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의 작가는 어마어마한 경력을 가졌다. 그 주인공인 한선정은 국내 외 유수의 미술 대학을 여러군데 다닌 엄청나게 긴 가방끈에다가, 다들 들어가고 싶어 하는 웬만한 레지던시는 다 거쳐 왔고, 주요 공모전 수상과 각급 문화재단에서의 기금 수혜, 주요 미술관 컬렉션까지, 작가 경력 란만 읽어 볼래도 스크롤의 압박이 느껴진다. 만약에 경력이 예술성을 보장한다면 한선정은 세계적으로도 유망한 한국 작가 1위에 꼽혔다는 백남준도 밀쳐낼 기세이다. 이번 전시 역시 무려 27회째 개인전으로, 주택가에 위치한 자그마한 공간 입구에는 미술계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들이 줄줄이 걸려있다. 그 비슷한 경력들을 수없이 봐왔기에, 친숙한 실존 인물 같은 한선정은 가공의 인물이다. 제 27회 한선정 개인전은 아르코미술관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젊은 작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풍자적 성격을 띤 그룹전으로, 언제부터인가 보편화되어, 많은 작가들을 한 줄로 세우는 잔인한 게임처럼 된 여러 지원체계의 선정기준을 문제 삼았다.

참여 작가들 또한 모종의 선정 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운영하는 유력한 대안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이라 할 때,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겨누어진다. 한선정이 가공의 인물이긴 하지만, 전시된 작품의 요소나 경력의 세부사항들은 가공의 것이 아니다. 이 전시의 작품은 참여 작가들의 개별 작품을 모두 짬뽕한 것이다. 주요 경력 또한 하나로 합쳤다. 항목 하나하나가 작가라면 부러워마지 않는 것들인데, 모두를 합치면 더 굉장한 것이 나올까? 시뮬레이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미인들을 놓고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모아놓는다고 더 만족스러운 미인상이 나오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따로 또 같이의 전략을 따르고 있다. 하나하나 흥미로운 개별 작품이지만, 왜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시의 전체적 형식은 현행 미술제도의 문제점을 작가적 차원에서 비평해 보겠다는 강력한 응집력이 있다.






1층에는 참여 작가 작품들을 하나로 꼴라주 해놓은 거대한 설치물이 놓여있다. 그 옆의 영상에는 훌륭한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들의 소견이 인터뷰처럼 담겨 있는데, 대상이 되는 작품, 즉 주어가 빠져 있음으로 해서 마치 한선정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처럼 들린다. 아무리 좋은 말도 서로 논리적인 연관성이 없거나 단순한 찬사 일변도의 말들은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것은 이 전시의 서문처럼 내적 연관성이 없이 이 작가의 자료와 저 작가의 자료가 적절하게 뒤섞인, 평문처럼 제시된 글처럼 핵심이 없다. 그럴듯한 말 또는 글의 단순 나열은 특별한 이유 없음, 근거 없음에 대한 장황한 알리바이이다. 지하에는 저 높이 설정된 하나의 기준선을 중심으로 애써 키를 똑같이 맞춘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2층에는 가공의 전시 주인공에 대한 기록과 전시가 성립되기 위해 준비 과정들이 보여 진다. 한 때 유명작가였다는 신원미상의 늙은 화가의 인터뷰나 한 여성 작가가가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영상에서는, 무관심과 고독 속에서 작가라는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자괴감도 느껴진다.

현대사회에서 한 작가가 성공하는 것에는 물신적 체계가 필수적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물신주의의 목록에는 예술작품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작가들은 미우나 고우나 미술계의 제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전시의 부대행사로 ‘현재 미술계에서 공모의 역할과 작가의 관계’를 논해야 하는 패널의 한명으로 초대된 필자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로부터 ‘선정’ 되었다는 영광과 더불어, 이러저러한 선정에 간간이 참여하게 되는 평론가로서 당신의 선정기준이 뭐냐 라는 공격적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할 자괴감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의 비평적 관점을 요약 내지 반복하라는 것인가? 피차 선정하고 선정되는 관계 속에 얽힌 만큼 나 역시 그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함을 고백한다. 어차피 많은 지원자에 비해 소수가 뽑힐 수밖에 없고, 뽑히는 사람만 계속 뽑히는 것 같은 무시하지 못할 현상, 뽑힌 이들의 경쟁력을 전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애매함 등이 다수의 탈락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잘되는 사람은 같은 방향의 바람을 타고 순풍에 돛단 듯이 나아가고, 안 되는 사람은 같은 돌부리에 계속 넘어지는 듯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만을 따돌리는 어떤 강력한 중심 세력은 없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고립된 활동을 하게 마련인 작가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그들’이라는 가공의 적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부정을 통해서는 피해 의식과 냉소 외에 아무 것도 낳는 것이 없다. 심의하는 사람들은 각자 조금씩의 의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그것의 역학관계 속에서 약간의 우연적 요소(운)가 병행하면서 결과가 도출된다. 미술계 역시 현실처럼 유력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누구도 어떤 사안에 대해 전권을 휘두를 수는 없다. 이전시대에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마피아 집단처럼 주먹구구구식의, 모종의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결과야 어찌됐든 대체로 민주적인 선정 절차를 따른다. 수술은 성공적인데 환자는 죽은 경우처럼, 절차는 나무랄 데 없는데 결과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심의과정도 엄청난 인적, 물적 에너지가 투자되는 노동인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 전시를 보면서 하나만큼은 공감이 가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이 전시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평균이라는 개념이다. 이 전시에는 많은 평균이 등장한다. 작가 프로필, 설치된 작품, 인터뷰, 텍스트 등등이 모두 그럴듯한 항목들이 조합된 것들이다. 평균적인 것, 즉 이것저것 무난하게 다 잘하는 팔방미인, 뭔가 ‘토탈’을 지향하는 미술계의 분위기는 현대의 분업 체계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를 비롯해서 미술 관련 수많은 직업들이 있지만, 각자 이것저것 다하느라고 모두 힘들어 한다. 차이가 없기에 진정한 협업이나 상호보완이 아니라, 잠재적인 경쟁자들의 비능률적인 동어반복이 전문성과 생산성을 대신한다. 선정과정에서 평균은 점수제를 통해 작동된다. 대개 선정은 ‘공정성을 위해’ 최고점과 최저점을 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지한 토론을 거치지 않고 평균점수를 내는 점수제로만 하면 사각지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현대미술일수록 호오(好惡)가 명확하게 갈려지기 때문에, 그 진가를 한정된 자료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들고 보편적인 취향과 부합되기 힘든 아주 특이한 작품보다는,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무난히 세련된 작품(또는 작가)들이 많은 평균값을 확보함으로서 보다 유리해지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없어서건 의지가 없어서건 토론의 부족은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이란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짧은 시간에 많은 자료를 검토해야 하는 심의자리가 막연하게 위원들의 세계관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장은 아니지 않는가? 결국 작가가 자신을 특화시키는 것만큼이나 각급 지원제도 또한 특화되어야 모순이 완화된다. 지원제도가 특화되면 기준이 명확해지기에 그 지원제도가 요구하는 대상을 선정하기도 더 쉬워진다. 공모에 특징이 분명하다면, 어떤 공모에 불리한 것도 다른 공모에서 유리할 수 있는 지점이 있으므로, 미술계의 종 다양성 확보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각 공모들이 평균적으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서 모순이 반복된다.

마치 전 국민을 한번쯤은 줄을 세우는 대학 입시 같은 형식으로, 많은 공모제도가 하나같이 ‘경쟁력 있는’ 작가를 뽑는 것이다. 결국 그 기준에 대한 불만은 미술계를 지배하는 어떤 가치에 대한 불만일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인 동질성과 길항작용을 하는 이질성이 배양되는 장이라면, 석고 데셍이나 학력고사 점수 같은 것이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현대미술 작품은 압축파일 같은 것이어서 한눈에 그 독특함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아무리 자료가 그럴듯해도 한번쯤은 실제로 본 작품이 유리하다. 아카데미 보다는 미술계 현장에 대한 감각을 가진 이가 관료주의가 요구하는 그럴듯한 자료더미라는 시뮬라크르에서 실재의 진면목을 가려낼 확률이 높다. 전에는 작가가 심의 위원에 참여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럴듯한 자격만 갖춘 아카데미의 학자보다는 낫다고 본다. 심의위원이 현장 감각이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개인적 인연을 맺은 작가나 자기 학생에게 부채의식이 없는 냉정한 사람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전체 계에 부담을 줄 수 도 있는 독특함이나 이질성 보다는 평균 개념이 득세하게 된 것은 점차 공고화되는 관료제도 때문이다. 관료제도는 예외적인 문제발생을 가장 두려워한다. 예정된 계획대로 지배 질서를 재현하는 원리가 순서대로 작동되어야 한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차떼고 포떼고 나면 예술에는 별로 소용도 없는 두리뭉실만 남는다. 인정이 인정을 낳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생긴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면 기존 혜택의 결과물이 가중치처럼 작동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동 추진 장치 덕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허락된 여유 있는 작가는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경력관리에만 힘써도 자리 잡는 데 어려움이 없다. 관료제도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중재하는 중성적인 기구로 작동해야 하지만, 어느덧 목적은 사라지고 수단을 위한 수단만이 남게 되었다.

이 견고한 관료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공정한데 내용적으로는 공정치 못한, 그래서 승복하기 힘든 게임을 스스로 종결시키기는 힘들어 보인다. 옛 선인의 말대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할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생산을 위한 생산, 제도를 위한 제도 등등은 모두 비슷한 계열이다. 자기 참조적이고 자기 유지적이다. 동질성의 실제 몸통은 이질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질성은 그 스스로 서있는 듯 자처한다. 이질성의 도전 없이는 동질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동질성은 그 자체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항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장의 작가들을 만나보면 적지 않는 수혜를 받은 이들 또한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그리고 그 뒤로도 그들이 취득해야만 하는 무한대로 늘어선 자격 요건까지, 개인이 모든 것을 사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교육시장의 지배가 모종의 보상을 요구하는 심리에 있는 듯하다.

젊은 작가들은 이전보다 많은 개인적 투자, 요즘 말로는 ‘스펙’을 갖추고서도 끝없이 늘어선 여러 관문의 문턱을 넘기 힘들어한다. 나날이 촘촘해지는 관료제도는 자신이 원래 하고 싶어 했던 본질 앞에 점점 더 많은 방해물을 쌓아 놓는다. 이 층층의 구조물은 원래 훌륭한 작품 또는 작가와 만나는 효과적인 통로로 기획된 것들인데, 어느 순간 그 반대로 변질되고 만다. ‘책상 위의 한 선정은, 결국’이라는 전시부제는 작품 또는 작가의 현실과 직접 만나는 대신에, 그 사이에 드리워진 층층의 구조들 속에서 행해질 탁상공론의 폐해를 질타한다.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재가 처한 난점을 생산자들은 고스란히 떠안는다. 개인들을 스스로 검열하는 기제로도 작용하는 번잡스러운 형식적 장치들을 걷어내고, 실재와 더 효과적으로 만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이 전시와 부대행사 또한 그러한 의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출전; 인사미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