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오차의 범위 展 (1.5--2.12, 아르코 미술관)

부산과 광주의 두 공공미술관과 서울의 아르코 미술관이 공동 기획하고 순회 전시하는 이 전시는 올해 2회를 맞았으며, 17명의 작가의 작품 70여점으로 구성된 대기획전이다. ‘비밀, 오차의 범위’라는 전시 주제는 비밀이 본질과 현상 간의 괴리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차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 같은 투명한 이성의 언어가 아닌, 그 자체가 소수자의 비의적 언어가 된 현대예술이 과연 이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풀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한 술 더 뜨기라는 동종요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예술은 말과 사물 간의 행복한 일치를 통해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정리, 분류하려는 계몽주의적 기획과는 거리가 있는, 불완전과 미완의 어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비밀 풀기는 일상적 환경과 제도 교육을 통해 습득되는 사회의 지배적 상징 언어와의 동일시가 아니라, ‘다른 것(defferent)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오는 것’(F. 퐁주)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말과 괴리된 사물을 다루는 현대예술은 불가능하면서도 매혹적인 이 기획과 잘 어울린다. 현대 미술가들이 구사하는 조형 언어는 과학기술의 언어처럼, 투명하고 유용한 도구로서의 언어와 다르게, ‘언어는 언제나 하나의 체계 내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무의식 체계’(F. 소쉬르)라는 현대 언어학의 가설과 더욱 가깝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 또한 언어처럼 항구적인 구성과 해체의 과정 중에 있다.

차이는 비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을 탐구하는 언어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 미술가들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통해 비밀이라는 주제에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상적인 언어와 예술적 언어의 특성을 구별하려 했던 M. 블랑쇼는 통상적인 언어가 사물들에 대해 말을 하며, 사물들을 떼어내서 우리에게 건네준다고 본다. 그리고 그 언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언어자체가 본질적 경험이 되는 예술의 허구적 언어는 통례를 벗어나고 쓰이지 않는 것이 된다. 투명한 도구적 언어 외에 예술적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구별을 넘어, 그 구별 자체가 어떤 것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야할 진정한 비밀은 그 의미인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는 것을 넘어서 언어 자체도 지시하는 예술의 언어는 추상적 지식의 대상과 달리, 끝없이 해독하고 해석해야할 기호가 된다. 전시된 작품들은 불투명한 예술의 언어로 자연과 세계, 그리고 인간 사회의 비밀을 투명하게 밝히려는 역설적 시도가 있다. 김성우는 관객이 손잡이를 돌리면 줄 지어 세워놓은 삽들이 자동으로 삽질하는 장치와 버튼을 누르면 후광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보여준다. [지식인을 위한 득도보조기구]라는 제목의 삽이 나오는 작품은 계몽적 이성의 탈을 쓴 도구적 이성의 공허한 헛바퀴들이다. 이조흠은 [사회의 교집합]에서 만화 캐릭터들을 반복한 도상으로 대중문화에 지배적인 동일성을 풍자한다.

김윤아와 김영헌의 작품은 자못 명료해 보이는 가시적 현상이나 대상을 과정으로 해체시키려는 충동이 있다. 김윤아는 비와 우산의 형태를 실로 얽어 공중에 설치하였는데, 그것은 실체보다는 허의 공간을 부각시킨다. 김영헌의 [electric cloud] 시리즈는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전쟁과 경쟁이 지배하는 현실의 질곡을 모호한 무지개 구름으로 변형시킨다. 박종영과 한승구의 작품에서 인간의 실체는 텅 비워져 있다. 박종영은 관객의 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을, 한승구는 렌티큘러를 이용하여 얼굴 아래의 유리 가면을 보여준다. 그자체가 가면 같은 얼굴들 뒤에는 또 다른 가면이 있을 따름이다.

보다 유연하게 이미지를 생성시킬 수 있는 회화에서 주체는 더욱 분열적이다. 이선경이 그린 얼굴은 눈과 입에서 얼굴이 나오고, 얼굴이 무성생식 세포처럼 분열한다. 이재헌의 유화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상들은 인간인지 아닌지 조차 모호하다. 흐릿한 남자의 실루엣만으로 나오는 인물들은 고통스럽게 머리 감싸거나 사형수처럼 두건을 쓰고, 머리부터 뭉개진 채 체액을 흘리거나 얼굴 자리에 파편적 붓자국만 남겨두곤 한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사로잡았던, 자신을 절단할 것 같은 요동치는 선들에 대한 공포에 대해 언급한다. 형상들은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몸이다. 배경과 명료히 구별되지 않는 인간상들은 사고와 행동의 주체로서의 확고한 자기동일성이 해체되어 있다.






비밀은 현실의 자연과 사회 대신에 작가들이 창출한 대안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2010년에 ‘mystery art museum’ 전을 열었던 이소영은 [초현실적인 집]에서 여러 겹으로 구획되고 중첩된 가상의 공간을 보여준다. 이정록은 전구가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린 [생명의 나무]로, 문명사회를 기초하는 굳건한 계통수인 지식의 나무를 대체한다. ‘비밀, 오차의 범위’라는 부제 하에 전시된 작품의 면면은, 비밀을 풀기 위한 오차의 범위를 줄이기보다는 무한대로 확대한다. 우리도 연루되어 있기에 객관적인 진리의 대상으로서는 불가능한 세계의 비밀은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라, 수수께끼 풀이 같은 놀이가 된다. 직관적 유희에 의한 무한 조합은 사회의 공동 규약에 의한 이성적 해법 못지않은 결과를 예시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놀이는 예술의 상대적 자율성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예술의 자율성이 현실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인지 소외인지는 늘 불분명하다. 근대 사회가 현상과 본질 사이의 괴리를 통해 생산한 것은 비밀 뿐 아니라, 이윤이었다. 사용가치로부터 분리된 ‘교환가치는 개개의 노동 산물을 신비로운 사회적 상형문자로 바꾸어버린다‘(마르크스)고 지적되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주 특징인 물신주의는 비밀과 이윤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이윤의 체계 속에서 예술은 전형적인 타자가 되었다. 타자에게 이 수수께끼는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자신의 절박한 요구에 의해 풀어야 할 과제로 주어진다.

출전; 월간미술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