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예절교본이란 것이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아마도 지금도 있을 것이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절하는 올바른 자세나 차를 따르는 정 자세를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교본으로 치자면 군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인데, 경례와 목례, 총검술과 군무와 같은 사례집들이 그렇다. 흥미롭고도 당연한 것은 이런 각종 교본이 제도적이고 관료적인 사회집단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학교와 기숙사, 군대와 감옥 같은. 미셀 푸코는 이 사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사회 혹은 부재하는 사회라고 불렀다.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이지만 정작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억압적인 사회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도는 개별주체에게 전체주의를 요구하고 개인은 일탈과 자율을 꿈꾸지만 정작 처벌이 두려워 이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에 내어준 자기와 일탈을 꿈꾸는 자기로 분리되고, 겉보기에 멀쩡한 자기와 억압을 내재화한 자기로 분열된다. 프로크루테스가 법이고 권력이라면 개인들은 저마다의 키를 그의 침대에 맞출 수밖에.




김남현의 작업은 바로 이런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현실을 다룬다. 여기에 경례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키스하는 자세와 세일즈맨의 자세(태도?)를 바로 잡아주는, 두 손을 번쩍 들거나 머리 뒤로 깍지 껴 완벽하고 안전하게 투항하는 자세를 교정하고 훈육하는 장비들이 있다. 말이 교정이고 훈육이지 그 장비들은 실제로는 무슨 억압의 도구들 같고 고문과 감금의 장비들 같다. 그 장비들은 풍자적인데 도구화된 이성을, 맹목적인 종교를, 효율의 극대화에 맞춰진 기계화된 사회를, 나아가 사사로운 욕망마저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회를 증언하는 메타포 같다.




그래서 개인들은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을 떠나 개인주의로 도피한다. 일인용 소변기와 좌변기, 일인용 욕조, 일인용 병상, 일인용 가옥과 막사, 일인용 놀이기구, 일인용 숲과 정원,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인용 강의실(이라기보다는 도구) 속으로 숨는다. 그 장비며 도구들이 폐쇄적인 현실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감옥에 가두는 일인용 감옥에서 극대화된다. 이 장비며 도구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돼 있지만 터무니없지는 않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을, 희극적인(아님 비극적인?) 현실을 침묵으로써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