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영
#8309
리경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
‘more Light’라는 전시부제는 일견, 중세의 어둠을 좀 더 많은 빛으로 물리쳐주기를 원했던 계몽주의자의 메시지 같다. 역사상의 계몽주의가 이전시대의 미몽과 맹목을 벗어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게 하는 시각성의 시대를 열었다면, 리경의 ‘계몽’은 그러한 물질주의와는 정 반대이다. 전시장은 몇몇 작은 기계 장치를 빼곤 아무 것도 없다. 거대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소리, 빛, 연기 같은 비물질적인 것들이다. 텅 비워지다시피 한 공간 속에 관객은 던져지고, 작가가 연출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리경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 준토목공사 급의 공간변용을 피하지 않았다. 국내외 미술관에서 열려왔던 대표작들이 그랬듯이, 그만큼의 큰 스케일과 그만큼의 헌신이 투여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처음 보는 작품 [more Light](2012)는 수직으로 평행하게 배열된 거울과 유리들로 만든 정 십자형 공간으로, 말단에서 발사된 레이저 빛의 각이 유리 두께에 따라 미세하게 틀어지면서 면들이 만들어진다.
무수히 엇겨지는 빛의 효과 속에서 관객의 온몸은 빛의 단면들로 얼룩지며, 스스로가 빛으로 에워싸인 움직이는 검은 실루엣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온몸에 구멍을 낼 듯한 강한 빛에 실체는 비워지고 그림자처럼 변한다. 난반사의 공간이지만 거울의 방은 아니다. 심리학에서 거울은 주체를 자아로 안정화시키는 장치로 간주된다. 분열과 분리를 가짜로 통합시키는 이 가상의 장은 경직된 구조가 되어, 주체를 에워싸고 소외시키곤 한다. 사회의 요구가 관철되어 있는 이 구조는 환영의 덫을 만든다. 거울은 상상 속의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자아의 감옥에 갇히게 한다. 리경은 관객을 거울 앞이 아니라, 그 안으로 밀어 넣는다. 거울 앞에서 자아는 상상적 양식을 구축하지만, 거울 안에서는 환영의 안정된 형식이 깨진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는 빛과 상호작용하면서 매순간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변화된 분신 또는 짝패이다.
빛과 반사면은 거울의 방 같은 무한 복제가 아니라, 소멸을 야기한다. 빛은 실체의 외면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지우고 비워낸다. 거울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틈은 작가에 의해 재배치되었다. 틈은 더 벌려졌고, 거울 자체에 내재된 소외와 해체의 국면은 메아리처럼 확장된다. 가상을 만들어내는 거울의 메커니즘을 역이용한 한 술 더 뜨기 전략은 공간 속 주체를 소외로부터 소외시키며 해체를 해체시킨다. 그리하여 관객이 거울 안에서 보는 것은 빛의 매트릭스 속에 마주한 주체의 실체이다. [more Light]는 존재를 꽉 움켜잡는 구조이자 누군가의 내부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그러나 초록빛 광원이 반사되어 만들어낸 공간은 희망적이지만, 정반대의 것으로 전화하기도 한다. 빛이 사회의 구조라는 상징으로 변모할 때가 그러하다.
그것은 판옵티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선과 빛이 상호 작용하는 공간을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로 확장시켰던 이전 작품 [Panopticon Play](2009년)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감시하고 감시되는 촘촘한 빛과 시선의 그물망 속에서 지배적 권력은 자동적으로 실행되곤 한다. 작품 [more Light]에서 추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시스템은 주체를 사정없이 관통하고, 주체를 하나의 코드로 무화시킨다. 어디선가 스며든 연기 때문에 빛은 미세한 연기 입자들이 춤 추는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것으로 변화한다. 고대 유물론자들이 덧문이 열린 창의 빛 속에 떠도는 먼지 입자들을 통해 원자론을 생각해 냈듯이, 물질은 섭리 없이 운동한다. 빛은 물질적 형상을 갖추면서 관통이나 유폐의 느낌을 준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상징적인 구조를 이룬다. 세상에 예정된 조화처럼 정교한 장치에 의해 작동되는 빛은 신 같은 절대적 타자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구조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각과 위치에 따라 정반대의 것으로도 변모할 수 있는 상징적 구조인 것이다. 언어나 사회제도 같은 상징적 구조는 동물을 인간으로 만들지만, 인간을 인간 안에만 얽매이게도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 이성, 진보, 역사처럼 그자체가 문제시되는 역사적 개념이다.
무의식으로 하강하듯,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간 관객은 여러 두께의 가느다란 레이저 광선과 연기로 만들어진 보이는/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 진입하게 된다. 거대한 호수 위의 운무처럼 어디가 벽이고 바닥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연속적인 텅 빈 공간, 그것을 채우는 연기와 정신을 멍하게 하는 소리는 불안감을 자아낸다. 작품 [I am telling a lie](2012)는 어디에서 무엇을 볼지 알 수 없어 난감한 관객 앞에 비상등처럼 붉은 레이저가 보인다. 빛은 천천히 브라운 운동을 하는 연기의 벽을 만든다. 공간을 가득 채운 서로 다른 밀도(무게)의 연기는 빛과 만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면으로 보인다. 면이지만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기에 견고한 벽보다는 융통성 있는 생체 막(membrane)같은 구조이다. 광원과 직선이 되는 지점에 설 때 그 벽은 좁은 길이 되어 계단을 향하게 한다.
또 다른 방에서 강한 빛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관객은 등을 돌려야만 벽에 투사된 계단들을 볼 수 있다. 그 곳은 회심(回心) 같은 종교적 경험처럼 극적 방향전환을 통한 깨달음의 공간이다. 계단들은 무의미한 텅 빈 공간 대신에 전 우주를 가득 채우는 단계별 상승의 이미지이며, 성스러운 존재의 사다리처럼 보인다. 최고 높이가 8미터가 되는 공간 천정에 젤라틴을 앞에 댄 렌즈는 다이아몬드처럼 각을 많이 내어 복잡한 반사면을 형성한다. 직선의 레이저와 달리, 이 빛은 경우 분산되고 분열되어 있다. 단일한 것의 기원인 빛을 쪼개고 흩어뜨림으로서 빛을 통한 이산(離散)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형태가 아니라 공간을 상대로 하는 리경의 작품에서, 공간 속의 위치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열린 구조를 이룬다. 리경은 작품을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싸움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주의에 역행하는 몸짓이다. 소소한 아이디어를 거대하게 물질화하여 스펙터클하게 공간을 장악해 가는 노동의 방식이 미술계에도 만연함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속에 들어가서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이 전시의 작품들의 면면은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 예시하는 듯하다. 비어있음을 가득 채우는 영기(aura), 거대한 스케일 속에서 좌표를 교란시키는 숭고함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투사한다. 리경에게 미술가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이’다. 제도 종교의 도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신앙--그것은 예술에 대한 헌신과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은 작품의 면면에 스며있다. 특히 작가가 깊이 공감하는 것은 [창세기]이다 ‘빛이 있으라...’로 시작되는 창조의 6일은 가장 숭고하면서도 예술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는 예술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낭만주의에서 강하게 부각되었던 신과도 같은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상이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불온한 것일까? 반대로 신은 예술가가 아닐까?
리경에게 중요한 것은 ‘genesis’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처럼, 창조에 대한 기존 종교적 도상의 재현이 아닌 생성의 문제이다. 현실 속의 제도 종교와는 일치하지만은 않은 독실한 신앙은 오랫동안 작품의 기준치가 되었다. 리경의 작업은 절대적 실재에 대한 영혼의 체험을 재현이 아닌 생성으로, 닫힌 구조가 아닌 열린 구조로 표현하는 여정이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삶이 진정한 신앙과 거리가 있는 만큼이나 예술과도 그렇다. 스펙터클의 시대가 오히려 미술의 힘을 약화시킨 것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몰두하는 삶은 지상에 땅을 딛고 사는 인간에게 위협적이며 정신의 병을 낳기도 한다. 작업이란 영혼의 병과 싸우는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은 만물의 근원인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신실함처럼, 때로는 그것으로부터 등 돌리는 위반의 사건들로 채워진다.

필자가 처음 리경의 작품을 본 것은 2002년 성곡 미술관에서 이윰과 함께 기획한 [금단의 열매] 전이었다. 여기에서 리경은 방 하나를 밝은 광원으로만 채움으로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표현했다. 신이 정한 금기를 어긴 인간은 벌과 함께 금지된 지식을 알게 된다. 분리불가능한 선과 악처럼 지식은 양날의 칼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오징어잡이 배의 빛은 너무 강해서 관객의 위치를 상실하게 한다.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의 강한 빛은 모든 경계를 소멸시키면서 보여 진 것에 대한 철저한 회의를 표현했다. 창세기의 신은 자신의 계명을 어긴 아담에게 ‘where are you?’라고 묻는다. 동양화의 여백같이 하얀 공간은 이 전시의 작품처럼 자신이 서있는 자리의 좌표를 불확실하게 한다. 시각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 한 지식의 세계는 맹목(盲目)적이다. 근대에 더욱 강화된 시각중심주의는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하며 명료함과 전문성, 그리고 생산성을 낳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감각만을 절대시한다.
리경의 하얀 방은 지배적 시선에 의해 타자화 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지식의 의무를 일깨운다. 완벽한 공간 연출을 위해 수천만 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의 전시작품 [보는 대로 믿는 것과 믿는 만큼 보여 지는 것에 대해](2003/2004년) 역시 텅 빈 공간과 빛을 통해 근대 이후 지배적 감각이 된 시각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2004년 광주 비엔날레에서의 작품 [You are mine]도 그랬고, 거대한 공간을 활용한 구조적 작품들은 계산의 요소가 필수적이고, 심장보다는 뇌에만 호소해왔다는 자기반성을 일깨우게 된다. 피에타, 실낙원, 희생양 같은 소재나 주제를 다룬 이후의 작업들은 심장에 의지하고 심장을 겨냥하였으며, 선과 악, 실재와 부재, 성스러움과 불경함, 삶과 죽음을 교차시키는 미묘한 경계선 상에서 움직여 왔다. 이번 전시 역시 조그만 차이로 만들어지는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여전하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more Light’ 전에서도 빛은 드라마틱한 무대를 연출하는 요소이다. 여기에서 빛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시선의 조력자이다. 그것은 한끝 차이로 따뜻한 보호의 공간을 숨 막히는 감옥으로 만들고, 자유를 향한 진리의 길을 낭떠러지로 만들며, 전능을 맹목으로 만들기도 한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의 원형은 창세기의 빛으로, 절대적 진리를 담지 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그러나 빛은 세상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수많은 두께와 각도를 가지는 이 전시의 빛줄기처럼 무엇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빛의 드라마는 다르게 펼쳐진다. 여기 에서 빛은 자신과 세상을 은유하는 상징적 구조이며, 구조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무 밝아서 길을 잃게 하는 빛, 빛에 등 돌리는 배반을 통해서 믿음을 되찾는 역설, 존재를 갈갈이 찢어버리는 산란하는 빛 등이 그 예이다.
모든 것을 명약관화하게 비추는 빛은 그 반대의 미심쩍은 검은 덩어리를 생각하게 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작용하듯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펼치는 명쾌한 빛의 공간은 깊은 우울로부터 나왔다. 코스모스의 산실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인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를 정신적인 위기로 몰고 갔던 심각한 영혼의 병과 정공법으로 대면함으로서 만들어진 승리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값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새로운 영혼의 병]에서 우울증은 사회의 지배적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상징계의 부정이라고 본다. 상징계는 가부장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모순을 심화시켰다. 현실의 종교를 비롯한 사회의 지배적 구조는 영혼의 병을 낳는다. 작가라는 존재는 지배적 상징 언어가 아닌 대안의 언어를 통해 속의 응어리를 풀어낸다. 자기 내부에 똬리 틀고 있는 본원적 언어는 해독하거나 소통하기 힘들지만, 무한과의 만남을 위해 공포스러운 지점까지 밀고나감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된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기력마저도, 살고 싶은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의사소통 불능의 고통을 말한다. 멜랑콜리의 의미는 자신을 의미하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삶을 상실하는 심층 고뇌이다. 그것은 상궤를 벗어난 감정 상태이다. 고통은 재현할 수 없음, 또는 상징적 체계와 양립할 수 없음에서 온다. 리경의 작품은 기존 언어의 회로를 통하지 않는 대안의 화법으로서의 예술을 증거하며, 기존 언어가 붕괴되는 폐허 속에서 새로이 건립된 우주이다. 우울증 환자의 모호하고 무기력한 침묵은 예술가의 명료하고 충만한 침묵으로 전화되었다. 빛으로 건립된 주체의 장 속에서 관객 또한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리경의 작품은 빛과 직선 등으로 이루어졌지만 기하학적 추상은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고 있지만 개념적이지는 않다. 자신으로부터 꺼내지는 이야기가 곧 공간으로 구조화되는 작품에서 언어의 이면에 존재하는 실재가 감지된다. 실재라는 심연 속에서 구축되는 작품은 구체적이다. 리경의 작품에서 실재는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녀에게 실재는 단순히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현실이라면 가능한 현실이어야 할 것이다. ‘가능성과 현실성은 신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러브조이)이다. 종교학자 요아힘 바하는 [비교 종교학]에서 종교경험의 첫 번째 기준은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궁극적 실재란 모든 것을 조건지우며, 꽉 묶는 것,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도전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장엄하고 위협적이고 압도적이고 사랑이 있는 존재, 즉 신적 실재’(니니안 스마트)이다. ‘무한자가 멀리 떨어진 비전이기를 그만두고 현존하는 실재가 되었다는 것’(윌리엄 제임스)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을 이룬다.
‘실재는 불가능한 것’(라깡)으로 정의되지만, 작가란 존재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심리학자처럼 파악 될 수 없는 실재를 경험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라깡의 학설에 의하면, 주체 외부에 놓여있는 실재계는 가장 포착하기 힘든 것으로,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의 영역이다. 그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 바깥에 있는 영토를 끌어들이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는 삶과 죽음, 이성과 광기를 어느 순간보다도 근접하게 한다. 좌표를 확인 할 수 없는 텅 빈 공간, 그리고 희미한 연기를 가로지르는 빛과의 만남은 주체와 객체 모두를 사라지게 한다. 연기처럼 편재(omnipresence)하는 것과 하나 되는 현존의 체험을 야기하는 장(場)이다.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 또는 기적은 사라짐을 통한 나타남의 현상이다.
그것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자기 자리를 잡은 듯 투명하게 다가오는 순간, 무엇인가 시작되는 현존의 순간이다. 그것은 절대적 타자 속에서 분명해지는 동일자의 모습이다. 작가는 상승하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빛줄기와 하나가 되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것은 원근법의 무한 소실점이 다름 아닌 신의 자리임을 예시한다. 그 맞은편에 인간이 있다. 자리에서 신성한 빛으로 나온 빛살은 그 원천으로 회귀한다. 빛은 우주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상징으로, 빛으로의 회귀는 우주와 하나 되는 궁극적인 여로이다. 그것은 근원에 대한 향수이며, 무한한 실재 그자체로의 복귀이다. 분리되어 있던 것의 충만한 만남, 모든 것이 이어져 있는 신성한 존재의 연쇄나 존재의 사다리와 같은 신학적 사고는 기성의 종교적 도상에 의존하지 않고 구현된다.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주는 공포는 충만과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 고리를 하나하나 발견하는 과정에 의해 극복된다.
출전; 코리아나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