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임만혁의 요즘 작품은 좀 더 다채롭고 울긋불긋 밝아진 색상으로 이상적인 가족의 이미지에 어울릴 법한 아기자기함과 아늑함을 부여한다. 자전거를 탄 가족을 그린 2009년 작품 [가족 이야기09-11]에서, 아들을 목마태운 아버지 앞뒤로 딸과 부인, 그리고 개까지 가세한 그림에 나타나듯, 몇 년 전 부터는 친근한 동물까지 포함시킴으로서 가족 공동체의 외연은 더욱 확대되었다. 등장하는 동물은 개, 닭, 말, 새(갈매기) 등으로, 동물이 지금처럼 우리나 실내로 격리되지 않고 바깥에서 한데 섞여 살았던 1970년대 시골에서의 추억을 되살린다. 그의 작품에서 동물은 인간과 같은 크기와 자세로 소통하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큰 비중으로 인간의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이전작품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위태로운 배에 탄 가족들은 보다 견고한 바닥인 지상 위에서 동물의 등 위에 올라 타 있다. 2010년 작품 [가족 이야기10-1]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남자 가장이 거대한 새로 분하여 양 날개로 가족들을 등에 태운다. 그의 작품에서 동물, 또는 동물적 요소는 단순한 장식적 액세서리가 아니라, 놀이와 치유, 유대라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인간의 눈망울과 똑같은 눈을 가진 동물은 친구이자 가족인 것이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동물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욕망이 분리되어선 안 된다는 점 또한 말한다. 약간 마른 듯한 그의 인물상에서도 성숙한 여성의 매력은 은폐되어 있지 않으며,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유희적 상황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에게 작업과 생활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작업실과 생활공간이 하나가 된 생활 밀착형 작업 스타일은 예술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그의 선택이다. 원래 하나였던 공적/사적 영역이 분리되면서 가정이 사적 영역으로 국한되는 역사적 과정은 밖에서 노동을 통해 벌어온 임금으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남자 가장이나, 가정 안에서 아무 보상 없이 그림자처럼 수행되는 가사노동, 또는 가사노동과 비슷한 부차적 노동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이중으로 지탱해주는 여성 모두를 억압해 왔다. 사적 영역으로 고립된 가정은 무한히 연장된 아동기까지 책임지면서 가정을 부양하는 이나 보호받는 이 모두에게 간단치 않은 공간이 되었다. 그곳은 결코 자연적으로 주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정은 현대의 경쟁적 사회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중산층적 이상은 점차 극소수에게나 실현가능한 가족 로망스일 뿐이다. 오히려 가정은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옮겨지는 장이 되곤 한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가족 이야기에 내재된 평화로움과 불안함의 공존은, 가정이 반드시 따뜻하고 행복해야만 하는 곳이기에 더 춥고 불행을 야기할 수 있는 역설적인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한 몸처럼 뭉쳐진 만큼이나 서로 소원한 채 흩어져 있는 모습도 많다. 가정은 인간적 친밀함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우리는 언제나 가족이 나오는 풍경에서 화해의 이미지만 보려 하지만, 가족 이야기로 작품을 특화시킨 작가에게 가족의 양지쪽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유난히 추워 보인다. 가정, 또는 가족이 고립된 섬이 된 것 자체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자 귀결이다. 가족 이야기에 내재된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족이 사회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가부장적 가족의 발생과 함께, 더욱이 현대사회에서의 핵가족 같은 개별 가족의 발생과 함께, 가정은 그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와는 무관하게 사사로운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공/사 영역의 분리가, 예술 또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재생산 활동(그림자 노동)처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 예술의 고립과 전락은 공/사가 구별되지 않는 탁 트인 시공간에서의 소통이 사적인 시공간을 채우는 장식품으로 되기 시작한 때부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완성된 때는 예술이 상품화와 더불어 자율성을 쟁취한 근대이다. 극단적인 분업화를 통해 서로 달라진 생활 패턴은 물론, 서로 다른 성과 세대, 종들이 공존하며 소통하는 임만혁의 작품은 이러한 근대적 모순이 펼쳐지기 이전의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토피아는 현재의 디스토피아와 대조되는 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족은 개인의 확장으로서 폐쇄된 소비 집단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동물 또한 타자로 격리되고 도구화되기 때문이다.







연민을 자아내는 크고 동그란 눈과 인체를 이루는 각진 실루엣은 이상적인 것만큼이나 도달하기 힘든, 또는 지키기 어려운 가족의 드라마가 내재한다. 실루엣 뿐 아니라 형태의 그 내부를 채우는 특유의 준법은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지만, 동시에 벽화 같은 오래된 표면의 견고함이나 강한 리듬을 연상시키면서,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그 명맥을 이어온 가족 공동체를 강조한다. 전시된 20여점의 작품은 최초의 가족인 아담과 이브 시리즈로부터 골프장에서 현대적 여가를 즐기는 이들을 비롯해, 대부분 가족을 소재로 한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원시시대의 가면이나 현대의 캐릭터처럼 유형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에 주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딱히 어떤 특정한 가족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다른 성과 세대의 인간 간의 심리적, 물질적 관계가 집약되어 있는 장으로서 가족에 주목한 결과이다.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거친 사회로부터의 방파제이자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실외의 풍경인 경우, 등대가 있는 방파제가 배경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작가가 반드시 강릉에 살아서 만은 아닌 것 같다. 거친 바다 위에 좁게 난 길 같은 방파제 위로 분리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관계망을 이루는 연극적 무대가 되기도 하고, 가로 또는 세로로 배치됨으로서 화면의 길이를 다채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가족과 사회 등을 분리하는 경계면으로서의 방파제는 그리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적인 영역의 대변자가 된 가족이나 가정의 경계는 지배적 시스템에 의해 그어진 가변의 영역으로, 결코 공적 영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임만혁의 ‘가족 이야기’는 동시에 사회의 이야기가 되며, 가족상은 동시에 현대의 풍속화가 된다.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많은 내용들이 파생될 수 있는 다산(多産)의 주제이다. [가족 이야기]로 붙여지는 많은 작품에서, 이야기는 가족으로 대변되는 인간들 간의 관계성 속에서 발생한다. 이 관계망이 복잡해지면, 한 화면을 넘어서 3면화 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것은 종이 크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개별 예술로 분화하기 이전의 벽화나 종교화가 가지는 종합적이고 기념비적인 차원을 복구하려는 의도의 결과물이며, 이야기적 요소를 풍성하게 하는 요소이다. 이 전시에서 3면화는 남자들 간의, 남녀 간의, 모녀간의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담는다. 좌우 양쪽이 노랑 배경이지만, 가운데 화면의 여자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음으로서 색채를 통해 조형적 연결망을 형성한다.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퍼머 머리의 나이 든 여자, 긴 머리의 젊은 여자, 단발머리 소녀, 이런 저런 역할을 맡는 남자 가장, 그 남자의 축소판인 소년 등이다. 가족상은 모든 이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보편성을 추구한다.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려는 현대의 풍속화를 그리기 위해 임만혁이 구사하는 형식 또한 복합적이다. 그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양자가 뒤섞인 독특한 작품을 통해 화단과 미술시장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원주의 장인이 만든 두터운 장지 위에 목탄으로 형태를 그린다. 30-40번씩 칠해서 바닥이 은은하게 투영되는 채색 방식은 고분벽화와 민화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우연과 실수까지도 작품의 요소로 포함하는 바탕처리는 깊이 감을 준다.

단순한 서양식 드로잉을 벗어난 목탄 드로잉은 붓 선으로 한복을 섬세하게 표현한 신윤복처럼 형태와 표정을 현대적 어법으로 표현한다. 붓 대신에 목탄으로 그려진, 화면에 편재하는 리드미컬한 선적 요소는 동양화의 준법에 해당한다. 사선과 예각으로 처리된 임만혁의 준법은 원근법적 입체감 없이도 평면적인 색채와 형태에 존재감을 부여한다. 그의 작품은 타자화 된 전통을 불러들여 현대성에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가분수 같은 큰 얼굴에 정면성을 유지하며 가면 같은 모습을 한 인간, 그리고 중요한 부분을 크게 그리며, 기하학적이고 단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은 다 표현하는 방식은 작가가 수집해왔던 아프리카 조각상들에서 왔다.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그림에 나타난 한국인의 체형을 참조한 작품에서, 강조된 눈과 더불어 커진 귀, 그리고 손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상황을 표현하는 방식은 초상화의 어법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화면 가운데에 놓는 방식은 동양화의 형식이다.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헤게모니를 누려온 서구의 기준을 상대화시킨다.

이렇게 표현된 가족 또한 영원불변한 한 가지 패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가장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은 흔들리고 있다. 남성 화가로서, 그리는 이의 주체적 관점이 투사된 그것은 불행도 다행도 아닌, 변화해 가는 세태의 반영이다. 공적 영역과 분리된 사적영역으로서 배타적인 경계선을 가진 핵가족은 근대의 산물로, 결코 침해되지 않는 이상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가족은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그의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역사 또한 포함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가장 작게 표현되곤 한다. 그가 참조하는 고대 벽화에서 중요한 사람이 가장 크게 그려지므로, 남성의 축소임은 분명하다. 그의 그림에서 샐러리맨의 상징인 양복 입은 남자는 바닥에 깔려 있어 가장의 압박감이 느껴진다. 말을 탄 가족을 표현한 작품에서 아이들과 함께 말을 탄 여성은 크고, 말을 이끄는 이는 왜소한 남성이다. 단발머리 모녀가 큰 닭 위에 올라탄 작품은 그 아래 네발로 깔려있는 작은 가장의 모습이 측은하다.

그러나 아직도 엄존하면서 여성과 아이들 뿐 아니라, 남성 자신도 억압하는 가부장권에 대한 이러한 전도가 상실감만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남자 가장의 위치나 비중의 축소는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반증일 뿐, 결코 실추가 아니다. 가장 위에 올라탄, 강아지를 안은 여자를 그린 작품은 이러한 전도가 억압이기 보다는 유희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평화의 회복으로 다가온다. 근대 인류학은 경쟁과 전쟁이 만연한 부권 사회 이전의 평화로운 시대를 원시 모권사회에서 발견했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다수의 남성이 다수의 여성과 결혼하는 원시의 군혼에서 현대의 일부일처제적 단혼으로의 진화와 함께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권력 이양을 말한다. 이 유물론적 가설에 의하면, 물질과 육체, 자식들을 공유하는 고대의 여성지배(gynaecocracy)는 생산력의 발전과 그 생산물의 사적 소유 및 집중, 그리고 축적된 재산을 혈연관계가 확실한 자식에게 상속하기 위해 부계사회로 ‘진보’했다.

엥겔스에 의하면 단혼은 역사상 진보이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그것은--노예제 및 사유재산과 함께--현재까지도 그렇지만 온갖 진보가 상대적 퇴보이기도 하며, 한사람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사람의 고난과 억압을 대가로 하여 실현되는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개별 가족이란 문명기 초기에 계급으로 분열된 이래, 사회적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이 되었다. 예전부터의 전통적인 양성관계가 소박한 원시적 성격을 잃게 될수록, 그러한 양성관계는 여자에게 더욱 억압적이 되었다. 부가 증대함에 따라 그 부는,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가족 내에서 차지하게 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처럼 생산력만을 중시하는 사회는 이러한 모순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자전거나 동물 등에 올라 탄 피에로 같이 불안한 균형을 잡고 있는 임만혁의 작품 속 가족들은 가족의 진정한 의미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

경제적 보상이 불투명한 그림자 노동, 즉 작업에 몰두하는 삶 때문에 소유한 것도 많지 않고,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도 많지 않을 가장/작가에게 가정은 동병상련을 겪는 여성(아내나 어머니)에게 가난 때문에 오히려 평화로 왔던 그 시대의 권력과 위상을 다시 부여 하게끔 한다. 냉혹한 시장에 던져진 경쟁적 개인들에게 가정은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따스한 모성의 공간으로 간주되어왔지만, 남성/여성으로 대변되는 공적/사적 영역의 차이가 차별을 낳는 이분법이 지속되는 한, 모성의 공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임만혁의 가정 풍경에 내재한 따스함 이면에 깔린 멜랑콜리의 측면은 주목 할 만하다. 그것은 냉혹한 사회의 대안이 되어야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위기의 가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의 역사와 구조를 담은 가족이야기는 조형이 받쳐줌으로서, 단순한 현실 반영이나 서사를 넘어 미적 차원을 획득한다.

임만혁의 작품에 나타난 가족은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을 예시하는 가상(illusion)의 차원을 복구함으로서, 모성적 공간의 미학적 의미를 되살린다. 화사하고 따스한 색이 바닥까지 겹겹이 스며있는 화면은 현실과는 다른 가상적 차원을 강조한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지상의 질서는 지면이라는 것만을 나타내는 가느다란 선만으로 표시될 뿐이다. 방파제 같이 바깥에서 인간들이 모이는 인공적 구조물 역시 시늉으로만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예술에 있어 가상적 차원은 예술이 자율성을 쟁취함으로서 예술 또한 한정된 의미로나마 생산력--가령, 고가의 상품으로서의 질적 수준--을 갖추게 된 근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실로부터 분리된 언어는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유폐되기 시작했고, 추상화된 예술 작품은 그 논리적인 귀결인 ‘물질에의 충실성’을 향하면서 물화의 과정을 완성했다.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인간은 물론 예술 또한 빈약하게 했다는 점에서 소외의 과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만혁이 참조하는 원시, 또는 동양의 양식들은 근대를 통하여 사라진 가상의 영역을 다시 복귀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가상의 영역은 장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장식이란 벽화처럼 한 장소에 온전히 속해 있으면서 공동체와 상징을 공유하게 하는, 즉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총체적인 문화 환경과 더욱 가깝다.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그자체가 해방과 소외의 역사였던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잠재적 공간과 미적 차원의 복구를 주장한다. 그가 이를 위해 모성의 공간을 언급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예술 또한 인간의 진화에서 나타난 부산물이라고 믿는 피터 풀러는, 그러한 진화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들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모자(母子) 관계의 연장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다른 고동동물들의 새끼들은 생존을 위해 현실과 직접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나는 그 순간에 돼지 새끼들은 젖을 더 많이 빨기 위해 다른 새끼들과 젖 빠는 위치 문제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인간 아이의 경우 엄마가 젖가슴을 갖다 대어준다. 다시 말해서 아기에게 세상이 제시된다. 그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의 가설을 빌어, 인간의 이 같은 철저한 의존성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절대적인 독자성의 느낌, 신과 같은 전지전능의 느낌을 발생시켰는가 하는 점을 설명한다. 아기가 허기를 느낄 때에 젖가슴이 갖다 대어지는데, 그럴 경우 아기는 가상의 순간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젖가슴을 창조해낼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도움을 주는 하나의 외부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가상 말이다. 이렇게 해서 아기는 다른 짐승의 새끼들이 기능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상상력 풍부하게 창조해낸다. 냉혹한 현실원칙과 대면해야 하는 성인은 커서도 이러한 가상의 순간을 기억하며, 놀이로 재생한다. 예술 또한 이같이 냉정한 현실원칙을 극복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위니코트의 설명에 의하면 아이들은 객관적으로 지각되는 것에서 주관적인 것 사이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중간의 매개적인 경험영역, 아니면 내면적 현실과 외부의 삶이 모두 그에 이바지 하는 ‘잠재적인 공간’을 설정한다. 그리하여 아기는 상징들을 활용함으로서 잠재적인 공간을 꽉 채워서 격리상태를 모면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도전받지 않는 중간 영역이 인간에게는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원래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존재했던 이 잠재적인 공간은 아이와 가족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재생된다. 따라서 위니코트는 이 중간의 영역을 현실의 원칙이 가하는 쓰라림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는 문화적 체험의 장이라고 본다. 임만혁이 그리는 가족이 위치하는 곳 또한, 현실 원칙의 쓰라림을 완화하고 인간의 창조력이 풀어헤쳐지는 중간 영역이다. 작가는 렘브란트를 비롯한 미술사의 위대한 모자상의 전통들을 언급하면서, 자신 또한 그 계보를 한국적인 방식으로 잇고 싶다고 말한다.

이러한 중간영역은 예술이 하나의 제도로서 분리되지 않았던 모든 문화에서 보편적이었다. 피터 풀러는 원초적인 문화에서는 예술과 다른 형태의 노동 간에 뚜렷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술은 모두의 생산지향적인 삶의 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미적 차원’이나 성인들이 문화를 체험하는 ‘잠재적 공간’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잠재적 공간은 분업화를 통해 움츠러들기 시작했고, 현실원칙의 쓰라림은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임만혁의 가족풍경이 주는 따스함은, 단순히 가족상이라는 소재적 차원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통해 사라진 미적차원, 또는 잠재적 공간의 복귀에 있다. 그렇게 형성된 공간은 총체예술인 고딕이 그렇게 간주되었듯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갈망들을 위한 상징적인 성소’(러스킨)가 된다. 임만혁의 가족풍경은 창조적인 ‘가상의 순간’, 즉 ‘현존하는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마르쿠제)이 소멸된 버린 현대 예술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노력은 예술로 하여금 단지 예술이 아니라, 세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게 할 것이다.

출전; 아트포럼 뉴게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