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 청담동, 이태원 등지에서 열린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서는 공적, 사적인 영역에서 가일층 강화되고 있는 추상적인 시스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젊은 세대의 고난과 고뇌가 드러난다.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생태계에서, 자기 몫의 생을 원활히 살아낼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 어느 시대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공간을 점차 합병하면서 끝없는 경쟁을 야기하는 촘촘한 체계화는, 체계에 승복하지 않고 그것과 건강한 길항작용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이질적 움직임에도 적대적이다. 체계는 체계에 동화되는 과정을 객관적 가치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 누구를 위한 어떤 객관성인가를 따져 볼 때 객관성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으며, 단순한 권력에의 의지임이 드러난다.

하나의 권력에의 의지와 또 다른 권력에의 의지가 상충될 따름이다. 그래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중재하는, 즉 개인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제도가 근대에 생겨났다. 그러나 승자독식으로 치우치는 시장의 힘을 견제해야 하는 국가 같은 공적 기구들은 시장과 하나가 되어 다수의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약자와 강자 사이의 거리는 무한대로 벌어져 있으며, 더 가속화될 조짐을 보인다. 지배적 체제는 자유와 풍요를 끊임없이 약속하지만, 결국은 극소수에게만 승리를 몰아주는 불공정 게임을 추동한다. 체계는 자연을 사회로 성숙시키기 보다는 자연보다 더 맹목적으로 만든다.

보편성과 합리성을 당위로 내세우는 이성은 그만큼의 강도 높은 비이성을 만든다. 그것은 이성이 비이성이라는 반발을 낳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성자체가 비이성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은 만물의 시장화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지배적 체제는 분할될 수 없는 개인을 분해된 코드로 환원시켜 적절한 지점에 배치하려 하며, 그러한 지점으로 자신을 환원시키려 않는 젊은 작가들은 항변한다. 이들에게 작품이란 지배적 가치에 완전히 동일화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유력한 방법이라는 점이 그들의 작품을 더욱 절박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의 작품에서 언뜻 보이는 다른 세계들은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것이 단지 인간의 규칙일 뿐, 자연의 법칙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들은 체계 자체만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어 보이는 이 맹목적인 폭력에 저항한다. 그들은 체계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보다는 자신의 체계를 생성하려하며, 자신의 체계를 관철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배적 체제가 유일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 즉 그것의 상대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물론 예술이 극도로 타자화 되어 있기는 하지만, 단지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배적 체제에 저항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원근법처럼 하나의 소실점에 중심을 둔 지배적 체계는 여러 차원으로 촘촘하게 자신의 체계를 복제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이러한 재현의 시스템으로부터 멀리 탈주하려 한다.

구현모의 ‘cube-nature’ 전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조인 큐브로 자연화 된 구조를 만든다. 주거지같이 생긴 축소모델이 견고하지 못한 받침대 위에 공중누각처럼 위태롭게 설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주체와 몸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집이다. 그러나 종잇장과 나뭇가지 등으로 만들어진 작은 집들은 무척이나 취약할 뿐 아니라,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경계선도 사라져있다. 거친 바깥으로부터 안을 아늑하게 보호해 주어야 할 집은 그 내부에서 번개가 치고 이끼가 끼어 있으며 눈까지 쌓여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은 위협이나 위험이기 보다는 바깥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넉넉한 자리로 보여 진다. 이끼 깔린 집은 작은 집을 광대한 초원으로 변모시키며, 차가운 눈조차도 목화솜이 깔린 듯 포근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집 드로잉에는 숲이나 구름도 집에 끌어들인다. 집-주체-몸은 바깥에 견고한 방어벽을 치는 폐쇄적 구조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경계의 소멸은 외계로부터 항상성을 유지해야할 유기체의 생존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죽음에 가까운 열락을 낳는다. 그의 작품에서 육체적 정신적 물리적 차원에서의 경계 소멸은, 뚫린 김에 활짝 열어 제친듯하다. 그것은 방어(구축)만 하다가 인생을 다 소모하지 않으려는, 인생에 대한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전략이다.

 


 


 

갤러리 bk에서 열린 neogenesis 전의 세 작가의 작품에도 집-주체-몸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여기에서도 그것들이 세워져야할 든든한 토대는 사라져 있고 경계는 모호하며, 주체의 확장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는 열락과 고통이 감지된다. 전시부제에 함축되어 있듯, 재현보다는 생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생성은 재현보다 늘 불확실한 과정이다. 정세라의 [외부 없는 집](2011)은 철과 유리, 콘크리트로 구축된 건물 그 안팎에서 인공 또는 자연의 빛이 일렁인다. 근대적 구조물은 그 단단함을 잃고 흐물흐물해진다. 체계화를 통해 자연과 무의식까지도 식민화시키는 근대적 체계 또한 외부가 없으며, 외부가 없는 체계는 그 내부로부터 파열(함열)된다. 노란색 가로등의 물결이 좁은 골목길을 마치 실내처럼 연출하는 작품 [beyond](2010)는 모든 것을 다 녹일 듯 한 빛의 출렁임이 현기증을 자아낸다.

정원이나 골프장, 집 같은 인공 구조물을 소재로 한 풍경을 보여주는 조해영은 정세라의 그림처럼 인적이 없다. 정세라와 조해영의 그림에서 세상은 구조로 환치되어 있고, 그 구조는 흔들린다. 여기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조해영의 [garden]과 [green] 연작에서, 부드러운 색조로 칠해진 단순한 구조물은,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에 공통적인 추상적 패턴이 있다. 거대한 홍수에 감긴 듯 한 건물을 그린 [purple plant-Mont Carlo](2011)는 단단하게 구조화된 것들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고정될 틈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형상이 그림자같이 드리워진 작품 [vitesse](2012)는 억압적인 재현의 체제로부터 빠져나가는 미지의 것이다.

한지석의 작품에는 자연이라고도 인공이라 할 수도 없는 애매한 풍경이 있다. 그것은 동시에 주관적 세계인지 객관적 세계인지도 확정할 수 없다.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하나의 중심을 자연스럽게 해체하고 부분들을 주목하게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내부로 거닐게 한다. 거기에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과 이야기들이 있다. 윈도우 갤러리에 설치된 작품 [innerself portrait 10](2009)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가운데 부분적으로 섬광이 명멸한다. 여러 시점과 지점이 한데 얽힌 풍경은 동시에 내면 풍경이다. 가로 4미터인 대작 [I have got you 10](2009)는 달리는 차 등, 도시 풍경의 여러 단면이 어지러우면서도 감정의 흐름에 따라 배열된다.

차가운 계열의 색조는 그것들이 바깥풍경이든 내면풍경이든 스산한 분위기로 몰고 간다. 지붕 모양의 선 안에 폭발하는 듯한, 또는 신경계의 망 같은 선들이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선들과 한데 얽혀 있는 작품 [construction reflected](2010)에는 죽음, 해체, 확장, 열락 등등의 단어를 동일한 의미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또 다른 작품 [glass house](2010)나 [anonymous face](2010)에서 집-주체-몸은 비슷한 위험, 또는 상황, 또는 운명에 놓여진다. 갤러리em의 clusters 전은 음악 용어 중 하나로, ‘동시에 여러 음을 내는 다중화음’을 뜻한다. 유일한 체계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조화보다는 단조로움을 야기한다면, 클러스터는 지배적 관점에서 보면 소음이라 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소리들이다.

김주리의 [휘경동](2011-12년) 시리즈는 재개발 지역의 허름한 주거지들을 고고학자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물과 흙으로 구조화된 집들은 추가된 물로 인해 아래로부터 붕괴된다.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집들에는 비극적이고 감상적인 면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큰 자연의 주기 속에 문명을 배치하고, 그 문명의 상대성을 관조하는 거시적 관점도 있다. 박형지의 작품은 도시의 야경 또는 우주의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고 흔들리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그 무엇이건 명확한 좌표계에 확고부동하게 위치지어지지 않고 부나비같이 떠도는 허구적 속성이 강하다. 그것들은 근거 없고 가볍기에 활력과 생동감까지도 느껴진다.

신건우의 부조는 게토화 된 도심의 거칠고 더러운 실내 세부가 튀어나올 듯 즉물적이다. 작품 [watch the butterfly falling](2012)에서 죽은 예수를 떠오르게 하는 남자와 포르노그래피 속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바니 걸은 한 공간에 섞여 성과 속의 경계를 허문다. 작품 [three bin bags](2012)은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있는 듯한 거대한 비닐봉지가 밖으로 탈주를 꾀한다. 쓰레기가 되는 일은 더러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한 가지 방법이 될 법도 하다. 세 전시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몸과 주체의 연장으로의 집은 그자체가 자명한 존재로 가정되지 않고 가장 먼저, 가장 심하게 도전받는다. 그것은 추상적인 체계 속에서 자기만의 구체적인 자리 잡기라는 기획의 어려움임과 동시에, 그만큼의 근본적인 도전이다.

출전; 아트인 컬처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