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곧잘 산에 오른다. 산에 오르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시각적인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에 집을 지었나 싶은 아찔한 새 둥지며, 아치를 이룬 나무 그늘과 그 그늘 사이로 설핏 보이는 조각난 하늘, 이름 모를 들풀들과 암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이 그린 그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게 산길을 오르다 보면 돌무더기 탑과 마주치기도 한다. 사람들이 오가며 보이는 대로 집히는 대로 저마다 돌멩이 하나씩을 주워 쌓아 만든 탑이다. 이렇다 할 조형을 의식하지 않고 만든 것인 만큼 무심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소원의 염을 담은 유심한 물건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비록 흔하게 볼 수 있는 정경은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촌락에서 겨울을 날 요량으로 나무를 패 동개동개 쌓아올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적당히 서늘하고 어스름한 그늘에 들어서면 나무와 나무를 사선으로 기대어 세워놓은 길게 연이어진 버섯 재배지를 볼 수 있고, 계곡 속에 숨은 둠벙의 물을 가두기 위해 둘러친 야트막한 돌무더기 담과도 맞닥트릴 수 있다. 


이 모두는 자연이 만든 형상들이며, 엄밀하게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합작품이며, 자연의 원형을 가급적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의 손길을 최소한으로만 개입시킨 무심하고 섬세한 형상들이다. 모르긴 해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이 미의식을 발휘한다거나 조형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그 형상들은 비록 자연에 속해 있어서 조형물로 호명되거나 등재되지 못한 것일 뿐, 실상은 조형물 이상의, 나아가 미처 조형물이 흉내 내지 못하는 미적 차원을 열어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작주체는 생리적으로 주변을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기웃거리는 감각 레이더에 포착된 지점들 가운데 자연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롤모델이며 영감의 원천일 수 있다. 첨단의 미디어 시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고,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매체가 무엇이든, 방법이 어떠하든 자연스럽다는 수사적 표현은 아직도 여전히 작업에 대한 최상의 호의며 덕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재효의 조각설치 20년사를 정리하는, 중간점검의 성격을 띠는 이번 전시의 주제가 <자연을 탐하다>이다. 작업에 대한 태도나 성향으로 볼 때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함축하고 대변해주는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자연을 탐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정작 그렇게 탐해진 자연을 탐나는 조형으로 옮겨놓는 작가들은 많지가 않다. 


그렇다면 자연을 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또한 그 의미를 어떻게 조형으로 옮길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선 우선 자연의 본성을 알아야하며, 자연의 생리에 자신의 생리를 맞추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실현해야 한다. 자연을 조형으로 옮겼을 때 그 조형 속에 여전히 자연이 원형 그대로 간직돼 있어야 하고, 그 조형이 자연의 본성을 상기하고 암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의 본성은 소멸이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이 자연의 순리이지만, 생성보다는 소멸 쪽이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때의 소멸은 생성을 위한 소멸이며, 생성을 전제로 한 소멸이다. 이 소멸을 인간의 논리로 풀면 일시성과 덧없음이다. 작업으로는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그 존재의 흔적이 최소한의 기록물과 아카이브 형태로 남겨진다. 예컨대 작가는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그렇게 발자국을 남기면서 눈밭에다 크고 작은 원형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형은 연신 내리는 눈에 덮이거나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처마 밑에 치렁치렁 매달린 고드름의 끝을 다듬어서 전체적으로 반원을 그린다(만든다?). 그 고드름 조형 역시 녹아서 없어질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자연에 대한 조형적인 개입 여부가 사후적이면서 최소한의 개념으로만 등재되는 일종의 개념미술을 실현하고 있다. 


더불어 작가는 배추라는 한글 꼴을 따라 배추를 심고 키운다. 그리고 그렇게 경작된 배추를 먹는다. 이때 작가가 실제로 먹은 것은 자연(배추)이며 개념(배추라는 한글 꼴)이다. 이때 배추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배추가 작가의 몸속에 등재되는 일종의 생태미술을 실현한 것이다. 자연의 본성을 따라 자연 위에 그린 일종의 자연 드로잉이며 대지미술을 실현한 것이다. 


이후 작가의 작업은 본격적인 조형단계며 실물단계로 넘어간다(엄밀하게는 넘어간다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조형이 더 이상 개념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물형태로 제안되는 것이다. 이 작업들은 재료 여하에 따라 돌 작업, 나무작업, 못 작업으로 분류되며, 각종 폐기된 물건들을 작업으로 되살려낸 일종의 오브제 드로잉에 해당하는 미니어처(에스키스)를 포괄한다. 작가의 작업을 두고 이처럼 돌 작업이나 나무작업, 그리고 못 작업으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한데, 그의 작업들은 재료를 조형화한 연후에도 재료 고유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목책(둥근 반원으로 설치된 나무작업)이나 은하수(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들을 흩뿌려놓은 듯한 못 작업) 같은 자연을 상기시키는 모티브를 조형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하학적인 형태, 특히 원 형상을 조형한다. 이를테면 수평이나 사선으로 길게 누운 원 기둥이나 원통 형태를 비롯한 정형의 원 형상들이다(물론 일부 근작에서 보듯 조약돌과 같은 자연에서 찾아낸 곡선을 도입한 비정형의 원이 있지만, 대개는). 


여하튼 형태에 있어서는 정형의 원 형상이 단연 지배적이다. 작가는 원 형상으로 거대한 나무 공을 만들고, 못 공을 만들고, 심지어 풀 공을 만든다. 이쯤 되면 원 형상에 작가가 각별한 애착을 갖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정작 작가 자신은 덤덤하다. 원 형상은 그저 군더더기가 없는 형상이며, 가급적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배재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형상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사실 작가의 반응은 결코 덤덤한 반응이 아닌 적극적인 표명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형상이란 최소한의 형상이며, 최소한의 형상 속에 사실상 모든 것을 담아낸 형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형상이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사람들의 공감이 맞춰진 조형의 의미론적 지점은 무엇인가. 아마도 원과 관련한 상징적 좌표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원은 맺힌 데가 없이 닫힌 체계로 인해 완전한 형상을 의미하며, 생성과 순환이 하나로 물려있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상징하며, 작가의 말처럼 군더더기 없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암시하고 상기시키는)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원형적 형상이며, 존재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런 원 형상은 파장과 파동을 테마로 한 일련의 다른 작업들로 변주된다. 일부의 못 작업과 더불어 특히 강돌을 재배치하고 재구성한 근작을 보면, 일정한 패턴을 그리면서 파장과 파동이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그리고 재차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의 운동성을, 기의 흐름과 항상성을 암시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자연에서 취한 재료 자체도 그렇지만, 대개 거대한 스케일로 인해 무거울 것 같은데, 적어도 시각적으로 전혀 무겁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더욱이 상당한 작업들이 공중에 매달려 있어서 부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나아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벼운 인상마저 든다. 자연의 물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의 조형이 공중에 부유하듯 가볍게 느껴지도록 만든다는 점이야말로 남다른 감각의 결과이며, 작가의 설치작업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호응하는 이유일 것이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본격적인 조형물 이상으로 중요한 작업이 일명 오브제 드로잉으로 범주화할 만한 일련의 미니어처 작업들이다. 에스키스 전체가 전시된 경우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인 것 같고, 아마도 미술관이기에 가능한, 미술관 전시의 특성을 반영한 바람직한 사례라는 생각이다. 


그 면면들을 보면, 두꺼운 책 속을 파내 조각한 산수, 수건을 기워 만든 물고기, 낡은 면장갑으로 만든 소머리, 녹슨 부탄가스 통으로 만든 강아지, 베어링으로 만든 악어를 비롯해 담배꽁초와 연필, 못과 핀, 심지어 성냥개비와 이쑤시개로 만든 조형물들이다. 한마디로 용도 폐기된 사물들이나 일상의 잡다한 기물들이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생되는데, 죽은 사물에 혼을 불어 넣는 연금술사가 연상된다. 이로써 이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의 상상력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하고, 어느덧 놀이와 작업의 경계가 지워진 경지에 이른 작가의 생활감정을 엿보게 하고, 작업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태도를 감지케 한다. 


이재효는 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산에서 살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산은 자연스레 체화된 자신의 일부인 것 같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원천이며 모태와도 같은 것일 터이다. 이처럼 산이 키워준 감성을 바탕으로 그는 첨단의 미디어 시대에 작정하고 역행이라도 하듯 오히려 철저하게 아날로그적인 과정과 방법으로 작업을 풀어낸다. 노동집약적이지만, 그렇다고 사물의 물성을 변형시키거나 변질시켜 인위적인 어떤 형상을 만들지도 않는다. 자연을 지향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정작 작업이 자연의 품성을 상기시키는 작가들은 많지가 않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자연을 왜곡시키지 않는다. 작가가 자연에 개입하는 정도는 다만 이를 통해 숨겨진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에 머문다. 이로써 종래에는 아예 작업과 자연 자체와의 구별마저 무색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