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말한다면? 그리고 짧은 설명을 부탁드린다.
(질문; 월간미술 황석권 기자)
; 나의 글쓰기는 ‘합(合)’이다. 비평은 그것이 없었다면 산산이 흩어질 수도 있는 것들을 종합하는 장이다. 그것은 한 가지 길만 걷지 못했던 내 삶이 낭비와 방황만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준다.
2. 비평가로서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나만의 아이템은?
; 20대부터 록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그것은 나에게 미술보다 먼저 예술에 대한 상이라 할 만한 것을 형성시켜준 모태 예술이며, 지금은 젊은 시절만큼 많이 듣지는 않지만, 세파에 찌들어 내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음악을 듣는 일이다.
또 하나는 고양이들이다. 아무리 순한 고양이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을 가지고 있으며, 혼자 시간을 잘 보낸다는 점이 맘에 든다. 1996년 신촌의 한 락카페에서 데려 온 또자(현재 17세)는 더 잘 보살펴서 최장수 기록에 도전하려 한다. 모든 애묘인들이 그렇듯이, 고양이가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양이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

3. 취재 기자와 만나 사진을 찍은 장소를 선택한 이유와 그렇게 사진을 찍었던 이유는?
; ‘1시 방향의 저글링떼’ 전이 열린 인사미술공간은 작년에 아르코 미술관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전시로 열매를 맺은 장소이다. 작품이 팔리면 불우이웃에 기부하고 마지막 날까지 안 팔리면 파기해 버리겠다는 기획 의도는, 남김없이 소통(또는 유통)하고 사라지겠다는 상징교환의 원리를 대변한다. 막장 같은 태도일수도 있지만, 나의 비평 또한 이렇게 배수의 진을 치지 않고 과감하게 실행하고픈 욕망이 있다. 내가 그 앞에 선 이보라의 작품은, 작가는 작품을 짜고 평론가는 푸는 존재임을 은유하는 듯하다.
4. 나만의 글쓰기 방식을 설명한다면?
; 나의 글쓰기는 읽기의 결과였다. 지금은 읽기보다는 적용(응용)에 더욱 신경 쓴다.
5. 비평가로서 좌절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 마음대로 분류하고 판단할 때.
6. 작가와 비평가. 이 둘은 어떤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 한석봉과 어머니의 관계? 불을 끄고 한쪽은 붓을 놀리고 다른 한쪽은 떡을 써는 것.
7. 현재 한국 미술비평에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나 액션이 있다면?
; 비평에 올 인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 큐레이터, 기자, 기획자, 교수, 학자 등이 모두 섞여서 광범위한 의미의 미술담론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다. 다재다능하지 못한 나는 별로 도전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20-30대에는 맹목적으로 나 좋은 방식대로만 해왔고,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은 그것밖에 대안이 없어서 하던 대로 하고 산다.
8. 비평가를 감동시키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그 앞에 선 비평가로서 선생님의 심정은?
; 작가가 그 안에 모든 것을 쏟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 앞에서, 나또한 그 작품에 헌신하고 싶은 열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 작품은 열심히 털면 뭐라도 나온다.
9. 글을 쓰기 위해서만 아니라, 작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을 것이다. 어떤 경우 작가에게 거리감을 갖게 되는지?
; 지배적 시스템에 너무 충실한 작가. 그런류의 작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이 미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부조리해 보일 뿐이다. 그 다음으로는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쩔어 있는 작가. 나또한 상대에게 그렇게 보일까 겁난다.
10. 어떤 작가든 전시든 비평을 쓰고 나서 자신의 관점이 잘못됐다거나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 비평가는 작가가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는 점쟁이가 아니다. 비평은 작품에 잠재되어 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에 분명한 어법을 부여하려 노력 한다. 나는 평문의 서두를 구체적인 작품묘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초점이 빗나갈 위험이 적다. 작품에 대한 묘사는 적절한 설명을 위한 기본 작업이다. 묘사와 설명이 부실한 관념적인 글을 싫어한다.
11. 비평가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선택한 이유나 계기가 있다면?
;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내 생각에 과학이라는 분야는 집단주의적이다. 그것이 생산성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성향은 개인주의적이어서, 과학의 극점에 예술이 있다는 로망을 품었지만, 이곳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12. 비평이 안정적이라는 평가와 무난하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인용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또한 글쓰기의 양에 비해 저작물은 적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 正反合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이 反이다. 가장 손쉬운 게임인 反을 제외한다면, 나의 경우 合보다는 正이 더 어렵다. 무엇에 반대하거나 무엇을 종합하기에 앞서, 작품이라는 불확실한 대상, 또는 현상, 또는 사건을 알아볼 수 있게 제대로 된 맥락에 세우는 일에 집중한다. 그것은 인기 없는 전략이다.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난 구성한다. 그 구성작업에 인용이 있지만, 인용 자체는 이미 필자의 머릿속에 어떻게 써야겠다는 구도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비평은 평론가의 취향이 이렇다 저렇다는 것을 권위적으로 내세우는 장이 아니다. 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평론가는 자신의 주장에 객관적 근거를 댐으로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용의 오용과 남용은 경계해야겠지만.
내가 경험한 출판계는 필자에게 모든 희생을 요구하는 일방적 구조였다. 편집자와의 우호적인 파트너쉽 없이, 지금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옛날 자료를 다시 정리 정돈해야한다는 일은 끔찍하다. 머리 복잡한 텍스트를 상큼 발랄한 버전으로 각색해 달라는 요구도 종종 받았는데, 그런 필자는 나 말고도 많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지금은 인터넷 시대. 내가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글은 미술포탈 싸이트에 거의 업데이트 해놓았다. 나는 카피라이트보다는 카피레프트를 지향한다. 내 텍스트들이 두터운 양장본으로 포장되어 영원히 길이길이 보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 한번이라도 확실하게 사용될 수 있다면, 그다음에는 쓰레기통에 들어가도 상관없다. 나 또한 내가 인용한 텍스트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 말대로, 들고 다니며 ‘연장통처럼’ 사용한다.
13. “비평은 비평받지 않는다”는 곧 비평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수용과 반박, 설명 등이 부재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비평에 대한 비판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 비평 또한 작품이다. 비평이 비평받지 못하는 이유는 작품이 제대로 비평받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아전인수격의, 소소한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널찍한 공론의 장이 있다면 비평이든 작품이든 풍부한 담론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4. 쓰고 싶은 작가나 전시에 대한 리뷰, 비평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경우란?
; 미술 저널을 보면, 리뷰든 작가론이든 시론이든 비평가에게 선택권이 많지 않다. 이미 정해져 있고 선택하는(당하는) 구조인데, 나도 현장에서 20년 넘게 글을 써와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은 써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냉소적이고, 그래서 현상유지에 불과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소재이든 주제이든 자기 스타일대로 소화하면 된다.
15. 《미술과 담론》에서의 오랜 활동이 지금 자신의 비평가로서의 삶에 미친 영향은?
; ‘전시읽기’ 란을 통해서 매주 전시 리뷰들을 꼬박꼬박 업데이트 하던 습관이 붙어서, 필자로서의 순발력에 도움을 받았다.
16. 리뷰 담당기자로서 묻겠다. 기본적으로 리뷰는 전시를 자신의 욕구를 가지고 본 비평가에게 청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최근 선생님의 행보는 젊은 작가로 향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젊은 작가에게 시선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젊은 작가들은 비록 겉포장에 능숙하지는 않아도,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너지, 특히 잠재 에너지의 보고이다. 또한 그들은 정신적으로도 유연해서 성질 급한 나에게 빠른 피드백을 준다. 나 또한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내 또래나 그 이상의 세대에서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이 갈수록 많아지기 때문이다.
17. 비평에 대해 관심이 많은 후배들을 위해 묻는다. 비평은 학습되어지는 것인가? ‘자신의 시선을 갖는 것’이라는 막연한 말보다 구체적인 비평적 시선 수립의 방법을 알려 달라.
; 공부는 많이 해야 한다. 공부는 대체로 논문, 번역, 강의 등으로 실행된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주된 실행들이 너무 재현주의적, 즉 노동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이론 뿐 아니라 실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더욱 촘촘해진 시스템화를 언제까지 따라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축구 경기를 볼 때, 나는 골 잘 넣는 선수를 원하지 축구학 박사, 축구과 교수, 축구 관계자 등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을 하고자 했으면 글쓰기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부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비평은 본격적인 학문 활동과 창작의 중간에 있다.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논증해야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작품 앞에서 객관적인 논증이란 반쪽의 도구에 불과하다. 작가, 또는 작품과의 대화적인 상상력에 의존하면서 직관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출전; 월간미술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