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천정에 매달려 있거나 늘어져 있으며, 바닥에 놓여 있고 널려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 색의 실을 풀어서 만든 비정형적 형상들이다. 비정형이지만 추상은 아니다. 정확히 분류를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자연 및 미시세계의 생물체나 그 부분들이 연상된다. 그것은 생명의 외부이자 내부이며, 현재의 상황이자 잠재적 상태이며, 형태이자 감정이고, 존재이자 되어가는 과정이다. 훌라우프의 둥근 형태를 제외하곤 직선을 비롯한 기하학적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훌라우프 아래로 성글게 짜여 진 망은 아무것도 건져올 릴 수 없는 불모의 기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뜰채는 거미줄에 가득 매달려있는 이슬방울처럼 빛을 머금고 있다. 이재순의 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포획하기 위한 장치이다. 반대로 그것들은 명확한 것에 달라붙어 불명확한 것으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실 뭉치들은 중력에 자신을 맡긴 채 끝없는 인연들을 이어간다. 그것들은 또한 고정된 자리에 붙박혀 있지 않는다.

여러 형태들은 어떤 자리에 걸려있거나 놓여있기는 하지만, 한 장소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는다. 특히 덩어리를 이루지 않고 섬유의 상태로 있는 것들은 지나가는 관객의 발걸음에도 들썩일 듯 먼지뭉치처럼 놓여있다. 이재순의 작품에는 인간과 동식물 이미지가 존재하지만, 완전히 분화되기 보다는 원시적인 형태로 남아있으며, 긴밀한 조직체가 아닌 군집의 형태로 느슨하게 존재한다. 다듬어지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은 원초적 단계의 생명체들은 고도로 분화된 유기적 조직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전자현미경 사진 등, 참조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혼합과 변형을 통해 완전히 재창조된 미지의 생명체들이다. 혼합과 변형은 동질성에 내재해 있는 이질성의 극대화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맞부딪혀 헤테로피아의 풍경을 이룬다. 이재순의 작품에서 기괴한 느낌을 주는 설치와 그림들이 실을 비롯한 매우 일상적인 재료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전시공간은 일상적 재료들은 익숙함에서부터 낯섦으로 도약하는 장이다. 프랑스제 쇠 수세미는 실처럼 섬유의 느낌을 내장하고 있으며, 풀어놓은 형태에 따라 적혈구부터 먹으로 그린 그림까지 다양한 자유연상이 가능하다. 훌라우프는 실과 만나서 생성과 소멸의 메타포에 대한 틀 거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한 장소를 강하게 점유하는 것이 아닌 작품 형태는, 뭉쳤다 펼쳤다 하면서 다른 문맥 속에서 다르게 배치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가변설치인데, 이러한 작품 경향은 산이나 길거리에 설치되며, 퍼포먼스와 결합되기도 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은 덧없는 시간성이자, 시간과 하나가 된 생명의 본질을 드러낸다. 설치작품은 벽에 걸린 세 점의 그림처럼, 자유연상에 의한 공간 드로잉에 해당된다. 설치 제목이자 전시 제목인 [이어짐에 의한 세계]는 실로 만들어진 세계에 걸맞게 이어짐을 말한다. ‘잇다’는 의미가 종교(religion)이라는 단어에 속해 있듯, 실로 얽히고설킨 세계는 지금여기의 유비이면서도 다른 차원의 세계로 향해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들이 풀어헤쳐질 때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이 연상되듯이, 이어짐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만 향하는 불가역성이 아니라, 추적되기 힘든 우회과정을 거치며 돌고 돈다. 잔해들은 새로운 것을 생성하기 위한 원초적 재료가 된다. 대부분은 생성인지 소멸인지 가늠할 수 없는 중간단계들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순환과 재생이라는 메시지는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도 관철된다. 특정 종교의 도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분리된 것을 이어주는 종교의 기본적 성향에 치유라는 메시지가 더해진다. 그래서 다소 어두운 지하공간을 채우는 색색의 재료들은 샤머니즘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실들은 무당(巫堂)처럼 여기와 저기를 이어준다. 실이라는 일상적 재료를 통해 자유연상으로 공간에 그려진 형상들은 무의식의 풍경을 이룬다. 무의식은 몸과 밀접하다. 이 전시의 주요 재료인 실자체가 머리카락 찌꺼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이재순의 실에는 그 출발부터 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오염(pollution)의 상징주의가 내재해 있다. 인류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의 가설에 나타나는 오염의 상징주의는 몸 안/밖을 구별하는 경계를 성/속의 경계와 중첩시킨다. 금기를 이루는 경계를 위반하려는 불경한 충동은 위험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이재순의 작품에는 알록달록 일상을 장식하는 여분의 것들이 아니라, 병으로 병을 치유하거나, 더러움으로 더러움을 씻어 성스러움으로 고양되는 변증법이 내재한다. 실은 풍선이나 훌라우프 같은 오브제와 연결되어 추상적인 형태를 이루기도 하고, 접착제로 뭉쳐져 시체나 인형 같은 형태를 만들기도 하며, 무기물처럼 그냥 바닥에 쌓여지거나 늘어뜨려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바느질할 때 많이 사용하는 평범한 실 수백 통이 활용된다. 그것들은 공간을 조각적으로 점유하기에는 너무 얇아 비효율적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양이 질로 도약하는 무수한 계기들이 필요하다. 실은 일정한 두께의 펜 같은 중성적인 느낌으로 공간 드로잉에 활용된다. 색과 색이 만나 뿜어내는 에너지는 실이라는 중성적인 재료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 생명력이 표현을 낳는다. 실은 짜여 지는 것이 아니라 풀어지고,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집합된다. 무질서도(엔트로피)가 증대됨에 따르는 에너지의 방출과 이완은 혼돈과 쇠퇴, 불모의 느낌도 준다. 동시에 소생이나 긍정적 에너지를 나타내는 빛의 이미지는 소복하게 쌓인 밝은 실로 표현되기도 한다. 평면이든 공간이든, 드로잉은 명확한 계획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며, 자신의 무의식과 영혼, 몸 깊숙이에 저장된 것을 밖으로 꺼내고 풀어헤치며, 그렇게 펼쳐낸 것들로 타자와 소통하려 한다.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엉성하게 뭉쳐있으면서 어느 순간 타자를 향해 촉수를 뻗는다. 엉거주춤한 수동성은 어떤 절박한 계기에 맞딱뜨려 능동성으로 전화할 것이다. 소통은 압박에 의한 것이지, 당위적 명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재순에게 실은 느낌이 형태로 곧장 번역 될 수 있는 능숙한 미디어가 되었다. 그림 역시 한 형태가 그다음 형태를 부르고, 그런 식으로 연속되는 체험 속에서 작가는 보다 큰 에너지와 하나가 되는 희열을 느낀다. 즉흥적으로 나온 것일수록 더욱 필연과 가까워진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과정과 흐름을 내포한 이재순의 작품은 인공적 제작의 산물이지만 유기체의 느낌이 있다. 천이나 편물처럼 짜여 진 것이 아니라, 풀리고 뭉쳐서 만들어진 형상들은 잉여와 초과의 몫이다. 단촐함과 엄격함보다는 다채로움과 나머지들 쪽이다. 몸은 물론 무의식까지도 세세히 시스템화 되어 가는 현대에서, 색다른 것이 생성될 수 있는 곳은 이러한 나머지들뿐이다. 시스템과 시스템의 틈 사이에서 이러한 여지들을 늘려가되, 그것이 임의성이나 자의성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어떤 감각이 필요하다. 단순한 우연성이란 시스템의 짝패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을 비롯한 섬유 재질은 각자의 가닥을 유지하면서 헤쳐 모인다. 섬유들은 마치 자연이 생장하듯이 서로 다른 흐름들이 모여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한가닥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그렇게 집합되어 있다.

느슨하게 쌓여있는 것은 그자체가 에너지의 집적처럼 보이며, 꼬여있거나 뭉쳐있던 것들이 풀어지며 발산된 에너지가 느껴진다. 실 더미와 실 뭉치로 만들어진 풍경에는 순차적인 전이와 이질적인 접목들만이 영원하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있고, 질서 속에 혼돈이 있는 카오스모스의 세계이다. 이질적 흐름들을 한데 모아 놓는 구조는 화이트 큐브와 캔버스의 틀 뿐이다. 이재순의 작품에서 결정된 형태와 위치는 없다. 느슨하게 걸쳐있거나 펼쳐있는 것은 물론이고, 접착제로 단단하게 뭉쳐진 형태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실체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녀에게 작업이란 익숙한 존재를 다르게 실존하도록 취하는 여러 조치들이다. 색색의 실이 풀어 헤침과 뭉쳐짐은 이질적 구성요소들의 교차점, 또는 결절(nodal)점을 무수히 늘려나간다. 하나의 중심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다중심의 표면을 유목하는 선들은 심층적인 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중층적 표면들을 잠식하면서 단지 뻗어나간다.

방향은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과 매 순간순간 대화함으로서 정해진다. 거기에는 무의식의 흐름처럼 연접과 이접 등으로 연결되는 방식이 있다. 복잡하고 이질적인 흐름들은 존재가 아닌, 생성과 소멸이라는 과정적 흐름을 강조한다. 색실들의 미세한 흐름은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대로 노출한다. 조직이 아니라 떼나 군체, 집합이라는 방식은 이질성과 복수성을 강조한다. 이재순의 작품은 복잡한 연결망을 이루고 있지만, 연속적인 코드화를 통한 전달 방식과 무관하다. 재현으로 대표되는 연속적 코드화는 투명한 소통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무엇인가 전달하지만, 그 과정은 불투명하다. 이 과정은 밀도나 강도의 차이에 의한 전염이나 감염, 또는 확산의 메커니즘에 더욱 가깝다. 여기에는 소통을 위한 유일한 패러다임, 즉 언어적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재순의 작품에서 소통은 이질적인 것들의 배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작가는 보편적인 의미를 소통하려는 의지보다는, 어떤 상황의 특이점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배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배치는 단순한 우연이나 보편적인 공리를 따르지 않는다. 배치가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풍경은 주체와 객체 이전의, 또는 이후의 풍경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흐름과 코드의 배치는 형식과 구조의 분화, 객체(대상)와 주체의 분화에 우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배치가 종속되는 유일한 법칙은 일반적인 탈영토화 운동이다. 이재순에게 작업실이나 전시장은 그자체로 이질적인 장소, 즉 탈주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정 반대의 이미지, 즉 상상의 감옥 같은 유폐의 느낌 또한 존재한다. 미로와 감옥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불안의 무대가 펼쳐진다. 오늘날 작가의 작업실이나 미술 전시장은 분명 사회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고립된 섬처럼 분리되고 격리되어 있다. 이재순은 현대미술이 당면한 부정적 배제를 긍정적 조직화로 변모시키려 한다.

칸막이 쳐진 현실에서 감각은 이성보다는 광기와 밀접하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말하듯이, 광기는 대상과 사유 간의 정합성이라는 낡은 진리 개념에서 벗어나, ‘감각과 신경섬유간의 공명’에 진입한다. 명확한 형태와 의미로 귀착되지 않는 섬유질 재료, 그리고 색실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이러한 공명을 추동한다. 한 가닥만으로는 그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 얇은 실의 형태는 명확히 가시화될 수 없는 섬세한 떨림을 전달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광기는 동물성, 질병, 죽음 등의 이미지와 밀접하다. 이재순의 작품에서는 인간 심지어는 식물 속에 있는 동물성이 발견되고, 암세포처럼 조직화되지 않고 집합을 이루는 덩어리들의 병적 증후가 보이며, 흐트러진 것들이 야기하는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 수수께끼 같은 실 더미와 실 뭉치들은 유기체적이지만,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정합적인 유기적 조직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원초적인 감각의 덩어리는 무의식의 환상을 보여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히스테리의 기원은 무의식의 환상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구체적인 현실을 환상화 된 현실로 변형시킨다. 이 맥락에서 작업실과 전시장은 일종의 히스테리화 된 세계가 된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극북형 히스테리’라고도 정의되는 샤머니즘의 색채 또한 덧붙일 수 있겠다. 여기에서 환상에 의해 추동되는 선적 움직임은 타자와 자신을 동여맨다. 이 히스테리화 된 세계에서 말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현실적 진실]에서 히스테리 담론은 가능한 줄거리 없이 고립된 채 부유하는, 이름붙일 수 없는 현실의 한 조각이라고 말한다. 이 현실의 한 광경은 언어의 영역을 황폐화시키고, 그것을 건드릴 수 없는 환각적인 희열 위에 고정시키면서, 언어를 차가운 재와 수수께끼적인 찌꺼기로 축소시킨다. 순수한 기표와 마주한 이 같은 주체의 파산이야 말로 대상없는 시각 속에서, 그리고 색상과 빛의 황홀경 속에서 소멸된다. 기표는 유일한 진실이자 육체이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우리는 기표의 진실, 즉 말에서처럼 육체에도 똑같이 실행된 분리성, 이타성, 그리고 죽음에 처한 진실을 볼 것이다.

이재순의 작품에서 육체를 이루는 수많은 내부기관들은 원칙 없이 늘어지거나 쌓여진 실 더미들로 표현되어 있다. 가느다란 섬유질 육체는 떨리고 흔들린다. 크리스테바는 광인이 찾는(말하려 하는) 것은 현진실(Vréel)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중성화시키기 위한 공통의 약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기-신비론-시처럼 판단(또는 문장)과 존재 속에서 진실의 문제를 새겨 넣는다. 환자는 자신의 착란적인 사고, 치명적이고 충동적인 확신을 진실이라고 간주한다. 정신병적인 것의 속에 드러나는 것은 동일성, 즉 존재나 존재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분리, 파기, 이동, 벌린 틈이다. 이 언어는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이다. 이상함의 기준은 바로 소외(alination)이다. 소외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alienus’, 즉 타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정당한 권리와 법, 이성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악과 죄, 비이성이 있다.

광기는 자신과 유지하고 있는 상상적인 관계이다.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경계를 이룰 뿐인 이재순의 실 더미와 실 뭉치는 과정중의 주체와 대상을 의미한다. 여러 색의 가닥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순도 또한 보장받지 못한다. 실은 그 자체보다는 무엇과 얽히고설키는 미디어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순수한 기표의 체계가 아니다. 이 언어는 항상 이질적인 요소, 즉 기호적 충동의 힘과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근본적인 분열, 즉 이질성, 그리고 그 과정의 필수적인 요소인 무의미성이 바로 의미의 조건이다. 의미는 결코 투명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하다. 명확한 형태와 자리가 정해지지 않은 이재순의 실 더미와 실 뭉치는 이러한 불투명성과 불안정성을 대변한다. 이렇게 생성된 작품 언어의 이질성은 존재의 야성적 소리를 들려준다. 또한 그것은 ‘의미화가 없는 기호적 육체의 충동에서 어떻게 의미화가 생겨나는가를 보여주는 점’(크리스테바)에서 예술이 된다. 이러한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의 진실과 만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