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서 김성대는 흙과 빛을 주된 미디어로 활용했다. 지하와 지상을 망라하는 이 미디어를 통해 환경파괴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우리는 이미 전 국가적 프로젝트가 된 4대강 사업을 통해, 사회적으로 교환되지 않은 축적된 자본이 흘러들어가 자연을 파괴하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소수의 지배적 인간의 욕망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고, 단기적인 생산주의의 전망아래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야 할 자연을 재배열하는 과정이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한 예측이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펼쳐졌다. 인간이 유발하는 변화는 작게는 공해를, 크게는 기상재해로 되돌아오곤 한다. 이번전시에서 쩍 갈라진 흙 판들은 가뭄과 지진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간 관객은 지름이 1.5-2m 크기의 원판들이 바닥에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러 행성처럼, 또는 대륙처럼, 또는 섬처럼 배열된 판에는 옹기토, 분청토 등 다양한 종류의 흙이 다양한 두께로 얹혀 있다. 진흙을 투명 아크릴 판에 붙이고 그 아래에 조명을 주어서 자연 건조시켰다.

건조에 의해 만들어진 틈들 사이로 조명이 여러 색으로 변모, 투과되면서 흙과 빛이라는 무기물은 유기체처럼 삶과 죽음을 교차시킨다. 두껍게 또는 자잘하게 갈라진 틈들 사이에는 작은 식물들이 심어져 있다. 조화이긴 하지만,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갈라진 틈새들로 이어지는 뿌리줄기의 이미지가 있다. 틈사이로 비추는 조명이 푸른빛일 때는 바다의 이미지가, 노랑 빛일 때는 용암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하얀 빛은 대규모 변화와 변화 사이의 휴지기와도 같은 냉랭한 느낌을 준다. 빛의 변모가 가져다주는 시간성은 마치 호흡처럼 살아 꿈틀대는 지구의 명암을 드러낸다. 둥근 판은 생명을 담고 있는 거대한 그릇처럼 보이며, 지구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태적 조건을 표현한다. 원은 한정된 크기를 가지면서도 시작과 끝을 확정지을 수 없는 형태로 무한을 상징한다. 균열의 무작위적인 형태와 그 사이로 비죽이 솟아나며 횡으로 증식하는 뿌리줄기들은 유한한 부피 속에 접혀 있는 무한한 표면을 암시한다. 인간의 문명 또한 얇은 표면 위에 얹혀 있으며, 보다 깊고 근본적인 변화에 취약하다.

전시장 가장자리에 있는 알 형태 역시 흙 표면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온다. 생명의 알, 또는 씨앗은 말라붙어 있고, 흙 사이사이로 끼워 있는 물고기들은 그곳이 이전에는 바다나 호수였음을, 그리고 변화는 급작스레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점멸하는 빛은 시간성을 부여하며, 그것이 단지 흙덩이나 바위 같은 무기물이 아니라, 생명의 거처임을 상기시킨다. 원판이든 구이든 흙의 표면에는 울룩불룩한 손자국이 나 있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장소라고 할 강에서 실제 발견되는 물결무늬이다. 여러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무늬는 자연 또는 노동에 의해 에너지가 축적, 분배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패턴들이다. 빛의 강도에 따라 흙 표면의 밝기가 면모하고 굴곡진 면의 촉각성도 다르게 감지된다. 전시장 벽에 상영되는 10여분 분량의 영상은 자연이 생성되고 파괴되고 재생하는 오랜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노트에서 ‘별의 생성부터 인간의 탄생, 인간의 멸망, 자연의 부활’을 보여주려 했으며,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장에 울리는 음향은 불에 타는 듯한 소리와 빗소리인데, 그것은 노랑 빛과 푸른빛으로 상징되는 용암과 물, 파괴와 생성에 상응하는 청각 이미지이다. 빛과 자연적 요소의 결합은 그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발견되지만, 이전에는 금속이 용접되어 만들어진 형태가 야기하는 인공성이 강했다면, 이번에서 작품을 자연적 변화에 개방시켰다. 인간은 환경 변화를 재앙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보다 큰 주기로 볼 때 자연은 형태를 변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열역학 제1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도 않으며 가능한 것은 변화시키는 일 뿐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지구상에는 지상의 부존자원과 태양으로부터 내리쬐는 태양열이라는 두 가지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원이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엔트로피가 최소인 상태는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가 최대인 상태이며, 가장 질서 잡힌 상태이다. 반대로 엔트로피가 최대인 상태란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사용, 확산되었을 때를 말하며 가장 무질서한 상태이다.

닫혀 진 계에서 물질적인 엔트로피는 최대로 향한다. 토양이란 단지 엔트로피적인 흐름에 따라 물질이 응축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생태계 파괴로 토양의 엔트로피가 증대된다. 반면 모든 생명체는 위대한 질서를 보여준다. 모든 생명체는 그것을 에워싼 환경에서 자유롭게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서 엔트로피의 과정과는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생명의 진화는 무질서에서 보다 큰 질서를 계속적으로 쌓아 나간다. 리프킨에 의하면 인간 또한 다른 생물처럼 주위의 질서를 파괴하여 그것을 자기 몸에 흡수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 한 사람이 전 환경 속에 커다란 무질서(혹은 에너지의 낭비)를 일으켜야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생존경쟁은 생물이 얼마나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를 취득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므로, 진화과정에서 각 생물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변환자로서의 능력을 더욱 갖추게 된다. 다른 모든 생물이 그 환경에서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를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 과정을 유리하게 이끄는 수단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문화를 매개로하여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변환하고 폐기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은 복귀될 틈이 없이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은 점차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소수에게 에너지를 변환하고 교환하고 폐기하기 위한 수단이 집중됨으로서, 생명의 기반인 동시에 인간 문화의 기반인 에너지가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보다 거시적인 생태에 주목하는 예술은 단순히 환경 캠페인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에너지의 흐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다룬다. 김성대의 작품에서 다양한 생명들을 품고 있었던 축축한 흙덩어리가 사막화 되는 과정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이다. 엔트로피의 변화는 조각의 형식에서도 감지된다. 미니멀리즘에서 정점을 찍은 현대조각의 변화는 엔트로피가 점점 증대하는 과정이었다. 예술에서 사물로의 추이는 혼돈의 쾌를 극대화시켰다. 이 변화를 추동하는 주된 요소는 시간성의 극대화이다. 김성대의 작품에서 시시각각 그 형태를 무작위적으로 변모시키는 흙은 고정된 조각적 공간성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적극 개입되는 설치물이다.

작가는 의도와 계획, 노동집약적이었던 이전 작업을 보다 자연화 시킨다. 그에 따라 빛의 의미에 대한 강조점도 다르게 다가온다. 구원이나 희망, 생명의 보고로서의 빛(또는 불)은 이제 생명 그 자체, 보다 정확히는 생명의 과정과 중첩된다. 지구의 모든 생명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빛은 갈라진 대지로 상징되는 파괴적 변화의 어둠 아래에서 명멸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것이 더 큰 파괴를 추동할 것인지 폐허 속에서 재생을 약속하고 있는지는 인간으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주기에 달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조명처럼 기계적으로 조절될 수 있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미세한 판의 변화까지 조절할 수는 없다. 김성대의 작품에는 파괴의 어둠 속에서 빛이라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영지(gnosis) 적 관념이 내재해 있다. 이 신비한 지식이 이제는 신의 계시나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 인간이 당면한 운명이다. 그에게 금속 조각에서 흙 판 설치로의 변모는 공간에서 시간으로, 필연에서 우연에로 강조점을 변모시킨다. 계획과 의도는 무작위와 과정에 자리를 내준다.





그의 작품은 고대 원자론자들처럼 전능한 섭리가 아닌, 우연성을 받아들인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미리 세워진 의도에 따라 사물들의 본성을 규제한 최고의 지성이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철학을 우연의 체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 우연의 체계에서 필연과 목적이라는 관념은 사라진다. 원자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 맞게 정렬되는 것은 결정된 계획이나 혜안을 가진 정신 혹은 섭리 때문이 아니다. 최초의 시작과 완전한 종말도 없다. 생성과 소멸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연동되어 있는 김성대의 작품은 어떤 것도 무(無)로 되돌리지 않는다. 물질원소들은 소멸하거나 파괴되지 않고 끝없이 변모할 뿐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에게 기원과 원인, 그리고 목적에 대한 질문은 이미 항상 주어져 있는 것에 의해 폐기된다. 파괴와 생성의 판 위에 새로 시작되는 생명 역시 깊이 뿌리 내리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뿌리-코스모스와 곁뿌리-카오스라는 이미지를 대조시킨다. 무작위적으로 갈라진 틈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리좀처럼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 접속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세상의 예정된 질서를 상징한다면, 리좀은 그 반대이다. 리좀은 나무와도 같은 세상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원리가 없다. 대신에 리좀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며 무한한 연결과 접속을 창조해낼 수 있는 내재적 원리이다. 리좀은 네트처럼 유연하고 무한하다. 뿌리줄기는 정적인 조화가 아니라, 동적인 연속성을 통해 자연의 성장형태를 보여준다. 말라서 쩍쩍 갈라진 형태조차 역동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균질한 표면은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균질적 표면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반면 김성대의 작품에서 다양한 방향과 깊이로 벌어진 한 균열아래 새어나오는 빛줄기의 변화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판을 예시한다. 존재와 달리 생성은 혼돈에 가득하다. 카오스적 형태는 질서 잡힌 형태보다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생물학적 계의 견고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연성이다. 제임스 글리크는 [카오스]에서 건강한 동력학 계는 넓은 범위의 리듬에 적응할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병리현상처럼 보이는 카오스는 해체의 징후가 아니라, 건강의 징후이다. 예측가능 한 한정된 계야 말로 변화에 취약하다. 김성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카오스나 리좀의 이미지는 지속가능한 진보와는 거리가 있었던, 그래서 한정된 용법만 가졌던 이성과 필연의 헤게모니를 거부한다. 리좀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켰던 이원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서 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 조각사 역시 중심과 주변 사이의 투명한 관계를 전제하는 이원론에서 중심 없는 표면으로의 추이를 보여 왔다. 김성대의 이전 작업에서 정교한 계획 아래 진행되었던 용접 조각은 자연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하는 고전주의나 고전주의의 현대적 변용인 구성주의와 밀접하다. 거기에서 빛은 주변을 비추어주는 핵심으로 작동했다. 이번의 설치작업에서 기하학적 구조는 끝없는 표면으로 변모했고,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과정들이 부각된다.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환영과 관념으로부터 실제 시간 속에서 지속의 경험에 방점이 찍는 것은 자연과의 대결이 아닌, 자연과의 교감을 고무하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방향성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단기적이고 한정된 인간 중심적 체계와 질서를 헐겁게 하는 다양한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출전; 필룩스 조명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