, 색색의 풍선은 서로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한다. 겹겹의 층위로 인해 예기치 못하게 만나게 되는 사물과 인물들은 상호작용 한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 다가오는 첫인상의 생생함이 보존되어 있다. 신선한 첫인상의 회복은 늘 상 새로운 세계를 시작해야하는 작가에게 절실한 문제이다. 과거는 열려있어서,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미지의 세계를 시작하기 위한 단초가 된다. 강민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방식은 역사학이 아니라, 고고학이다. 고고학자는 선적인 역사적 관념의 재확인이 아니라, 갑가지 불거진 단층에서 불연속적인 무의식의 단편들을 발굴하는 자이다. 계속 추가되는 발견들은 과거를 결코 완결시키지 못한다.
이혜인의 ‘네 뺨에 석양’ 전은 풍경 속에 얼굴이 있고, 얼굴 속에 풍경이 있다. ‘너를 생각하면 노을빛이 떠올라’라고 말했던 옛 친구는 거울을 비추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내 얼굴과 만물의 근원인 빛을 만나게 했다. 네 뺨을 물들인 석양은 빛의 반영이 아닌, 내부로부터 발산되는 어떤 강렬한 감정의 상태 또한 일깨운다. 밀어낸 물감의 층으로 만들어진 이혜인의 작은 초상화들처럼 감정은 크고 작은 공간에 펼쳐지며 출렁인다. 그러나 이러한 충만 된 만남은 모든 것이 부수어져 파편으로 쇄도하는 묵시록적 화면 어딘가로, 또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네 뺨을 물들였던 석양과 마구 파헤쳐지는 땅의 색은 구별이 안 간다. 이제 그녀의 작품에서 내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깨져 있고, 태양은 끝없는 변화를 강요당한 저주받은 땅에 빛을 거두어들인다. 사람들은 조명 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러나 얼굴들은 깨진 전구처럼 망가진 채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출입구를 제외한 세면의 벽을 각각 채운 거대한 화면들은 풍경/얼굴 한 가운데로 관객을 들여보낸다. 들어서서 마주보이는 벽면 앞에 걸어놓은 [붉은 눈](2011)은 수도권 주변 재개발 지역의 풍경이다. 화면 오른쪽의 폭발하는 둥근 원은 태양이 아니라, 블랙홀이나 하수도처럼 보인다. 땅과 숲과 집이 한데 뭉개져 흐르고 있는 공간 곳곳에 파이프와 각목 등이 솟아있고, 괴기스런 가면 같은 얼굴들이 돌처럼 박혀 있다. 왼쪽 벽에 붙은 작품 [흰 그림자](2011)에서 양치는 목자로 분한 예수가 새겨진 교회는 골조만 남아 있고, 이슬람 여성처럼 검은 복장의 여인들이 교회에 들어간다. 기표와 기의 간의 괴리는 알레고리 가득한 이혜인의 작품에 편재해 있다.
한쪽부터 붕괴되는 교회 건물로부터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물질과 다층의 색으로 쓱쓱 그어진 대지는 한데 뒤섞여 아래의 깊고 시커먼 공간 위에 위태롭게 걸쳐있다. 오른쪽 벽의 [합창](2011)은 성가대의 소년 소녀 같은 두 도상이 마주본다. 내부의 톱니 장치가 훤히 보이는 자동인형(automata)같은 모습이지만 하얀 옷과 검은 옷을 입은 둘은 성이 구별된다.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마주 보는 두 연인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지만, 그 사이로 두터운 색의 층으로 발린 대지는 쩍 들려져 빈 공백을 보인다. 이 찢어진 틈은 거대한 눈처럼 보이는데, 눈동자에 가시처럼 꽂혀 있는 것은 각목 틀에 하얀 천만 두른 허수아비들이며, 둥글게 도열해 째깍거리는 소리에 맞춰 기계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것들은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예시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들은 온통 고통과 환멸을 낳는다. 군데군데 물이 고인 대지에 검은색 비닐하우스들이 간간히 박혀 있는 풍경은 작가가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건져 올린 사실적인 장면이다.
두터운 회화의 지층에 이물질처럼 박혀있고 상처처럼 벌어져 있는 공백을 가득 메우는 것은 멜랑콜리이다. 이혜인의 작품에서 멜랑콜리는 잃어버린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정확이 무엇이 상실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장면 속 어느 것도 정확히 명명되지 않는다. 상실된 대상은 욕망의 대상처럼 불확실하다. 풍경과 사물, 인간은 물론 감정까지 폐기물이 되어 범람하며, 회화는 그것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 되지만 곳곳에 구멍이 뚫려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넘치려 한다. 구체적인 대상이라 할 수도 추상적인 기호라고도 할 수 없는 밀도 있는 물질적 기호들의 펼침과 접힘은, 이와 우연히 맞딱뜨린 이에게 수수께끼를 풀이를 요구한다. 불투명한 물질적 기호로 가득한 이혜인의 작품은, 예술이 추상적인 이념이나 진리, 지식이 가정하는 투명한 소통과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개진했듯, 예술은 사랑이나 광기, 죽음처럼 고독과 고뇌 속에서 피할 수 없이 마주친 무언의 기호들을 거듭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운명을 부과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