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시대(2000년대 이전). 김택기는 공룡이나 우뚝한 남근이 두드러져 보이는 수호신과 같은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소재로부터 조각의 물길을 낸다. 비록 남근이란 도상이 인간의 발상이지만, 전체적으로 인간 이전의 신화시대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진다. 아마도 인간의 근원이며 원형에 대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볼 수 있듯 처음에 인류는 모계사회로부터 시작했고, 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가슴과 엉덩이가 도상으로서 강조됐다. 이후 그 도상을 남근이 대체하는데, 이처럼 남근이 도상으로 등장한 것은 모계사회로부터 부계사회로의 권력이양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상징과 관련이 깊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곧 상징을 쟁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밑바닥에는 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고, 만물은 그 혼의 상징이며 표상이라는 믿음 곧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범신론과 물활론이 깔려있다. 이처럼 남근은 흔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작가에게 남근은 무한한 생명력의 원천이며 에너지를 의미했고, 이런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이후 다른 작업에서 다른 형태와 경우로 심화되고 변주된다.

인간에 관한 보고서(2000). 그리고 인간의 근원이며 원형에 대한 호기심은 이후 자연스레 인간 자체에 대한(어쩌면 현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인체 형상의 골격에다 인조털을 덧입혀 만든 인간 군상을 제안한 것.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어서 스스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정자세로 직립해 있는 인간군상이 아마도 익명적인 인간이며 고독한 현대인을 표상할 것이다. 비록 군상을 이루고 있지만 서로 소통하기보다는 저마다의 불통의 섬에 고립된 현대인, 이를테면 군중 속의 고독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이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조각의 장을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가상의 장을 현실의 장에 연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좌대(현실과는 구별되는 가상의 장임을 보장하고 증거 하는 장치)로부터 내려온 조각이 현실에 발을 디딤으로써 마치 내가 실제로 속해져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인 양 실감하고 체감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이 조각의 물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읽혀진다는 사실이다. 소위 부드러운 조각으로 대변되는 털 인간이 조각에 대한 감각경험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촉각적인 차원으로 옮겨놓고 확장시킨다.

에너지(2006). 자연에는 다양한 형태의 문양과 패턴들이 있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렇고 대리석 표면의 마블링 문양이 그렇다. 이 문양들은 흔히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는 비정형인데(물론 자연에는 정형의 패턴도 있지만, 대개는, 그리고 특히 이런 경우에는), 자기 외부로부터 가해진 불규칙적인 풍화(에너지)를 온몸으로 견뎌낸 결과인 것이며, 그렇게 켜켜이 내려앉아 쌓인 상처가 만들어준 시간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철에도 이런 문양이 있고 패턴이 있다면? 철에 문양이 있었나? 선뜻 이해되지가 않을 수도 있다. 막 캐낸 광석이며 광물 상태가 아니라면, 그리고 일부러 새겨 넣은 경우가 아니라면 적어도 외관상 드러나 보이는 문양이 있을 리가 없다(물론 현미경을 통해 본 결정체 이미지는 있을 것. 여하튼). 여기에 원석 상태도 아니면서, 그리고 일부러 새겨 넣은 경우도 아닌, 철에 문양을 조성하는 방법이 있다. 소위 다마스 기법이다. 성분이 다른 철을 혼합해 지난한 단조과정(에너지)을 거치면 새로운 성질의 철로 재생되는데, 그렇게 재생된 철의 단면에는 놀랍게도 흡사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대리석 표면의 마블링 문양과 같은 자연스런 비정형의 문양이 생긴다. 그 문양은 말하자면 비록 혼합 철이라는 전제가 있지만, 사실 이보다는 단조과정(외부에서 에너지를 가하는)이 만들어 준 결과로 볼 수가 있을 것. 그래서 작가에게 다마스 기법을 이용한 일련의 조형물은 무엇보다도 그리고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주로 정형의 원형과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 모양의 조형물을 만드는데, 완전한 형태며 자기폐쇄적인 형태를 통해서 자기 내부에 에너지를 응집시키고 집중시키는 경우를 의식한 것이며, 그래서 일종의 에너지의 집이며 몸으로 부를 만한 경우를 실현한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는 이런 기하학적인 형태와 함께, 파동 치면서 확산되는 비정형의 형태로, 그리고 특히 난소를 향해 맹렬하게 헤엄쳐 가는 정충을 형상화한 것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기왕에 남근에서 암시된 생명력에 대한 관심이 이 일련의 작업에서 본격적인 에너지로 발화 내지 승화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 특히 남근과 정충이 하나로 만나지는 지점에서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생물학적 차원으로 열리고 생태학적 층위와 연결된다.

로봇(2010년 이후). 그리고 작가는 인간의 원형에 대한 관심(신화시대),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인간에 관한 보고서), 그리고 존재의 원초적 에너지에 대한 관심(에너지)을 경유해 근작에서 에너지(힘과 전능)와 관련한 일종의 상징적 표상이랄 수 있는 로봇에 정박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개 지금의 어른들은 로봇태권브이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다. 볼거리도 놀 거리도 변변찮았던 시절에 TV와 만화를 통해 접했던 각종 로봇, 특히 메이드인코리아로는 처음이자 유일한 경우랄 수 있는 로봇태권브이는 사실상 영웅이었다. 이처럼 가상의 영웅에 열광했던 이유는 진정한 영웅을 상실한 시대에 그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대리물이 필요했고, 대체만족이 급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소위 팝코드의 트렌드와 더불어 로봇의 추억은 되살아난다. 그동안 트랜스포머와 같은 변신로봇이며 인간과 흡사한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와 같은 온갖 진화된 로봇들이 매스미디어를 장악하고, 동심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로 되돌아간 어른들(키덜트)의 마음마저 사로잡기에 이른다. 프라모델 수집 열풍과 더불어 작가들 역시 앞 다투어 그 가상의 캐릭터들을 칭송하고 노래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와중에서도 로봇은 늙고 병들고 녹이 슨다. 일부 작가들은 바로 이처럼 쇄락한 로봇들의 처지에 주목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매스미디어가 만든 허구였고 이데올로기였다. 영웅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반증할 뿐인 시대적 아이콘이며 매개체로 본 것이다.
그 경우가 어떻든 이 로봇들의 몸속에는 가부장적 가치체계와 부계적 이데올로기의 피가 흐른다. 악을 일소하고 선을 실현하는 사회라는 명분을,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명분을, 좀 더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아버지의 정언명법으로 개인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의 지점들, 이를테면 법률과 권력과 정의를 실행하고 실현한다는 당위를 도맡고 있는 것이다. 이양된 상징권력을 수행하고 대리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힘과 선과 정의가 같은 이름으로 호명되는 사회에서 나는 악으로 지목되거나 최소한 잠재적인 악으로 주목된다. 여기에 로봇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있다. 바로 김택기가 주목하는 로봇의 성향인데, 그의 로봇에선 이처럼 힘과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상징권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로봇들은 하나로 어우러져 하모니를 만들어낸다(뮤지션 시리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로봇, 첼로를 켜는 로봇, 색스폰을 불고 트럼본을 연주하는 로봇, 피아노를 연주하는 로봇과 싱어 로봇, 그리고 이 모든 로봇들을 총괄하는 지휘자 로봇이 합주를 통해 천상의 화음을 연주한다. 원래 음악은 시였고, 시는 신의 말씀인 로고스로부터 유래했다. 9기예를 담당하는 요정들 중 최고의 요정이 음악을 관장하는 뮤즈였고, 뮤직이라는 말도 여기서 왔다. 말이 신이지, 여기서 신은 사실상 인간의 한 속성인 것이며 인간이 가장 승화된 경우로 이해할 수가 있겠고, 따라서 그렇게 가장 승화된 형식의 인간의 속성을 로봇에게 투사하고 부여해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영웅이데올로기를 대리하는 로봇, 변신로봇, 그리고 휴머노이드에 이어 로봇이 적어도 보기에 부계이데올로기의 잔재를 일소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제대로 진화하고 진정으로 변신을 이룬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작업에서 로봇은 이렇듯 예술을 매개로 인간으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화된 로봇은 지극히 세속적이다(외출 시리즈). 여자들은 흔히 외출하기 전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진다.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로봇들도 여자들처럼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 머리를 손질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로봇의 여성화를 시도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일종의 기계의 세속화가 제안되는 것인데, 아마도 로봇과 관련한 가장 인간적이고 온건하고 급진적인 상상력의 경우일 것이다. 일부 여성로봇이 없지 않지만, 모든 로봇은 기본적으로 중성이랄 수 있고, 사실상 남성주체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세속적인 로봇은 바로 그 가치관이며 선입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에 발동이 걸린 기계의 세속화는 작가의 다음 작업에서 더 진화하고 더 진척될 것이다(가족 시리즈). 기계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먹고 싸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질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의 구분과 차이를 일소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로봇을 통해 본 문화풍속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는 로봇의 세속화보다는 다만 현재 작업에서 예시되고 암시되는 기계의 세속화가 더 급진적이다. 그 급진적인 물길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 지가 궁금하고, 그래서 벌써 다음 작업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