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은 창작의 산실이다. 작업실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다. 현실과는 다른 현실로 진입하기 위해,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열기 위해 작가는 감각적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작가는 꿈을 공 굴리는 몽상가가 되고, 사물을 변질시키는 연금술사가 되고, 세계를 수리하는 수선공이 된다. 이를 위해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요구되는데, 일종의 결핍의식이며 결여의식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핍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가 있는가. 니체는 쥐가 궁지에 몰리면 자기 내면으로 숨는다고 했다. 스스로를 세상의 변방으로 내모는 것, 그리고 그 변방 끝에서 어쩌면 진정한 자신일지도 모를 또 다른 자아(진아?)와 조우하는 것이다. 때로 그렇게 만나지는 자기가 낯설고 생경할 수도 있다. 내면이란 세상의 논리가 미치지 못하는 유일한 세계이며, 때론 주체에게 마저 낯선 미지의 세계이며, 사물과 현상의 의미가 결정되고 고쳐질 수 있는 무한하고 무궁한 가능성으로 열린 세계이며, 비결정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결핍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고, 그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 곧 감각적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자기 내면으로 숨어든 창작주체가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세계를 여는 계기를 얻는 것이다. 


 



 


남경민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연 작가들이 궁금하고 작업실이 궁금하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 속에 작가들을 초대하고 작업실을 불러들인다. 먼저 작가들의 작업실과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을 근거로 작업실을 재현하는데, 때론 사진과 같은 관련 아카이브가, 그리고 더러는 그림 속 이미지가 소스로서 주어진다. 이때 거장의 작업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는다. 대개는 부분적인 이미지와 전형적인 도상 내지 기호를 차용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거장의 작업실과 작가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상징 공간이 하나의 층위로서 포개진다. 그 포개짐은 너무나 긴밀한 것이어서 거장의 작업실과 작가의 관념공간이 구분되지가 않는다. 어쩌면 작업실과 작업실의 관계로서보다는 관념과 관념이 만나지는 경우, 이를테면 거장의 관념공간이 작가의 관념공간과 하나의 직물로 직조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직조된 공간은 엄밀하게 작가에게도 거장에게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어떤 장소와 공간으로 열린다. 그리고 그 제3의 장소며 공간이야말로, 그림이라는 지도 위에 그 지정학적 좌표를 표기하는 일이야말로 다름 아닌 남경민의 그림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이런 일련의 프로세스가 가다머의 지평융합을 떠올리게 한다. 즉 거장(타자)의 지평과 나(주체)의 지평이 하나로 융합되어져서 제3의 어떤 지평을 여는 것이며, 그렇게 열린 지평을 매개로 거장과 내가 서로 교류하는 상호영향사가 실행되는 것이며, 그렇게 거장이 내 인격의 일부로서 흡수되는 것이다. 


이 긴밀한 교류와 교환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거장들이 초대되는데, 세계의 기하학적 환원을 꿈꾼 세잔과 몬드리안, 벨벳 같은 부드러운 빛의 질감과 광학적인 빛으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베르메르와 모네, 주정주의와 파토스의 표상인 고흐, 긴 목과 슬픈 눈으로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모딜리아니, 신비주의와 상징주의의 거장 모로, 언어와 기호의 연금술을 매개로 개념미술을 예비한 마그리트, 팝과 동성애 코드가 결합된 호크니, 사사로운 트라우마를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혁명의 대척점에 등재시킨 프리다 칼로,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낙천주의자 마티스(그럼에도 그에게 붙여진 야수파라는 레테르는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허문 리히터가 각각 호출된다. 


그런데, 정작 그림 속에 그렇게 초대받은 거장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림 속엔 거장들도 없고 거장들을 초대한 주인(작가 자신)도 없다. 다만 테이블 주변으로 빈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거장들은 자신이 그린 벽에 걸린 그림과 함께 저마다의 전형적인 도상과 기호의 형태로 그림 속에 들어와 있고, 작가 자신은 N(남경민)이라는 영어 대문자의 경우로 그림에 출현한다. 엄밀하게는 그 마저도 그림 속이 아닌 제목에서 확인된다. 도상과 기호와 빈 의자를 거장과 동격으로 놓는 일종의 대위법과 생략화법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다. 생략하면 암시적인 공간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할 여력이 생기고, 오리무중인 의미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할 참여를 위한 구실이 생긴다. 거장들은 그렇다 치고 작가의 경우는 어떤가. 화면 속에 날라 다니는 나비들이 작가다. 나비가 된 작가는 시공간을 넘어 거장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거장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한다. 나비로 변신한 작가를 인정한다 해도 나비 자체는 왠지 비현실적이다. 나비의 날갯짓은 꿈꾸듯 나풀거리고, 흡사 현실 저편으로부터 현실 안쪽으로 건너온 비현실의 전령들 같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창문과 거울에 비친 반영상이 이런 비현실감을 더한다. 반영상은 회화의 기원과 관련이 깊고,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 이런 반영상을 끌어들여 일종의 회화적인 미로를 만든다. 거울이 창문에 비치고 창문이 바닥에 비치고 바닥이 거울에 비치는, 반영상이 다른 반영상을 재차 반영하는, 반영이 반영을 불러오는, 그렇게 반영의 반영이 끝도 없이 연이어질 것 같은 회화적인 미궁을 만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도대체 작가의 그림 속에서 반영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그려진 모티브가 있는가 싶다. 있다 해도 그 의미는 반영상의 의미 속에 묻힌다. 아예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간이며 모티브 전체가 반영상인 것도 같다. 당연하게도 반영상은 현실을 되비친 상이며 이미지일 뿐, 현실 자체도 현실의 재현도 아니다. 일부러 트릭을 쓴 것도 왜곡시킨 것도 아닌데, 그림 속 현실은 졸지에 현실감을 잃고 겉돈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 속을 나비들이 꿈꾸듯 나풀거린다. 어쩌면 그 비현실적인 공간은 작가의 관념공간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진즉에 실재하는 공간이 아닌 관념적인 공간을 그린 것이며, 관념적인 정황을 그린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향후 작가의 그림은 거장(타자)과 작가(주체)가 만나고,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고,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종의 가상놀이며 환영놀이를 향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