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김철성의 [Decorum] 시리즈는 거의 텅 비어 있는 듯이 보이는 하얀 공간에 놓인 돌들의 배치와 간간히 곁들여진 작은 동식물들이 구성상의 변주를 보여준다. 돌의 크기에 따라 여백은 상대적으로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어떤 형태의 배경을 넘어서, 무한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이다. 그림의 틀은 모두 하얀 색으로 되어 있어, 작품으로 구현된 세계는 캔버스 밖까지 확장되려 한다.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운 모난 구석이 없는 돌들은 그것들이 강가의 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얀 공백 속에 박혀 있는 돌은 강한 존재감을 일깨워 주며, 아래로 반영된 이미지는 자기 반성적인 의미가 있다. 돌은 빛을 가득 머금어 거의 공백처럼 보이는 물과 더불어 있다. 김철성에게 오랜 시간 물에 의해 연마된 강가의 돌은 주체의 상징이며, 공백으로 보이는 물은 신의 상징이다. ‘Decorum’이라는 제목 자체가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어울림’을 의미하며, 이러한 어울림은 가족, 사회, 공동체로 이어진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신-인간-자연이라는 계층적 위계질서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전래된 종교의 상징적 도상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구별될 수 있는 여러 범주의 어울림을 총괄하는 자연스러운 매개물이다.



2010년에 그려진 가장 최근의 [Decorum]에서는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내부 풍경이 장면의 원경 부분에 병치되어 있기도 하다. 거기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자연주의를 넘어서, 안과 밖을 동시에 투시하려 하려는 이중적 관점이 있다. [Decorum] 시리즈가 시작된 계기는 일련의 계시와 관련된다. 어느 날 냇가를 보는데 물빛이 하얗게 변모하면서, 그것이 신의 공간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하얀 공간에 놓인 돌은 존재를 떠오르게 했다. 빛으로 변모한 광대한 공간에 놓인 돌은 자신의 흉허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왜소한 존재이면서도, 신의 무한함에 감싸인 축복받은 존재로 부각된다. 둥근 돌에 내재된 부드러움과 단단함은 강물이라는 구상적 요소를 제거한 비물질화 된 공백 속에서 자리매김 된다. 작가는 하얀 여백에서 ‘깨끗함의 상징’과 ‘흠이 없는 절대자(신)의 속성’을 본다. 그리고 돌로서 나타나는 ‘인간의 불완전함은 그자체로서 신 앞에 설 때 여실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신이 생겨난 이력을 주름진 표피 위에 새긴 돌이 유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수 십 번 안료를 칠하고 사포로 갈아내기를 반복하여 만들어진 미끈한 공백은 평화, 순수, 무한 같이 명료하게 표현될 수 없는 숭고한 가치와 관련된다. 작가는 하얀 표면이 미끈해졌을 때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채로 두고 싶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머물렀다 지나가며’, ‘붓을 대는 순간 모든 이야기들은 사라지고 축소되기’ 때문이다.





2000년까지 현장 사생을 십 수 년 간 계속해왔던 김철성의 작품이 종교적 상징성이 풍부한 이미지의 조합으로 변모한 계기는, 2000년대 초반에 앓은 허리 디스크 때문이다. 이 병은 사생은 커녕 작업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 절망적 상황을 몰고 왔으나, 종교의 힘을 통해 개인에게 닥쳐온 고난을 또 다른 돌파구로 전환시켰다. 그의 종교적 비전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 작품은 2000년대 초반의 [생수의 강] 시리즈이다. 반구상의 형식을 띤 이 시리즈는 ‘객관적 시야 너머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담아내고자’ 한 작품이다. 2003년의 작품 [생수의 강]은 뒤에서 빛이 투영되는 듯하고 윤곽이 흐릿하고 모든 것이 붕 떠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화면에 내재된 따스한 기운은 붉은 색 계열의 색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다른 [생수의 강]은 전경과 화면 가장자리에 포진한 녹색 조의 식물성 이미지가 넘치는 생명력을 전달한다. 2002년의 작품 [생수의 강-church](2002)에는 특정할 수 없는 색채-형태들이 부유하는 가운데, 하얀색 교회 건축의 이미지와 하트 모양이 선명하다. [생수의 강] 시리즈에 나타나는 따뜻함과 생명력은 고난의 와중에서 신의 사랑을 확인했던 작가의 종교적 경험이 드러나 있다. 그는 예배나 기도를 할 때 어떤 상이 맺히거나 지나간다고 말한다.

김철성의 작품에 가득한 종교적 파토스는 예술작품의 강력한 동기 중의 하나를 예시해준다. 종교인들은 종종 종교적 경험을 하지만, 예술가이자 종교인에게 그 경험은 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며, 보다 적절하고 절묘한 표현의 언어를 찾아 보편적으로 소통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문헌에 적혀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역사적 도상으로 굳어진 상징주의를 벗어나 종교적 체험 그 자체를 예술적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종교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종교적 예술을 낳는 것도 아니다. 종교의 대상 자체가 타자, 그것도 결코 주체가 합리화나 승화를 통해서 자기화 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 대상처럼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물리적 공간에는 신을 위한 자리가 없듯이, 형이상학적인 공간에는 물리적 인과법칙이 지배하지 않는다. 절대적 타자를 대한 탐구한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종교라는 형이상학적 사건에 대해, ‘거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가까움’, ‘주어진 사실보다 더 값진 가까움’, ‘자기의식보다 더 좋은 동등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충성’ 등을 들며, 이것이 종교의 난점이자 숭고함이라고 정의한다.

종교는 절대적 타자에 대한 욕망에 관련된 현상이며, 이 욕망은 형이상적 욕망이다. 김철성의 작품에서 강가의 돌로 상징되는 존재를 유형, 무형의 좌표에 위치시키는 공백은 무엇으로도 환원하기 힘든 신성하고 무한한 타자의 존재를 예시한다. 무한은 오직 부정의 용어로만 표현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으로 표현해 왔다. 그것은 신에 비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신을 알려는 노력은 ‘신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을 통해서만 접근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김철성의 작품에서 빈 공백은 불가지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계시와 신비의 장이 된다. 그것은 한계를 가지는 언어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한 직관과 관련된다. 인간과 거리를 둔 완전히 낯선 타자,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으로서의 타자는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무한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신뿐만 아니라, 인간들과의 소통을 꾀하는 예술가에게 절대적 외재성으로서의 타자가 가지는 충만함은 동시에 난감함일 수 있다. 타자의 절대적 외재성은 타자를 동일자로 쉽게 복속시키는 것 못지않은 맹목성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종교적 세계관이 급변했던 근대의 여명기에 파스칼이 느꼈던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인간을 불안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침묵의 공간에 놓인 존재인 돌덩이는 어떤 의미도 없이 다만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세속적 세계를 채우는 수많은 대상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만약 김철성의 작품이 단지 극사실주의 어법으로 표현되었다면, 그러한 냉랭한 무의미성이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가지는 사실주의적 외양은 오랜 사생의 경험에서 온 결과이지, 실증적이거나 즉물적인 대상의 복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화가로서 손에 새겨진 기억과 종교적 상징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다. 거기에 내재하는 타자는 한계 지워진 내용과 형식에 충실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한계 없음의 재현’(칸트)이라는 숭고와 관련된다. 동시에 공백과 더불어 나타나는 자연적 도상은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설정된 무한대의 거리감을 단축시키려는 노력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풀 몇 가닥, 개구리나 잠자리 등은 존재들 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망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자가 타자 속에 흡수되는 무아경이나 타자를 동일자로 귀속시키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없는 관계, 채울 수 없는 욕망, 또는 무한자의 가까움’ (레비나스)을 말하고 있다. 유아론적인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 타자성 안에서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 자신이면서 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종교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