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소년 같이 밝고 반듯한 분위기가 있는 조각가 철수(본명;김승연)의 작품은 구상적 형태와 상황 연출로 모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조각의 전통적인 모델링에 충실하지 않다. 작품은 만화가 공간으로 튀어나온 듯 단순한 형태와 산뜻한 색채,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특징이다.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알려주는 주인공은 오리이다. 오리는 닭만큼이나 인간에게 가까운 가축이며, 도널드 덕이라는 디즈니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친숙하다. 만화 같은 오리는 일반 명사화된 ‘철수’와 잘 어울리며, 그는 오리에게서 자신 및 현대인간에 대한 상징을 발견한다. 오리가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군대시절에 오리가 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 때문이었다. 작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리는 170종이 넘고, 그중 가축화된 몇몇 종만 날지 못하는데, 인간은 자기가 식민화시킨 오리를 중심으로 오리를 인지하기에, 그것들이 원래 날 수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말이다. 전시부제인 ‘Ducks can fly, you know?’는 인간에게 깃털과 고기를 대량 공급하기 위해 뒤뚱거리는 새가 되어버린 오리의 잊혀 진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는 ‘잘났다고 꽥꽥 거리는 우리 가짜오리들을 어딘가의 창공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진짜오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간직한다. 전시는 만화처럼 읽기 쉽게 배치되어 있다. 바닥에 놓인 것은 관객과 눈높이를 맞추며 교감하고, 벽에 설치한 것은 그림이나 부조라기보다는 한 칸 만화처럼 보여 진다. 철수의 작품은 친숙함의 코드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개체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결말조차 어둡고 침침한 구석은 없다. 만화의 깔끔한 선처럼 딱 떨어진다. 철수는 여기에서 긴 우회 끝에 재발견한 자신의 성향을 본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Ducks can fly, you know]는 전시 주제를 만화로 압축한다. 죽은 듯 엎어져 있는 오리 등위에 만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날 수 있는 줄 알고 절벽에서 아래로 날았다가 떨어지는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는 말도 있듯이, 비상을 향한 꿈과 좌절은 성장기 특유의 감수성이다. 바닥에 놓여 져 관객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큰 작품 [stranger] 역시 하얀 오리의 형태를 입체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오리가 둘러쓴 망토에 용 문신을 새긴 녀석이 조폭 두목 같이 으스대는 분위기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다소간 피해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다른 오리들과 달리, 크기나 위치, 표정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 동물에 대한 주된 가해자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비슷한 닮음 꼴이다. 그것은 오리를 날지 못하게 길들인 인간 역시 오리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도구화나 길들임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다. 여러 개로 이루어진 작품 [그건 너의 탓이 아니야]는 [stranger]와 짝을 이룬다. 파스텔 톤의 여러 크기의 사각형에 머리와 발, 날개 일부만 내놓은 노란색 오리들은 갇혀있는지 보호되고 있는지 잘 포장되어 있는지 불분명하지만, 두목 급의 강력한 형태의 지배하게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곤룡포를 두르고 있는 두목의 카리스마는 지배의 맹목성을 암시한다. 동글동글 귀여운 형태와 부드러운 색상을 갖추고 있지만, 어떤 크기의 틀에도 잘 끼워 맞춰진 아기 오리의 형태에서 교육을 빙자한 고문의 이미지를 감출 수 없다. 철수의 작품은 만화처럼 밝고 산뜻하기에, 비극적인 메시지가 더욱 강조 된다는 역설이 있다. 대부분 눈이 생략된 캐릭터들의 무표정 함 속에는 말 못할 고통과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





작품 [감언이설]에서는 아기 오리들이 벽에 손잡이처럼 매달려 대화를 나눈다. 파스텔 톤의 예쁜 색과 귀여운 형태는 여전하지만, 박제된 상태라는 설정이 오싹하다. 그것들은 전시장 벽 밖으로 머리만 내밀고 있는 듯하다. 오리의 부분과 연결된 벽 또는 단색으로 칠해진 사각형은 오리가 산채로 갇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노란색 정방형 바탕 위에 검은색 오리가 몸을 띄우고 있는 작품 [voyage]는 제목과 달리, 생사가 구별되지 않는 둔탁한 움직임을 보인다. 마치 환경재앙이 일어난 바다에서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듯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검은색과 함께, 광택이 나는 표면 처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검정과 노랑의 조합은 가시성을 극대화하면서, 자연이 부여해준 보호색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생명이 처해진 위험의 강도를 경고한다. 작품 [로드 킬]은 노란 거품을 내고 쓰러진 검은 오리의 모습이다. 하얀 발자국이 배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고, 오리의 입에서 나온 유언 같은 말풍선은 지글거린다. 작품 [심장이 쫄깃]은 교미 중인 숫컷 오리가 뭔가에 흠칫 놀란 눈초리이다. 철수의 작품 속 오리들은 대부분 블랙 코미디 같은 설정 속에서, 이런 저런 수난에 처해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은 생태계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이지만, 인간은 이성과 도구를 통해서 자연이 허락한 것 이상을 취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산력과 진보라를 이름으로 불리워졌지만, 자연이 조직적으로 수탈되고 그것이 자연의 도구화를 추동한 인간에게 다시 피드백 되어 고통과 죽음이 순환되는 구조가 되풀이 된다. 가축화는 동물 농장을 넘어 공장 시스템에 의해 가속도가 붙고, 이용될 수 없는 동물들은 소멸의 길을 밟는다. 동물을 도구화하는 것 즉 가축화는 종 다양성의 파괴를 야기했지만, 동물은 문명사 초기부터 인간과 함께해왔다. 난 멜링거는 [고기]에서 ‘경제’를 의미하는 독일어 형용사 ‘페쿠니에르(금전상의)’는 라틴어 ‘페커스(가축)’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본을 뜻하는 ‘캐피탈’은 대부분의 유럽 어에서 가축을 나타내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로마 시대에 권력은 근본적으로 탈취의 기구와 방어수단으로서 부를 사유화할 권리였다. 그리고 동물에게는 생산물과 토지, 고용, 노동과 피를 강제로 탈취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난 멜링거는 인간의 육식 선호가 생물학적인 진보과정의 결과이며, 육류 음식은 호모 사피엔스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본다. 어떤 한 종의 지배적인 위치는 타자들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현대의 다국적 육류산업에서 보이듯이, 고기는 20세기 중반부터 대량생산, 즉 모든 다른 소비재처럼 고기도 가능한 한 저 생산 비용의 시장 법칙에 따른 생산품이 되었다. 고기 식사는 바로 거의 쉼 없는 가동, 즉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없는 희생적인 기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또한 난 멜링거는 자동차 산업에서 도입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용되었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가축을 고기로 분해하기 쉽게 하려고 만들었던 조립 라인에서 왔으며, 1910년에야 자동차 생산업체인 포드사의 대량 생산 설비에 적용 되었다고 말한다. 대량 소비재로서의 고기시대는 분해된 고깃덩어리 앞에서 노동하는 또 다른 부품들을 낳았다. 자신이 잡아먹을 만큼만 키우며 인간과 공존하던 가축들은 박스 안에 포장된 철수의 작품 속 오리처럼, 공장생산물이 되어 유통된다.

그런데 인간과 격리되고 도구화된 동물이 돌아왔다. 잊혀질만 하면 창궐하는 대규모 환경재앙으로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가 자연에 유해한 치명적인 병원균이다. 전 장기를 다 갈아 끼 울 수 있는 첨단 의학의 희망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동물은 다시금 근접해진다. 인간중심의 목적론이 동물을 도구화했지만, 인간 역시 도구화된다. 맹목적인 힘에 휘둘리는 대중과 우왕좌왕하는 오리 떼들의 중첩이라는 상상력에 과도한 도약은 없다. 철수의 작품에서 날지 못하는 오리는 시스템 속에 갇혀서 자신의 잠재력을 잃고 시스템의 판박이가 된다. 철수의 작품에서 인간이라는 유일한 기준이 낳은 동질성은 부정적이다. 민주주의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많은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자못 풍요로운 시대에 폭력은 어디에 잠복해 있는가. 폭력은 구조 자체에 있다. 그것은 직접 피 흘리는 폭력을 야기하지는 않지만, 체계의 구성인자들을 서서히 무력화시킨다. 나사못이 헐거워지면 체계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한 쌍을 이루는 [democracy]는 이 전시에서 가장 추상적인 작품으로, 정치적인 은유가 있다. 작품 [democracy 1]은 부리색은 모두 다르고 짙은 색의 몸통이 삼위일체처럼 뭉쳐진 형태이며, 작품 [democracy 2]는 하늘색 정방형 패널 위에 바깥을 향한 3개의 주둥이만 배치되어 있다. 동물은 더 이상 자율적인 개체로 구별될 수 없으며, 분해된 단편으로 흩어진다. 거기에는 현대의 대량생산과 소비의 주기의 희생물이 된 타자가 있다. 차이의 소멸이 낳은 균질화 및 사물화 된 형태는 폭력과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단적으로, 모든 것이 같아지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역사상 민주주의는 다수의 피지배계급인 민중의 피를 통해 쟁취된 것이지만, 점차 명목상의 것, 형식상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통해 가능해진 대량생산과 소비는 기본적으로 대규모로 수탈되는 자연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탈되는 자연에는 가축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 및 빈곤 국가의 국민들 또한 포함된다. 철수의 작품 속 오리는 날개가 꺽인 채 고깃덩어리로 사물화 된 희생양으로 나타난다. 인류사의 초기에 인간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것들을 위한 제의를 지냈다. 균질적인 현대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신성함과 공포를 함께 낳았던 제의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신화, 종교, 축제, 예술 등, 모든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는 제의의 본질을 밝힌다. 그에 의하면 모든 신화는 실제의 희생물에게 행해진 실제의 폭력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희생양이란 말은 희생물의 무고함과 함께 희생물에 대한 집단 폭력의 집중과 이 집중의 집단적 결과를 동시에 가리킨다. 희생물을 바치는 제의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순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 전에는 인간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지만, 동물이 대체 희생물이 되었고, 그래서 희생물은 신성시되었다. 성스러운 것을 뜻하는 라틴어 ‘Sacrificium’은 희생과 밀접하다. 희생물은 성스러움이라는 질적 차이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그러한 차이가 소멸되었다. 현대에 와서 무엇인가 끝없이 희생은 되지만, 폭력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폭력이 확대 재생산된다. 현대적 사고는 사회계약 등을 통해 폭력을 해소한 것으로 간주한다. 르네 지라르는 현대적 사고가 사회의 기원을 이성, 양식, 상호적 호의, 양해된 이해관계 등에 근거하는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사회계약으로 보면서, 폭력의 존재를 무시한다고 본다.

현대적 사고는 성/속의 개념과 함께 순수와 불순과의 구별도 사라지게 했다. 르네 지라르는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이 뒤섞이게 되면 더 이상 어떤 것도 순화시킬 수 없게 된다고 보면서, 질서와 평화와 풍요로움이 문화적 차이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현대를 지배하는 광란의 경쟁 관계는 차이들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에 일어난다. 차이의 종말, 그것은 약한 자를 억압하는 힘이다. 철수의 작품에서 사각 틀에 갇힌 클론 같은 오리들은 현대의 위기이자 희생의 위기를 보여준다. 즉 그것들은 ‘모든 폭력이 차이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차이의 소멸은 폭력을 가져온다’(르네 지라르)는 것을 말한다. 작품[democracy]에서 오리들은 다른 방향을 고집함으로서 한 치도 앞으로 못나간다. 그런데 이 질곡 역시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의 착종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같은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은 동질성이 지배하는 체계 속에서 차이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희생제의 정신을 되살린다. 현대예술 속 동물은 신화로서 잊혀 진 희생의 가치를 일깨우면서, 현대사회에 편재한 폭력을 또 다른 힘으로 극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