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지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미완성이며 단편적이다. 현대미술에서 억압된 알레고리의 복귀를 보는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의 분위기를 유적지에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유적은 돌이킬 수 없는 해체와 부식의 과정으로서의, 기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져가는 것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유적지와 진배없는 장소에 걸맞게(site-specific) 설치된 작품들은 바탕과 섞여서 그 곳에 속해버린다. ‘옆집 그림’ 전은 형식적으로는 회화전이지만, 전체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설치미술의 속성이 강하다. 오프닝 날 열린 백현진의 개막공연은 그의 미술에 상응하는 음악이다. 몸, 그리고 삶과 일체화된 자연적인 그 무엇을 굳이 어떤 장르로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현진의 음악이나 미술을 살펴볼 때, 그가 거부하거나 피하려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을 코드화 하려는 시스템의 음험한 기도이다.
그의 작품들은 미술이건 음악이건 할 것 없이 기교를 거부하고 마음가는대로 기록한 것에 가깝다. 무의식, 무형태, 무기교, 무의미 등등, 그의 작품은 ‘無’자로 해석할 여지가 많다. 그 핵심에는 시간성에 대한 독특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백현진이 시간예술인 음악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지만 그의 작품은 양자가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선조적 시간은 동시성으로 와해 또는 확장된다. 작품은 직접적인 시간의 흐름에 의해 매번 새로이 창조되며, 모든 것이 상호 침투되어 하나의 살아있는 흐름이 된다. 생의 지속, 그 흔적들은 음으로 색으로 형태로 순간적으로 고정될 뿐이다. 그것은 지상의 지배적 질서를 특징짓는 재현 이전의 차원에 직접 뿌리 내리려 한다. 작가는 단지 뿌리에 붙어있는 줄기일 뿐이고 무엇인가를 통과시킬 뿐이다. 그 기원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상징계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한계의 경험으로서의 예술’(크리스테바)은 광기에 근접한다. 광기는 서양의 신비주의나 동양의 무위사상, 백현진과 더욱 가깝게는 하위문화에서의 싸이키델릭한 경험 사이를 요동친다. 그 무엇이든 이 원초적 현실과 가까워지려는 몸짓은 지배적 상징질서를 위협하고 변형시키려는 위반의 충동으로 가득하다. 이 충동은 상징질서의 기준으로 보면 일관성 없는 어법을 낳을 뿐이다. 그러나 ‘충동으로 존재하지만 표현되지 않는 총체성’, 즉 ‘상징계 이전에 존재하는 매체인 코라(chora), 이 리드미컬한 공간은 어떤 주제도, 입장도, 의미화가 구성되는 어떤 과정도 갖고 있지 않다’(크리스테바) 이러한 지향 아닌 지향에서 남는 것은 행위뿐이다. 삶의 표면에 얇게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이고 유동적인 실체와 하나가 되려는 그는, 개인을 지배질서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려는 약호화 된 재현체제를 매순간 허물어뜨리려 한다. 삶의 재현이 아니라, 삶 그자체가 되려는 것은 현대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박하면서도 가장 야심찬 기획일 것이다.
출전; 계간조각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