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화된 체계 속에서 전문적으로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이들은 자율성이라는 미학적 개념과 더불어 근대에 발생했다. 생산중심의 근대사회에서 분업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주된 방법이다. 생산과정을 쪼갤 수 있을 때까지 쪼개서 기계들이 모든 부분들을 담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자본가의 최종적 목표일 것이다. 오늘날 모든 생산현장에서 기계가 아닌 인간이기를 요구하는 기본적인 행동과 요구는 반(反)인간적 범죄만큼이나 위험시된다. 과학과 기술은 분업 시스템을 통해 생산력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현대사회의 주도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과학기술의 총아인 군수산업에서 전투기 한 대의 가격은 1400억 원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겐 첨단 무기도 미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만한 초고가 예술작품은 그 공식적인 대량 인명살상용 무기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가공할 힘 내지 가격을 가진 과학 기술은 언어의 공유를 통해, 호환성 높은 분업 시스템을 견인하게 된다. 과학기술의 언어는 정확한 재현을 특징으로 한다. 과학적 실험의 결과는 어느 나라의 어느 과학자가 실행해도 똑같은 데이터가 나올 수 있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과학계에서는 의외의 실수를 통해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의도적인 데이터의 조작은 사기에 준하는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과학 기술의 역사가 보여주듯, 새로운 발견이 반드시 상품의 개발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과학적 진보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투명한 수학 공식으로만 이루어진 과학 역시 불투명한 서사가 지배한다. 오늘날 예술가는 현대 수학자나 물리학자, 언어학자나 철학자들처럼 투명성 속의 불투명성, 결정 속의 결정불가능성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을 넘어 인생에 두루 걸쳐 있는 역설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항상성과 생산력을 위해 보장되어야 하는 과학의 객관적 방식은 오늘날 공장이나 기업, 관료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러한 촘촘한 체계화가 검증받는 때는 우발적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마치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도 같이, 구조를 위협하는 사건은 질병처럼 조직의 효율성을 재점검하는 계기이다. 최대의 기능과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매뉴얼의 확립과 그 매뉴얼대로 정확하게 움직여 질 수 있는 인적 요소의 훈련은 점차 연령이 내려가는 조기교육부터 시작된다.

세계화 시대에,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언어를 어릴 때부터 내면화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세계화의 힘이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 오늘날 통일된 언어로 움직여지는 투명한 시스템은 생산과 소비의 주기를 매우 빠르게 순환시킨다. 생산 중심의 사회는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동시에 쓰레기 또한 대량으로 생산한다. 똑같은 패턴으로 대량 생산하는 것은 비슷한 방식으로 대량 소비할 것을 요구한다. 상품처럼 쓰레기의 흐름 또한 순차적으로 선진국에서 저개발국을 향한다. 소비 양식을 모른다면, 더 나아가 소비 욕구 자체가 없다면 자본주의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지배가 이루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학습되어야 할 언어가 먼저 도착해 있다. 자본의 집중과 생산력을 이끄는 언어의 통일은 간극과 경계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다. 생산이 분업에 의존함에 비해 소비는 총체적이다. 크고 작은 소비를 가능하게 함으로서 억압적인 생산 체계는 그나마 유지된다. 생산중심이 소비중심으로 이동해 갈 때, 근대는 탈근대로 진입한다.

근대적 체계 속에서 예술가 역시 다른 직업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전문성을 배양하고 발휘했지만, 분업에 걸 맞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분업은 분업에 상응할만한 공평한 기회나 분배를 낳지 못한 것이다. 예술은 잉여에 의존하지만, 잉여가치의 쏠림 현상은 예술에서도 일어났다. 근대가 널리 고취한 평등사상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또는 직업군 사이의 비대칭 관계는 극복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진보란 비대칭 관계를 통해서만 추진력을 얻는다. 자본이라는 양적 코드로 모든 사회가 재편되어 감에 따라, 사회를 다채롭게 물들일 질적 가치로서의 차이는 개체로서의 생존이 위협 당 할 만 한 차별로 전화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이 여느 상품과 다른 독특한 차이는 그들의 타발적 자발적 고립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삶이 사회와 너무 큰 간극을 가지면 사회는 물론, 작가에게도 작품에게도 독이 되기 십상이다. 예술은 몸에 이로운 균처럼 동질적 몸체에 길항작용을 하는 이질성, 그리고 차이의 담지자라는 역할을 통해 사회의 건강함과 다양함의 번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근대가 탈근대의 단계로 변화하면서 분업은 융합을 낳고, 변화된 사회적 생태계는 예술 및 예술가에게도 자못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듯도 싶다. 근대적 분업이 낳은 예술의 자율성이 해방이자 소외인 것과 마찬가지로, 탈근대적 융합 또한 양면적이다. 단적으로, 우리의 교육과정은 전문인에 맞춰있지만, 사회에 나오면 여러 가지를 다 잘해야 한다. 또는 반대로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분업화의 끄트머리에 있는 단조로운 노동에만 매몰된다. 힘의 불평등한 분배가 있는 인간 사회 어디고, 누군가는 경계들 사이로 자유롭게 서핑을 할 수 있으며, 누군가는 한 지점에 고정되기를 강요당한다. 그것이 불균등한 권력이 유지되며 확대되고 고착되는 방식이다. 인간은 평생 배워야 한다는 이상적인 가치와도 다르게, 갓난아이를 막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교육의 기간은 점차 길어지고 있으며, 막상 그것이 소용되는 생산의 시간은 더욱 축소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교육되고 더 많이 투자해야 하지만, 생업을 통해서는 무엇인가 새로이 배우고 도전할 기회가 부족하고 생산의 전선에서도 빨리 퇴출되곤 한다.

평균수명은 길어졌는데, 자신의 전공부문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직업의 기간은 20년—거의 30세까지 ‘스펙’을 쌓아야 하지만, 50세에 퇴직을 걱정해야하는 평균적인 직장인을 기준으로—내외이다. 누구에게나 다 행복하지는 않을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될 수 있으면 빨리 사회에 나와서 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사회에서 배우고 현장에서의 또 다른 기회를 통해 인생 2모작, 3모작까지도 가능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 것이다. 그런데 훈련 과정은 너무 길고 정작 교육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는 많지 않다. 현재 우리의 교육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자기 지시적 과정으로 축소되어 있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교육을 위한 교육이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자기지시성을 신비한 가치로 포장하기도 했지만, 자기지시성도 이제는 억압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나다’라는 식의 자기지시성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자본가의 자기지시성은 힘의 우위에 의거하여 아무런 합법적, 합리적 이유 없이 스스로 선포하는 규칙이 될 수 있지만, 노동자의 자기지시성은 해고의 지름길이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자기지시성란 것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작동된다.

사회가 복제와 재현, 재생산, 즉 명확한 코드화가 가능한 것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때, 타자를 두루 포괄할 수 없는, 비좁은 입지를 가진 재현의 체계는 거칠 것 없이 작동한다. 소실점처럼 저 멀리 다다를 수 없는 없는 곳에 존재할지 모르는 힘의 중심은 타자를 대상화, 주변화 한다. 르네상스식의 연극 무대가 원형인 원근법이 예시하듯이, 유력한 자리는 보이지 않은 전지전능한 중심과 마주 한 왕(패트론, 스폰서)의 자리에 한정된다. 피라미드 식 권력의 체계는 붙잡을 수 없는 끝없는 희소가치를 창출함으로서 유지된다. 피라미드 체계의 구성인자들에게 완전한 억압이 아닌 조금씩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서, 자기 주변이나 하위의 인자들을 도구화하여 개별적으로 노력 한다면 힘의 중심에 곧 다다를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재현의 체계는 말 그대로 환영의 체계가 된다. 성장의 견인 차 역할을 함으로서 세계의 귀감이 되었다는 한국 사회의 극렬한 교육 풍토 역시 생산중심의 사회에서 소비중심의 사회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그 기나긴 교육 과정이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배움의 가치에 앞서, 줄줄이 늘어선 교육 시장의 지배를 지적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정작 고시생들은 별로 없는 고시원은 학교의 짝패로, 끝없는 준비를 위한 공간의 상징이다. 투입과 결과 사이의 괴리감은, 우리나라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 풍요를 구가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다수가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과 육체적 과부하의 원인이다. 단지 자기지시적인 재생산과정에 머무는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와 기회의 균등이다. 동기가 부여되면 자발적으로 학습한다. 이에 대해선 예술만큼이나 확실한 예도 없다. 작가는 모든 것을 두루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테마에 관해서는 결국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절실한 동기부여와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자리 잡으면, 학교를 다니거나 더 다니는 것은 여러 선택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배움의 필연성을 가지는 이가 있다면 사회는 학교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가 아닌,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법만 존재한다. 오늘날 예술가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법처럼 고착된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긴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정의, 그것과 법 사이에 놓여 진 간극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대학을 가야하고 어디까지든 가야하지만, 비용은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구조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피해와 피해의식을 낳는다. 동질화를 지향하는 사회의 구조와 길항작용을 해야 할 예술 역시 이러한 덫에 걸려있다. 아무리 예술이 영원한 젊음과 연관되어 있다하더라도, 무한정 배움의 기간을 늘리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그러나 무한히 길어진 학창시절이 전부가 아니다. 푸릇푸릇한 청년기를 모두 잡아먹는 기나긴 학업을 마치고, 학교로 대변되는 기성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한 채 이미 정신적으로 노쇠한 이들이 작가로 나서면 관료주의가 진을 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물질적 성장과 함께 급 비대해진 관료화에 작가들 또한 많이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시스템에 잘 길들여 있는 자는 그다음 단계도 수월하다. 무한한 인내와 투자를 요구하는 교육은 과연 그 진가를 발휘하곤 한다. 요즘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직업 1순위는 공무원이라고 한다. 소방관, 선생님, 대통령 등등 구체적인 직업이 아닌, 추상명사 ‘공무원’이 아직 부드러울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하는 상징적 체계가 있는 것이다.

모국어, 외국어, 법의 언어 또는 과학의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구조와 일치시키는 과정이 성장이고 교육이다. 그 아이가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 대학에 진학해도, 전공보다 법을 더 많이 ‘공부’한다. 공무원, 또는 공무원에 준하는 많은 직업의 준비의 정초가 되는 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암기하는 훈련에 일가견이 있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두꺼운 법전들은 그리 낯설지만도 않을 듯싶다. 딱딱한 법의 언어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법과 동화되는 그 오랜 인내의 과정은 한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사회인이 되는 전형적인 과정과 완전히 일치한다. 앞서 언급한 고시원은 이 같은 맥락에서 직업준비소의 원형적인 장소이다. 그런데 다수가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매달리는 법의 토대에 대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한 바 있는가? 법을 비롯한, 기성의 권위는 따져볼수록 신비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씁쓸한 예이지만, 한국의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폭력 사태는 법과 폭력간의 긴밀한 관계를 예시한다.

현대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적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밝히는 글 [법에서 정의로]에서, 라 퐁텐의 동화 [늑대와 양]을 인용하며, 힘이 법을 만든다고 말한다. 법은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 항상 가장 뛰어난 것’인 냉소적 도덕이다. 정의와 힘의 관계를 논하는 맥락에서 그는 파스칼을 인용하면서,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을 필연적’이라고 본다. 공통적인 공리는 정당한 것과 가장 강한 것, 가장 강한 것으로서의 가장 정당한 것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파스칼)하며,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파스칼의 결론은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에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 법은 자연과 반대되는 폭력일 뿐이다.

데리다는 폭력이 법의 기원에 존재한다는, 폭력과 법 사이의 상호 함축을 시사하는 논문 [벤야민의 이름]에서도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과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고 본다. 폭력은 법에 생소하지 않다. 법속에 있는 비(非)법적인 심급(순간)이다. 법은 폭력 위에 정초되지만, 직접 현전하지 않고서도 그것은 어떤 대체물의 대체 보충에 의해 대리되고 대표(재현)된다. 그는 폭력에 관한 벤야민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최초의 질서를 정립하는 정초적 폭력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보존적 폭력 속에서 대표(재현)된다고 말한다. 법, 즉 폭력이 재현의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예술가들에게 매우 시사적이다. 자신은 현대 미술을 하고 있다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현대예술에서 이미 극복된 듯 보이는 재현의 패러다임이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고 있으며, 예술가들 역시 이 시스템에 적응해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학습이 아닌 작업을 통해 본능적으로 재현의 시스템이 포착할 수 없는 타자를 감지한다. 그러나 타자는 저기 바깥에 있지 않다. 법을 성찰하는 데리다의 연구에서도 주목 할 만 한 것은 법 자체에 내재한 타자성이다.

이 타자성은 법과 반대되는 듯한 폭력(Gewalt)과 합리성과 반대되는 결정불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법은 권위에 대한 모든 주장의 상징적 영역을 대표한다. 그러나 법에는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독점은 이러저러한 정당하고 합법적인 목적들이 아니라, 법 자체를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법은 폭력과 관련된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정신은 권력의 형식 아래서 밖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정신은 독재다. 미셀 푸코 역시 진리와 권력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내재적인 관계를 강조한 바 있다. 오늘날 예술가가 철학자들만큼이나 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법을 잘 지켜서 보다 유리한 고지에 오르는데 있지 않다. 예술가들은 카프카처럼 법이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세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모든 방면의 체계화를 추동하는 원형적인 법은 그자신이 내세우듯이 결코 투명하지 않다. 그것은 진리나 담론만큼이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술만큼이나 불투명하다.

가령, 화폐의 기준인 달러, 그것이 세계의 경제를 지배하는 질서 배후에는 가장 막강한 항공모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데리다의 법에서 정의로의 여정에서, 정의는 교환 및 분배를 넘어서는 선물, 결정 불가능한 것, 공약 불가능한 것이나 계산 불가능 한 것, 독특성과 차이, 이질성에 대한 담론을 모두를 포괄하는 우회적인 담론이다. 법은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한다. 그러나 정의는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하는, 어떤 특유한 상황 속에 있는 개인들, 집단들, 대체 불가능한 실존들, 타자 또는 타자로서의 나 자신과 관계한다. 정의는 불일치나 계산 불가능한 불균형의 경험 속에서만 동기가 부여될 수 있으며, 자신의 운동과 도약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의는 기존 규정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그는 레비나스를 인용하면서 타자와의 관계가 바로 정의라고 말한다.

정당한 결정의 순간은 그에 선행하는 법적이거나 윤리적인 또는 정치적이고 인지적인 숙고의 중단을 표시한다. 결정의 순간은 ‘하나의 광기’(키에르케고르)이다. 결정은 긴급하고 촉박한 결정은 비지식과 비규칙의 밤에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한다. 데리다는 어떤 판사의 결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단지 법이나 일반적인 법의 규칙을 따라서는 안 되고, 마치 극단적으로는 지금까지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판사 자신이 매 경우마다 이를 발명한 것처럼, 재창설적인 해석의 행위에 의해 이를 책임지고 인정하고 그 가치를 확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적 정당성의 근거는 새로운 신선한 판단이다. 법적 판단의 핵심에 있는 이 창설적 판단의 새로운 신선함과 창의성이 법의 세계에 살고 있는 예술가에게도 필요한 자질이다. 기성의 규칙만 따르는 계산 기계가 필요한가. 더구나 예술에서? 그것은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가장한 순응주의에 불과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만약 계산이 계산이라면, 계산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계산 가능한 것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결정불가능성이라는 주제는 해체주의만큼이나 예술의 핵심에 있다.

결정불가능 한 것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경험이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는 결정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며, 이것은 프로그램 될 수 있는 적용이거나 계산 가능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이는 적법할 수는 있겠지만 정당하지는 않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모든 결정과 결정의 사건에 편재한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 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매혹적인 범죄자처럼 법에 도전함으로서 법질서 자체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는 가장 변론하기 어려운 사건을 맡는 변호사처럼 적법한 권위에 대해 근본적 차원에서 저항한다. 데리다의 법에 대한 논의는, 현대철학에서 논구되었으며 현대미술 역시 본보기를 삼을 만한 그의 해체주의가 단지 허무주의나 불가지론,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와도 다르게, 진보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예시한다.

출전; 사립미술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