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립 전 (2.9--2.29, UNC 갤러리)
이진한 전 (2.9--3.17, 대안공간 루프)


같은 날 홍대 앞과 강남에서 오픈한 이진한과 이이립의 전시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면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하나는 미래주의적이고 다른 하나는 고풍스러운데, 둘 다 지금여기와는 거리를 둔다. 시멘트벽이나 수채 구멍 같은 밀폐된 곳에서 튀어 나온 기억의 파편들이 ‘공진’(전시부제) 현상을 일으키는 이이립의 그림들은 무너져 내리는 폐허 속에 알레고리가 잠재해 있다.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알레고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복귀’(크레이그 오웬스)되었다고 말해진다. 지시대상이나 기호로부터 해방된 기표들이 탁 트인 공간 속에서 풍경화 되는 이진한의 그림들 역시 ‘관찰자의 포스트모더니즘-개념의 풍경화’라는 전시부제를 통해 모더니즘과의 역학관계에 있는 또 다른 감수성을 펼치는데, 특히 그것은 ‘영원한 발생기 상태’(료타르)를 내포함으로서 포스트 모던한 징후를 보인다.

은폐된 채 꽉 묶여 있던 사물화 된 기호들이 스르르 몸을 풀기 시작하는 이이립의 그림에서 미세하지만 큰 울림을 낳는 진동이 느껴진다면, 안보다는 바깥이 연상되는 이진한의 풍경들은 지상에 어떤 뿌리도 내릴 틈 없이 공중으로 튕겨 오르며 확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하나가 울증에 가깝다면 다른 하나는 조증에 가까운 정서가 깔려 있는데, 양자는 심리적 사건 속에서 종종 한 현상의 양면으로 간주된다. 물리적으로는, 둘 다 견고한 것이 무너져 내린 것들에서 구축(또는 해체)된 결과물(또는 흔적들)이다. 이들 작품에 고여 있는 또는 발산되는 에너지는 동일성에 내재된 순도 대신에, 이질적인 것의 부딪힘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존재에게 깊은 상처나 공중분해를 야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건들이다. 이이립의 경우 닫혀 있던 공간의 돌연한 열개(裂開)를 통해, 이진한의 경우 육중한 바로크적 휘장이 젖혀짐으로서 관객은 사건에 동참한다. 사건은 예측 불가능하게 접혀진 시공간의 주름에 새겨진다.





이이립의 작품에서 절단면을 드러내는 벽은 몸을 갈라낸 것 같다. 그 안에는 무엇에 쓰였는지 모를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여 있다가, 갑자기 바깥에 노출되자 서로 떨어져 있던 시공간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공진(resonance)하기 시작한다. 절단된, 또는 갈려나간 시멘트 벽 안에 매몰되어 있는 토르소와 그 아래에 바나나와 철근 등이 박혀 있는 작품 [the fragments-the uncertainty of the poet](2012)는 돌출물이 다시 몸을 쑤셔올 것 같은 트라우마의 흔적이 있다. 작품 [the fragments-파편의 조각들](2011)에서는 터져나간 흉상 속에 피 같은 붉은 물감 범벅의 사물들이 웅크리고 있다. 붉은 물감, 또는 피가 묻은 날이 선 사물들이 마주한 빈 의자로 쇄도하는 작품 [the fragments-evening call](2011)에서 현전하는 것은 부재자의 치명상이다. 작품 [the fragments-대화](2011)에서 갈려진 벽 사이에서 튀어 나오는 사물들은 그 밀려나오는 힘에 의해 맞은 편 의자를 부수고 만다.

폐기물이 빠져나가야할 구멍에서는 역류현상이 일어난다. 작품 [the fragments-어느 날](2011)에서 세면기 속에서 분출되는, 형태와 기능을 알 수 없는 낡은 폐기물들은 중력에 반(反)한다. 정체모를 폐기물들은 고풍스러운 장롱에도 가득 쌓여 있어 열면 우르르 쏟아질 듯하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 다시 나타날 때, 몸 밖으로 배설되었던 것이 다시 휘말려 들어올 때 인간은 공포와 역겨움을 느낀다. 공포와 역겨움(abjection)의 대상은 벽, 장롱, 세면기 같은 일상의 공간 속에 편재해 있다. 이이립의 작품은 기괴함(unheimlich)이 친숙함 속에서 극대화됨을 알려준다. 이 쓸모없이 굳어져 버린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은 때로 잘 차려진 식탁에 놓여 만찬이 되고, 진귀한 수집품처럼 유리병 안에 안치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물감이 강해 먹기도 관조하기도 힘들다. 익숙한 맥락에서 탈각된 단편들은 강한 물신성을 발산한다. 그것은 매혹과 불안의 양가감정을 건드린다. 잘려진 단면이 만들어내는 주름과 그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인 것들은 화석이나 골동품같이 죽은 지 오래된 것들이 가지는 고색창연한 안정감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활성화되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살아있는 단편들로, 어떤 충격에 의해 노출되자마자 밀려나오고 쇄도하며 주체를 압박한다. 이 무대에서 시간이 많이 경과한 흔적들은 설득력 있는 장치이다. 유화로 정교하게 그려진 정물에는 시간의 퇴적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공진은 멀리 떨어진 공간 뿐 아니라, 시간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잊혀지고 단절되었던 것이 다시 지속되고 연결되어, 아득한 때와 장소에서 벌어졌던 원초적 사건은 반복된다. 자신의 것이었지만 망각되어 있던 무의식의 단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층에서 표층으로 올라온다.

이 부유물, 또는 잔해들은 백일몽 또는 악몽처럼 주체를 각성시킨다. 그러나 단편들은 완벽히 재조립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전히 침묵한다. 공진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접합될 뿐이다. 이 접합은 견고하지 않고, 곧 이어질 다음 진동에 의해 재배열될 것이다. 잘 다듬어진 형식에 의해 시간(또는 역사)의 악몽을 극복하고, 질서 있게 안착되어진 모더니즘의 공간적 미학은 부질없는 시간성에 의해 도전받는다. 어디에서 떨어져 나온 지 모를, 무엇으로 합체될지 모를 파편들은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에 전형적이었던 실험의 재료가 아니라, 고고학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퇴행에 머물지 않는다. 완전한 전체나 유기적 총체성에 대한 상이 무너져 버린 시대에, 불쑥 불거져 나온 단편들은 폐허의 흔적 속에서 차이와 타자성을 구축한다.






이이립의 작품이 지나간 시공간까지 포함하는 묵직한 유적지의 양상을 띄면서 알레고리 가득한 정물화라면, 이진한의 작품은 어딘가에 얽매임 없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경쾌한 풍경화이다. 형태와 색채는 지시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밀한 안쪽이 아니라 바깥의 풍경을 암시한다. 바깥에서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호환성은 더욱 높아진다. 작품 [수퍼마리오가 없는 풍경](2011)이나 [pineapple](2011)에서, 화면 오른쪽에 젖혀진 검은 커튼이 달려 있는 듯한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보인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며, 전체가 붕 떠 있는 가운데 균형을 잡아준다. 그것은 중심 없는 흐름 속에 전체가 유동하는 바로크적 비전에 어울리는 무대장치이다. 뜬금없이 나타나 공중으로 휘휘 꼬여 올라가는 굴곡선들은 화면에 활기를 부여하는 요소로, 주름 속에 내장된 에너지를 공간에 방사한다.

지그재그로 꼬인 선들은 음식물로 충전된 창자의 포만감처럼, 종횡무진 하는 활동 에너지가 될 것이다. 혼돈스러운 기표들이 자유롭게 떠도는 이진한의 풍경에서, 붕 떠 있음은 지상에 자리 잡지 못한 박탈감이 아니라 신생의 희열로 가득하다.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의 선들은 멜랑콜리나 중력에의 순응보다는 바닥없는 풍경의 징후에 더 가깝다. 그것은 물질과 에너지의 잉여 물처럼 흘러넘친다. 기저 면으로 추정되는 부근의 오밀조밀 밀도 있는 색 얼룩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광대한 시공간을 암시하는 풍경적 요소이다. 마스킹 테이프로 처리된 완벽한 원, 삼각형, 그리고 바둑판 무늬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미래주의 풍의 인공물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요소이다.

작품 [night light](2010)와 [west sea aquarium](2010)에서 밝은 색을 배경으로 속도감 있게 뻗어나간 타원이나 사선들을 비롯한 기하학적 요소는 공간에 고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정보다는 이동에, 질서보다는 카오스모스에 더 가깝다. 원근법적 선, 어디선가 뻗어 나온 광선 같은 사선들은 자유롭게 배치되고, 그리드 무늬의 구형들, 미러볼 같은 형태 등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들의 속도감에 빙글거리는 유희적 요소를 부가한다. 이진한의 풍경 역시 이이립처럼 단편들로 되어 있지만, 그 불연속적인 간극에는 묵직한 침묵보다는 열띤 흥분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정체감을 통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유동성이 야기하는 활기이다. 이진한은 물감 외에 마스킹 테이프와 반짝이, 스티커 등을 더불어 사용함으로서 화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불연속성은 모호함을 야기하지만, 동시에 도약을 가능케 한다. 이 풍경은 모든 존재들이 질서 있게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징적 우주와 거리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신학에 근거를 두는 고정된 상징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를 무한정 벌려 나가는 알레고리로 변모한다. 알레고리화는 시간적 요소로 인해 가속화된다. A.A 멘딜로우는 예술작품의 시간적 요소를 추적한 [소설과 시간]에서 실재에서 힘으로의 변천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안정된 우주를, 규칙적인 관계의 체계 속에 유지하는 균형 있는 구성의 존재를 믿었다. 신에 의해 주어진 원리에 입각한 이 조화된 통일성은 우주라는 폐쇄 원을 가득 채웠지만, 이제는 전체적인 우주(universe) 자체가 분산우주(multiverse)가 되었다. 모든 단단한 것들은 녹아내려 생성된 개방된 형태(gestalt)는 시간체험이라는 기이한 무늬가 된다. 고정된 형태와 색채, 그리고 의미는 유동적 과정으로 와해되면서 불완전한 단편은 즉각적인 전체로 고양되고, 그렇게 작가는 새로운 실재의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출전; 아트 인 컬처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