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어떤 존재이든 집착과 연민으로부터 벗어난, 지금 여기의 갱신을 위해 저 편에 있어야만 한다. ‘나를 만나야만 그려지는 그림’을 위해 일상의 나는 사라져야 한다. 바람 속에 언뜻 암시되는 나무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태양을 향하여 힘차게 가지를 뻗고 그 위에 풍성한 잎을 거느리는 나무의 원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종종 화면 아래가 비워져 있어, 어딘가에 그저 걸쳐 있거나 꽂혀 있는 듯한 가느다란 나무는 세계 다수 민족의 신화적 상상력을 보편적으로 추동했던 우주목이나 세계수같은 기념비적 면모를 갖추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초월하게 해주는 수직 방향의 연결망, 즉 서로 다른 차원들을 연결하는 나무에 내재된 본질적 이미지는 간직한다. 나목은 거센 바람을 견디어 내려는 한 방편으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수평의 바람을 맞고 있는 수직의 나무는 서로 다른 쪽을 향하는 힘을 가늠하는 좌표계가 된다. 그것은 또한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황망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모노톤의 색상, 그리고 아무런 계산도 구상도 없이, 단지 기(氣)를 모아 종이나 캔버스 위에 단번에 그어진 필획들은 서예 같은 느낌도 준다. 영화의 스크린이나 창문의 이미지가 있었던 이전 작품에서 일련의 단절과 연속성이 있는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작품은 수직, 수평의 구성, 그리고 블랙과 화이트, 약간의 브라운으로만 채워졌다.
이전 작품에서 벽과 바닥에 금가 있던 가는 선들은 이번 전시에서 굵은 획으로 자라났다. 미세한 공기의 진동이 모여 토네이도가 되듯이, 작가는 스스로 깔대기가 되어 작은 흐름들을 모으고, 나비효과 같이 그 힘이 실현되는 장을 마련한다. 우리 모두처럼 일상의 덫에 갇혀 있는 신민주에게 힘이 실현 되는 장(場)은 바로 그림이다. 그것이 유일한 장이기에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닌 화가이다. 이번 전시에서 유폐의 느낌을 주는 벽과 바닥, 굳게 닫힌 창문의 이미지는 지워지고, 인위적 경계가 없는 바깥으로 나간다. 물론 화가에게 나갈 바깥, 들어올 안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진원지는 그녀의 가슴 속이기 때문이다. 안과 밖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무한의 연결망 속에서 바깥으로 탈주한 것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신민주에게 탈주는 속도로부터 비롯된다. 작업실에서 집에 돌아갈 즈음에 붙는 가속도는 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일망정, 반복 속의 차이를 가져다준다. 바람처럼 빠르게 그어진 필획들은 일상의 기계적 반복을 무화시키려는 차이의 몸짓이다.

넓은 평 붓으로 한 호흡에 아무런 기교와 꾸밈없이 그어진 시원한 선들은 기계적 반복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결연한 의지이며, 그 의지가 성공적으로 관철되었을 때 정화가 된다. 사전 스케치는 물론 수정과 가필 없이, 아크릴 물감이 마르기 전에 숨차게 해치우는 작업에서, 튐과 흐름 같은 우연성 또한 작품을 이루는 요소로 포용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의 농담과 강약은 재현이나 표현, 구상이나 추상같은 궁색한 범주로는 포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낳는다. 그것이 향하는 지점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삶의 유지와 재생산에 주력하는 일상은 반복적이지만, 그림 속에서 작가는 매일, 그리고 매순간 다르게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이 작업에 몰두하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유이다. 작가는 ‘사는 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지만, 그림은 내 맘대로의 방식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민주에게 그림은 여가선용이나 자아실현 같은 것이 아니라,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하는’ 운명적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그녀의 그림에는 단호하고 비장한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그림에 과도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기 구휼(구원)으로서의 글쓰기’를 인용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무위의 몸짓은 ‘나 하나라도 구하는’ 만족감을 낳을 것이다.
이번 전시 작품의 단초가 되었던 것은 한강변의 다리 그림자와 물이 넘실대는 듯한 환영(illusion)이다. 환영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에 푸른 줄을 그었고, 화면 맨 아래에는 그림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기 위해 빈 바탕을 남겨 두었다. 떨어지는 물감을 받아내는 이 공간은 우연도 품어주는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가로선을 관통하는 세로선은 의식과 능동적 요소였다. 그 안에는 기하학적으로 그어진 청색의 원근법적 공간을 작게 띄워놓기도 했다. 작품 [긋다 2]는 회색 가로줄 위에 작은 배처럼 떠 있는 원근법적 단편이 보인다. 원근법적 사각형은 재현을 암시하는 기하학적 요소로, 거세게 흐르는 바탕 위에 작은 조각배처럼 떠돈다. 서로 다른 방향의 선들이 벽을 뚫고 지나가기도 한다. 작품 [긋다 3]에서는 회백색 사각형이 비스듬하게 떠 있는 가운데, 푸른 선과 하얀 선이 회백색 평면을 사선으로 관통한다. 혼돈스런 바탕과 기하학의 대조는 서로를 상대화시킨다. 작품 [긋다 1]는 가로 줄만 줄줄 흐르고 푸른색 수직선이 관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하학적 요소는 몇 단계 안거치고 바로 밀려났다. 밀기와 덮기, 지우기와 그리기를 구별할 수 없는 필획 속에서, 묘사와 표현의 경계와 구상과 추상의 경계는 물론, 안과 밖을 넘나드는 풍경이 펼쳐지게 된다.
묘사와도 표현과도 거리는 있지만, 신민주의 그림은 자연 및 자신 속의 자연에 충실하다. 원근법을 꽃피웠던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차후에 발견하였듯이, 자연에서는 서로를 명확히 구별하는 선이 발견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물체의 윤곽은 그것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것과 접하는 다른 물체의 시작’임을 발견했다. 자연에는 윤곽선이 아니라, 단지 명암의 이행이 있을 뿐이다. 그리기와 칠하기, 그리고 지우기가 일체화된 신민주의 작품에서 색과 구도의 한정은 단조로움을 낳는 추상적인 환원이 아니라, 흑백의 계조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게임의 장이 된다. 묘사나 표현으로부터 벗어난 신민주의 선(면)은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실어 나르지 않는다. 그것은 최소한의 조형적 요소로 강도와 밀도를 무한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민감한 표면이다. 이 유동적인 표면에서 변화는 멈추지 않으며 또 다른 변화가 추동될 뿐이다. 여기에는 매끈한 공간을 그려내는 활주하는 선들이 있다. 활주는 때로 탈주가 된다. 작은 해방구이기도 한 연희동 작업실에서, 탈주하는 선들은 판 전체를 덮고, 그 위를 또 덮을 때까지 계속 늘려진다.

신민주의 그림은 점에서 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궤적에 점이 종속되는 매끈한 공간과 관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이 매끈한 공간에서는 형식이 질료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이 힘들을 지시하거나 힘들의 징후 노릇을 한다. 이것은 외연적 공간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 측량의 공간이 아니라 거리의 공간이다. 정확히 위치 지워지는 점들을 무화시키는 선은 움직이는 방향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선은 재현에 복무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모할 뿐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고 탈주를 꾀하는 유목민적인 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민적인 선을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비유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정의한다. 변화되는 이 선들은 유기체들을 가두어 두었던 선들을 해방시키고,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흐름으로 만든다. 저자들은 ‘선이 도주적인 이동성을 통해 기하학에서 벗어나면, 이와 동시에 삶도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치고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유기적인 것에서 몸을 뺀다’고 말한다.
스크린이나 창틀이 등장하던 이전 작품에 이미 내재해 있던 재현주의에 대한 거부는 이 전시에서 퍼포먼스에 가까운 몸짓으로 강도를 더 높였다. 일기 쓰듯이 매일 수없이 그어댄 선들은 그자체가 형태이며 바탕을 이룬다. 동시에 그것은 무형태이며 무바탕이다. 이러한 반복의 특징은 계속되는 불일치이며, 재현의 동일성에 대립된다.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한 재현주의를 극복하려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자유롭고 야생적인, 혹은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의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그들은 보수적 질서와 창조적 무질서의 차이를 강조한다. 신민주의 작품에서 나무로 암시되는 수직적 요소는 감속, 또는 가속되는 수평적 요소 안에서 차이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 수직선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여기에서 또 다른 반복이 시작된다. 그러나 수평적 요소로 이루어진 바탕 역시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파국으로서의 차이가 있다. (무)형태와 (무)바탕은 차이로 들끓는다. [차이와 반복]은 이러한 차이가 환원불가능하고 반항적인 어떤 바탕을, 유기적 재현의 표면적인 균형 아래 계속 움직이고 있는 바탕을 증언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모든 근거들이 와해된다. ‘모든 근원들은 말소 하에’(데리다) 있다. 근거의 와해는 매개되지 않은 바탕의 자유이다. 바탕은 개체와 더불어 표면으로 올라오면서도 형상이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서 (무)바탕은 형상과 질료라는 짝에 근거하는 재현을 무화시키는 장이다. 저자들은 질료들을 용해시켜 버리고 모형화 된 것들을 해체하는 추상적인 선과 무바탕의 짝은 훨씬 더 심층적이고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이 미규정성과 무바탕에서 모든 근거는 와해되고, 동시에 모든 것이 생겨난다. 바람 부는 황량한 공간은 주름을 만들어내며, 이내 무한한 주름으로 뒤덮인다. 들뢰즈가 [주름]에서 말하듯이 차이는 이제 운동과 정지가 아니라, 속도의 순수 가변성에 있다. 속도는 탈주를 추동하지만, 유토피아는 없다. 화가 역시 죽기 전에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진짜 유목민의 운명, 즉 제자리에서 하는 여행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도약하는 강렬함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