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신구상주의 회화와 자유구상 - 구상적 표현의 복권과 절대 자유의 구현 신구상주의 회화의 기원은 1961년과 62년 프랑스의 마티아 펠스 화랑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전시된 「누벨 피규라시옹」 전에 소급된다. 그리고 자유구상은 1980년대 프랑스의 현대 회화의 경향을 말한다. 이들 두 양식은 시차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성격을 달리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신구상주의 회화란 대략 구상에로의 복귀와 특정 주제의 도입, 그리고 예술가의 개성적 표현으로 귀결된다. 사실상 이러한 특징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회화로 대변되는 추상적 형식과 정식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회화의 주된 표현양식이랄 수 있는 추상은 대상의 외양 저편에 존재하는 불가시적 본질을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도그마 내부로부터 추구해 왔다. 심지어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도그마는 예술 작품의 실제적 생산자인 예술가의 개성마저 배제하는 것이었다. 사물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절대 본질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예술가의 개성이란 단지 장애물일 뿐이었다. 이렇듯이 불가시적인 사물의 본질에 비하면, 사물의 외양이란 외부적 조건 여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마디로 의구심의 대상이었다. 신구상주의와 자유구상으로 대변되는 프리 페인터는 추상회화 특유의 객관성과 본질의 추구가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장으로부터 인간과 실제하는 삶의 현실을 몰아냄으로써 세계를 건조하고 삭막한 것으로 변질시키지는 않았는지 의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보상받으려는 듯 다시 인간과 삶의 현실로 회귀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회귀가 리얼리즘적 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태도는 차라리 니체의 생철학에 가깝다. 프리 페인터와 리얼리스트의 공통분모는 단지 인간과 현실에 주목한다는 사실뿐이다. 리얼리스트가 전형이나,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아비투스 등의 개념이 보여주듯이 개인적 실존보다는 객관적 현실과 그 변혁에 주목하고 있음에 반해, 프리 페인터는 이러한 리얼리스트 특유의 이념적 짐을 지지 않는다. 그는 일체의 도그마 외부에 있다. 추상의 도그마인 예술의 자율성과 리얼리즘의 도그마인 이념의 외부에 있다. 그는 예술의 자율성에 의해 도외시된 예술가의 창조적 개성과 공통 선의 구현이라는 미명으로 추방당한 주관적 표현의 복권을 꿈꾼다. 굳이 그 근사한 형식을 찾는다면 프리 페인터의 관념은 아마도 무정부주의와 나르시시즘에 흡사할 것이다. 주술이랄지, 감상이랄지, 이념 등의 자기 외적 목적을 지향하는 일체의 제도적 틀과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대신 철저한 주관으로 회귀하는 태도가 그렇다. 주관으로의 회귀는 관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회화적 형식 역시 개인적인 유희 혹은 놀이의 표현에 머문다. 그 회화적 표현은 흔히 케이스 헤링과 크래쉬의 낙서 회화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프레이가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 것에도 반영된다. 이렇듯이 프리라는 말은 이념과 표현 모두를 지시한다. 한편, 구상으로의 회귀는 프랑스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다. 그 경향이 프랑스에서는 신구상주의와 자유구상으로, 독일에서는 신표현주의로,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로, 미국에서는 낙서회화(그라피티즘)로 표현된다. 이들 양식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리즘을 구현한 점이 특징이다. 특히 자유구상과 낙서 회화 특유의 프리 페인팅적인 태도는 말 그대로 프리에 어울릴만한 것으로서, 일체의 예술적 관념과 도그마, 그리고 가치관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미화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라피티즘의 대표적인 두 화가인 케이스 헤링과 장 미셀 바스키아가 약물 복용과 문란한 성 생활로 요절한 것이 이러한 프리의 궁극적 실현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한마디로 구상적 형식으로서의 프리 페인팅이란, 일단은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는 회화를 말한다. 그 작화 태도에는 외부적 규율로 작용할 만한 어떠한 도그마도, 원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의 선입견을 넘어 새로운 논리를 창조하는 태도를 말한다. 감각의 선입견을 넘어 새로운 감각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논리와 감각의 이항 대립과 차별성이라는 선입견을 넘어 논리와 감각의 무차별적인 뒤섞임을 말한다. 12. 개념미술 - 아이디어가 곧 미술이다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정의는 대략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관장인 카트린느 미예의 “미술을 생각 혹은 개념 자체로 환원하는 태도”로 귀결된다. 이전의 미술이 실재하는 대상을 모사 혹은 재현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내면세계를 표상 혹은 상징하거나, 정념이나 기분을 표현하거나, 어떤 이념을 반영한 것이라면, 개념미술은 미술이라는 현상 자체에, 개념 자체에 주목한다. 개념미술은 종전 미술의 키워드랄 수 있는 재현과 상징, 표현과 반영을 무의식적인 과정이 아닌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대상으로 다룬다. 개념미술은 미술이라는 특정 메커니즘 속에서 재현과 상징, 표현과 반영이라는 개념과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는다. 한마디로 개념미술은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와 미술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 혹은 예술계를 대상으로 한다. 이렇듯이 미술이라는 특정 개념 혹은 현상 자체를 문제시하고 그것에 주목하는 태도는 전례가 없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사실에 개념미술의 의의가 있다. 그 성격상 미술비평 혹은 예술이론 혹은 미학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으며, 실제로 개념미술 이후 미술비평과 예술이론, 그리고 미학의 의미범주가 더 풍부해지고 미세화한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개념미술은 종전의 미술이 예술작품의 창작과 그것에 대한 비평 및 이론이 엄격히 구분되어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작품의 창작 혹은 제시 자체가 동시에 비평이기도 한, 예컨대 미술 혹은 미술계 혹은 예술계에 대한 비평이기도 한 독특한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개념미술의 기원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대한 관념과 이어진다. 예컨대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작품이랄 수 있는 「샘」에서 마르셀 뒤샹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샘」을 통해 가시화된 예술작품으로서의 조형적 형상 혹은 미적 가치라기보다는 그 작품의 제시가 기존의 미술계 혹은 예술계 혹은 제도권에 초래할 수 있는 관념상의 파문과 파장이다. 즉 「샘」의 진정한 미학적 가치는 그것이 예술가의 개성과 창조를 고스란히 담지하고 있는 작품으로서보다는 일상으로부터 특정의 레디메이드를 취한 예술가의 선택과 그것을 화랑이라는 공간에 옮겨다 놓음으로써 레디메이드가 예술작품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예술가의 태도에 있다. 이때 예술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관념이며, 「샘」의 형상을 통해 가시화된 조형물은 뒤샹의 관념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 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이 개념미술에서 작품은 예술가의 관념이 초래할 수 있는 파문과 파장이며(흔히 새로운 담론으로 귀결되는), 가시화된 형상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자, 과정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 예술작품에 대한 물질적인 태도와 접근을, 한마디로 소유권 개념을 뿌리로부터 흔들어 놓게 된다. 왜냐하면 개념미술에서 작품은 예술가의 관념이지 가시화된 물질적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미술을 작품으로서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예술가의 관념이 머물거나 지나간 단서 혹은 흔적이 된다. 예컨대 특정의 건축물이나 자연을 포장하는 크리스토의 경우에서, 가시화된 형상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 엄청난 규모는 차치하고라도 대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포장은 해체되고 원래 상태로 되돌려지기 때문이다. 대신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밑그림 혹은 청사진이랄 수 있는 에스키스 혹은 그것을 번안한 판화를 소유할 수 있다. 이렇듯이 개념미술은 예술작품에 대한 변화된 소유권 개념을 요구한다. 엄밀하게 말해 이때의 소유란 적극적인 의미이기보다는 우회적인, 소극적인 의미에 머문다. 한마디로 개념미술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소유권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개념미술의 대표작가랄 수 있는 조제프 코주드의 작품을 살펴보자. 그는 1965년에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들」과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망치들」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각기 실재하는 의자와 망치, 의자와 망치를 찍은 사진, 의자와 망치를 뜻풀이한 사전의 정의를 동어반복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예술작품 혹은 그 표현이란 결국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여타의 기호가 그렇듯이 기호란 그것이 읽혀지는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1967년에는 사전에 나타난 예술의 정의를 확대 복사한 「아이디어로서의 예술」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서 코주드는 개념미술에 가장 근사한 말이 곧 ‘아이디어 미술’ 임을 밝히고 있다. 이때 아이디어란, 말 그대로 예술가의 관념 혹은 개념 자체가 된다. 13. 미니멀리즘 -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90년대 초, 한 사건이 미술계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근래에는 국내 유명 화랑들의 연이은 기획 탓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면모가 우리 화단에도 그다지 생경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이 국내의 상업 화랑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이전이었다. 당시 미니멀리즘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한 화랑이 도널드 저드의 작품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관세 여부로 세관측과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마치 공산품을 연상시키는 재료와 외관, 그리고 주문제작에 의한 ‘사출된 알루미늄’이라는 생산 과정이 어느 모로 보나 공산품이지, 예술작품으로는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비가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공산품의 생산과정과 미니멀리즘 조각가인 도널드 저드의 예술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저드의 생각은 작품으로부터 작가의 주관적인 개성과 감각을 최대한 배제시킴으로써 익명적인 존재를 갖는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저드에 의하면, 그 물건은 공산품과 예술작품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다. 즉 공산품의 생산과정과 외관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품이 요구하는 기능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산품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인 셈이다. 모든 예술작품이 원래 일상 속의 용도와는 거리가 먼 사물을 생산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저드의 이런 생각은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으로 공산품과 예술작품의 중간에 위치하는 사물의 생산이란, 예술작품 특유의 애매모호함을 획득하기 위한 저드의 의도된 전략이기도 하다. 이렇듯이 미니멀리즘은 예술작품이 기능성은 물론이고 일상 혹은 사회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한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일테면 회화에서는 선과 색채와 면의 속성으로, 조각에서는 형태와 양감과 질감의 속성으로 경험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예술작품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존재가 아님을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예술작품이 특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미니멀리즘이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으로부터 배제하고자 하는 것에는 작가의 주관과 개성도 포함된다. 작가의 주관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사회화되어 있으므로 주관 혹은 개성의 개입은 곧 삶의 잔재와 흔적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예술작품에 대한 절대적인 순수를 추구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을 한정하는 법칙은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작품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니멀리즘은 예술작품이 상기시킬 수 있는 일체의 재현된 이미지 역시 부정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어떤 실재를 떠올리는 습성은 종래의 재현적 문법의 잔재라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에 의하면, 재현적 문법은 엄밀하게 말해 조형예술 고유의 것이기보다는 문학의 전통적인 특징이다. 따라서 어떤 이미지의 재현이란 곧 미술작품을 순수로부터 비순수로 전이시키는 불순물이 된다. 외관상 의미없는 작가의 추상적인 붓질마저 어떤 이미지를 상기시킬 수 있는 것으로 거부된다. 마치 공산품을 상기시키는, 아무런 표정도 갖지 않은 작품의 외관은 이렇듯이 어떠한 메시지도, 개성도, 이미지도 담고 있지 않은 철저하게 익명적이고 객관적인 물건(작품)을 생산하려는 의도된 전략의 결과이다. 한편으로 그 물건(작품)은 단 한 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예술작품이 요구하는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하고 있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에 의하면, 미술작품은 시지각적인 인상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지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란 곧 논리 혹은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 단순한 외관은 이렇듯이 미술 고유의 속성이 아닌 것을 배제시킨 결과이다. 미술작품을 철저하게 시지각적인 현상과 경험에 국한하려는 미니멀리즘의 태도는 서구의 전통적인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 태도는 유교 특유의 절제된 미학에 친숙한 우리 정서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어서 별반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14. 설치미술 - 공간의 재구조화 설치미술은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등 현대 미술사에 등장하는 여타의 경우와는 달리 특정의 성격이나 양식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사물의 외적 인상을 기록하는 인상주의나 인간 내면의 기분이나 심경을 표출하는 표현주의처럼 그 자체로 어떤 특정의 성격을 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설치미술이란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보여주는 방식과 관련된다. 일테면 기존의 회화에서 보듯이 벽면에 걸려 있는 캔버스와 조각에서 보듯이 특정의 좌대 위에 얹혀진 작품이라는 관례의 확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을 보여주는 설치미술의 방식은 동시대 미술의 여타의 경향과 관련된다. 예컨대 폐기처분된 공산품 쓰레기야말로 현 시대를 대변하는 진정한 현실로 간주하는 신사실주의의 전시 방식에서, 동시대를 인스턴트 문화 혹은 자판기 문화로 규정하는 팝아트의 전시 방식에서 확인된다. 정크아트(쓰레기 미술)에서 볼 수 있는 폐타이어나 폐플라스틱 조각의 제시와 어셈블리지(집적미술)에서 볼 수 있는 폐공산품 더미의 전시는 이제 더 이상 화랑이나 대안 공간에서의 낯선 풍경이 아니다. 설치미술에 대한 인상을 이렇듯이 생경하게 느껴지게 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변화된 소재에 있다. 즉, 동시대 미술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인 폐기처분된 공산품 쓰레기나 폐타이어와 폐플라스틱 조각은 기존의 회화 혹은 조각의 주요 소재들인 안료와 캔버스, 대리석과 브론즈를 대체하고 있다. 이렇듯 달라진 소재를 전시하는 방식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물론 벽과 좌대에, 나아가 화랑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의존하는 종래의 전시 방식으로는 동시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한몫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이 달라지면 소재가 달라지고, 소재가 달라지면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역시 달라지기 마련이다. 달라진 정신이란 정신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그 논리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인간 소외, 소외된 인간 조건의 결과로 인해 개체 혹은 주체를 상실하고 익명적으로 존재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을 말한다. 익명적인 예술가란 자신이 생산한 작품에 대해 무책임한 존재를 말한다. 그는 단지 시대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수동적인 거울일 뿐, 작품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암시도 부여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다. 일체의 가능한 해석에 대해 철저하게 열려진, 심지어 전혀 상반된 해석이 만날 수도 있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이 현대미술의 난맥상을 초래하는 주범이다. 설치미술이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은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대지미술과 매체미술의 전시 형태와 연관된다. 중요한 것은 물질로 표현된 작품이 아닌 예술가의 개념임을 주장하는 개념미술에서 그것이 수단화하는 소재와 형식은 사실상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의 정체를 한마디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화도 아니면서 조각도 아닌, 그렇다고 단순한 일상적 오브제와도 구별되는 어떤 중성적인 물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미니멀리즘 역시 그 시지각 방식이 전통적인 문맥과 정서를 벗어남은 당연하다. 대지미술의 특징은 단적으로 화랑이라는 특정의 공간을 거부하는데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대안 공간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화랑을 거부하는 이유는 화랑이 예술가의 의도를 가감없이 전달하기보다는 번안하는,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본래 의도로부터 일정 정도 멀어지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가의 의도란 이렇듯이 번안이 아닌 예술적 행위의 실행 혹은 실천 자체를 말한다. 대지란 이러한 행위가 실행 혹은 실천되는 적나라한 장(자리, 장소, 공간)이다. 그렇다고 대지미술가가 무조건 화랑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물론 화랑이 어떤 의미를 번안하는 것이 아닌 실행의 장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이다. 일테면 화랑에 속한 구조물을 부분적으로 파손하거나 구조물을 특정의 이미지를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으로 사용하는 등 공간 자체를 예술가가 의도하는 의미화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태도를 말한다. 한편, 매체미술은 미디어가 요구하는 기술적 환경에 수반되는 일체의 작업을 말한다. 비디오와 프로젝터 시스템, 액정화면과 상호 소통 시스템, 그것들의 최종적인 가시 형태와 과정을 포함한다. 설치미술의 이해는, 개념미술의 개념과 미니멀리즘의 중성적인 물건, 대지미술의 장소와 매체미술의 미디어가 종래 회화와 조각에서의 캔버스와 안료, 대리석과 브론즈와 마찬가지로 소재라는 사실을, 그 소재를 전시하는 달라진 방식을 인식하는 것에 있다. 15. 행위예술 - 삶이 곧 예술이다 행위예술은 예술가의 행위가 시지각적 경험을 중심으로 해 온 미술의 전통적인 표현을 대체하는 최근의 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시지각적 경험이 단순히 ‘본다’는 것 이상임을, 보는 것이 곧 인식과 연결되는 총체적 경험임을 인정한다면, ‘본다’는 것이 미술의 전체가 아닌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예술가의 행위와 관련한 시지각적 경험은 미술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예컨대 미술 외에 연극과 오페라와 무용에서는 진작부터 예술가의 행위가 중요한 표현 도구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리고 가장 주된 요소는 아닐지라도 시지각적 경험 역시 그 메커니즘의 일부로 다루어져 왔다. 이렇듯이 예술가의 행위로 재현된 시지각적 경험 외에도 무대 미술이 연극 혹은 오페라 혹은 무용의 역사와 그 기원을 같이 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행위예술은 전통적으로 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장르적 특수성만을 포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행위예술은 예술가의 행위 자체에 주목하는 여타 장르의 표현 범주들을 두루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장르 간의 벽을 허무는 소위 크로스오버니, 여타 장르 고유의 표현이 혼재한 총체예술(토탈아트)이니 하는 최근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즉 행위예술은 예술가에 의해 표출된 결과가 단지 예술적 표현이기만 하다면 더 이상 미술이니 음악이니 회화니 조각이니 연극이니 무용이니 하는 장르적 특수성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이 시지각적 경험으로부터 행위로 그 장이 옮겨가는 최근 미술의 한 경향은 회화적 평면 혹은 조각적 입체라는 한계를 벗어나 일상적인 삶의 장 한 가운데로 침투함으로써 삶 자체와 구분되지 않는 예술을, 삶 자체와 일체를 이루는 예술을 꾀하려는 예술가들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이탈리아 화가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 위에 어떤 이미지를 재현하는 대신 칼로 캔버스의 일부를 찢어 구멍을 만듦으로써 평면이 아닌 입체적 효과를 꾀했다. 이를 통해 캔버스의 표면에 재현된 이미지가 실제가 아닌 허구임을 밝히는 동시에 실제 삶과의 연장선에 있는 예술적 표현을 꾀했다. 미국의 화가 잭슨 폴록은 종래 프레스코 벽화처럼 고정된 화면이나 이젤화처럼 세워진 화면 대신 캔버스 천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 속에 들어가 밑면에 구멍이 뚫린 안료통을 이리저리 흘리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때 프레스코 벽화와 이젤화라는 종래 상황에서의 예술가가 주체라고 한다면, 벽화와 이젤화는 예술가가 대상화시킨 객체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폴록의 행위에서는 표현의 매체와 예술가 자신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일체가 되고 있다. 마치 예술의 몸속에 들어가서 예술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예술가를 보는 듯하다. 폰타나와 마찬가지로 폴록 역시 어떤 이미지의 재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의 화가 이브 클라인은 캔버스 표면에 여체의 이미지를 그리는 대신 청색 물감을 칠한 여자 모델들로 하여금 음악에 맞추어 캔버스 천에 뒹굴거나 몸을 눌러 자국을 남기게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결과적으로 이 행위의 결과인 작품은 일상과 예술의, 실제와 허구의 중간에 위치한 애매모호한 것이 된다. 이를 통해 클라인은 폰타나 혹은 폴록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삶의 연장선에 있는 예술을 꾀하고 있다. 한편으로 조각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조각가들의 욕구는 종래처럼 소재를 파내거나 깎거나 다듬거나 하는 대신, 실제 인체를 떠내는 캐스팅이나 몰딩기법으로 표현된다. 미국의 조각가 조지 시걸은 인체를 온통 하얀 석고로 떠냄으로써 현대의 고독한 군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듀안 한슨 등 하이퍼리얼리즘 조각가들은 실제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인체 조상에 가방이나 안경, 옷 등 실제 사물을 부가함으로써 현실 이미지에 한층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이미지에 대한 접근은 마침내 자신의 신체를 작품으로 제시하는 예술가를 낳기에 이른다. 영국의 예술가 길버트와 조지의 ‘살아있는 조각’은 예술가 자신의 신체를 조각 작품으로 화랑에 전시하고 있다. 다우그 홀과 조디 프록터 커플의 퍼포먼스 역시 마치 인체 조각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유사 이래로 예술은 현실적인 삶과 구별되는 독특한 경험을 지향해 온 이상주의적 측면과 현실에 대한 접근과 일치를 지향해 온 사실주의 혹은 현실주의적 측면이 공존해 왔다. 이 가운데 예술가 자신 혹은 관객의 신체를 작품으로 인식하는 행위예술은 현실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예술이 현실 속에서의 행위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현실 자체와 다를 바 없다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당위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하튼 행위예술은 현실과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현실에 대해, 때로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발언한다. 예술가의 행위는 물론이고 일면적으로는 전통적인 굿이나 데모, 그리고 여러 형태의 시위 등 일상 속에서의 사건이나 행위가 행위예술의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마도 행위예술이란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오랜 이념을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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