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8390
이의성 / 문명이라는 장기판에 놓여 진 벌거벗은 생명
이선영
2012. 07. 02.
이의성의 작품에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물을 좋아하는 그에게 동물들은 자신의 비유가 되어 작가로서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전해준다. 주로 등장하는 동물은 개, 곰, 소, 말 등 인간과 친숙한 동물들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단순히 인간으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교훈담이나 우화에 머물지 않는다. 또는 ‘인간 역시 동물이다’는 식의 싱거운, 그리고 대부분 퇴행적이며 반동적으로 기우는 자연주의적 결론에 머물지 않는다. 이의성의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의 비유는 보다 심층적이다. 그것은 인류문명에 의해 타자화의 극단에 몰려있는 동물들의 운명이 정확히 그 가해자들에게 되돌아온다는 메시지이다. 가해자가 모두 같은 부류는 아니다. 동물을 비롯한 벌거벗은 생명에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권위는 따로 있으며, 근거가 확실치 않은 이 부당한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다수의 인간들 역시 타자로서의 운명을 공유한다.
특히 작가라는 존재는 스스로를 의식하면 할수록 타자화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수의 타자를 억압하는 동일성의 논리는 다양성을 억압하며, 결국 그것들을 사라지게 한다. 대표적인 다양성의 산실은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그래서 자연과 예술은 그토록 많이 닮아 있는 것이다. 야성과 종 다양성을 소멸시키는 권력 아래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위험에 노출된 동물들은, 마찬가지로 한계선 상에 있는 예술가가 강하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동물 희생은 신화나 종교의 시대부터 공장화 된 대규모 동물농장과 동물실험실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화의 근저에 깔려 있다. 자크 데리다는 [법에서 정의로]에서 동물희생은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라고 본다. 인간 주체를 세우는 중심 논리로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여기에서 로고스는 이성, 의미, 기원, 근거, 현전 등을 포괄한다-를 지목했던 데리다는 이 논리가 억압하는 타자로 동물 및 생명체 일반의 희생 구조를 포함시킨다. 그는 이를 해체함으로서 인간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하자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가 행하는 폭력은 그것의 일방성이다. 이의성의 작품 <뛰는 개>(2010)는 한 방향으로 뛰고 있는 개떼들을 통해 전진만을 강제하는 현대문명을 풍자한다. 개는 눈이 제거되어 있어, 벽을 향한 개들의 질주는 맹목적이다. 그것들은 벽과 부딪히는 순간 벽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릴 듯하다. 클론 같은 개의 모습은 한 마리의 여러 동작처럼 보이며, 공간에 정지된 조각 매체에 시간적 흐름을 부여한다. 젖소가 등장하는 작품은 한 가지 기능만으로 특화된 가축의 착취를 예시한다. 작품 <우유누수>(2010)는 거대한 양동이가 넘칠 만큼의 우유를 짜낸 젖소가 헬기에 의해 어디론가 이동되고 있다. 원래 이 작품은 비가 새는 작가의 열악한 주거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는 고인 빗물에 의해 천정이 젖소의 젖처럼 축 늘어진 눅눅한 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젖소 또한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보다는 재난에 가까운 그 장소로 다시 되돌려 놓아지는 듯하다.

한 마리 젖소는 하나의 우유생산 공장으로 간주된다. 젖소는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곤경에 처해진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들은 열심히 작업할수록 더 사회로부터 물러난다. 쾌적함과 아늑함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젖을 받아내는 거대한 양동이나 장기판의 말처럼 젖소를 이리저리 옮겨놓는 헬기는 젖소 자신과는 이질적이다. 그것은 문명의 산물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에게 필요한 젖을 대량 생산해낸 젖소는 스스로의 생산물에 의해 소외당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에 의해 소외되는 다수의 노동자들처럼,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의해 소외되는 작가들처럼 말이다. 제목부터 장난스러워 보이는 작품 <개벼락>(2007)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작가가 자신을 은유-그는 개를 ‘영혼의 친구’라고 표현한다-하는 개로 변신하여 공중에 흩뿌려진다. 그것은 작업에 몰두하는 삶처럼 죽음에 가까운 짜릿함인가? 이의성의 작품에서 시스템을 상징하는 여러 인공 구조물과 함께하는 동물들은 고난에 처해지지만은 않는다. 철봉에서 곰들이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노는 작품 <대롱대롱>(2008)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놀이하는 인간’(호이징가)으로 본다. 오동통한 몸은 작가의 말대로 ‘순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동물 대신에 사물에 빗대어 노동하는 인간의 면모를 표현한 작품 <마른 곡괭이>(2010)는 생명의 전면적인 역량을 활성화시키는 놀이와 대별되는 대표적인 행위로 노동을 지목한다.
이 작품은 헌 곡괭이의 자루를 사람의 손가락 마디로 조각해 놓은 것으로, 이를 통해 반복적인 곡괭이질을 하고 살아가는 듯한 우리의 일상을 풍자했다. 동물들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자체가 도구화되며, 인간은 동물로부터 벗어났지만 노동으로 인해 물화된다. 지배와 예속을 야기하는 타자화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현대의 지배적 체제는 무엇보다 살아있는 생명의 형식을 겨냥한다. 생명은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그것을 예속상태에 묶어 놓는 것은 정치의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다. 그래서 현대의 정치는 생명의 정치라고까지 평가된다. 이의성의 작품 속 인간과 동병상련의 동물들은 생명정치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벌거벗은 생명인 동물은 순수한 존재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벌거벗은’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하플로스’에 해당하는데, 이는 철학에서 순수존재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용어라고 말한다.
순수 존재의 영역을 분리해 내는 일은 형이상학의 기초적인 행위로, 정치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내는 일과 상당히 유사하다. 벌거벗은 생명은 순수존재 만큼이나 무규정적이고 불가해하다. 이 순수존재를 포착하기 위해 정치는 생명정치로 변화한다. [호모 사케르]는 미셀 푸코의 [앎의 의지]를 인용하면서, 자연 생명이 국가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속으로 통합되기 시작하고 정치가 생명정치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푸코에 따르면 인류가 그리고 개개인이 단순히 살아있는 신체라는 의미로 정치 전략의 중요한 관건이 될 때, 사회는 생물학적 근대성의 문턱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정치는 벌거벗은 생명과 내밀한 공생관계에 접어든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신체의 요구와 제시로서 탄생했다. ‘정치란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페르슈어)가 되었다. 20세기의 전체주의는 생명과 정치의 동일성에 기초한다.
생명과 정치는 원래 서로 별개의 것이었지만 하나로 결합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야 말로 권력의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타자로서 배제된 벌거벗은 생명들은 정치화를 통해 포섭된다. 수용소는 이러한 생명 정치적 공간의 대명사로, 총체적인 지배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모델이다. 수용소는 역사적 사실이자 아미 과거에 속하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공간의 숨겨진 모형인 것이다. 동물농장이나 동물실험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농장이나 실험실을 통해 더 많은 생산력을 확보했지만, 더 많은 자연적 인공적 재앙 또한 불러온다.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리가 기대되었던 이성 자체의 역기능이 도처에서 빈발한다. 동물대신에 문명시대의 사물이 등장하는 이의성의 또 다른 작품 군들은 문명의 역설에 대해 언급한다.
작품 <지혜의 무게>(2010)는 책의 무게로 인해 무너진 미국의 한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켜켜이 쌓아 둔 책들 때문에 책상다리에 알통이 배긴 모습을 표현하였다. 책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 머리 위를 짓누르면서 압박한다. 관념이 쌓은 탑들은 겉보기의 체계와 달리 임의적이고 엉성하다. 그것들은 몸을 둔화시키고 실천을 마비시킨다. 삶을 변혁시키는 실천으로 전화될 수 없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단지 지식일 것이다. 타락한 지식은 단지 쌓아놓은 재물이 가지는 권위나 힘을 예시할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책은 다음에 쌓여질 책을 위한 받침대가 될 뿐이다. 책은 책이 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책을 낳는 자기 지시적 활동에 복무한다. <지혜의 무게>는 코드화 되고 관료화 된 현실의 불구화된 모습을 풍자한다. 작품 <내가 꼰 회오리>(2010)는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에 의해 자승자박되는 모습이다. 20센티미터 남짓한 얇은 철사를 수없이 꼬아 길이와 굵기를 늘려나간 이 작품은 늘 치워도 어질러져 있는 자신의 방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작은 바람줄기가 모여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회오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것은 작은 혼란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자신을 흔들어놓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달걀 모양의 작품 <콜럼버스의 달걀>(2010)은 나날이 콘크리트화 되는 지구를 표현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실체를 덮은 그 콘크리트 표면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 달걀 껍질처럼 취약하다. 그러나 인간이 문명의 취약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는 지혜가 아닌 재앙을 통해서일 뿐이라는 것이 재앙을 반복하게 한다. 재앙의 기억조차도 지나간 뉴스처럼 곧 희미해진다. 벽에 처박힌 자동차를 표현한 작품 <무제>(2008)는 <뛰는 개>(2010)의 주제를 동물이 아닌 사물로 표현한다. 동물이나 사물의 자리에 작가 스스로의 처지를 대입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맹목의 질주가 낳은 재앙을 사건사고처럼 보여준다. 이러한 종류의 사건사고는 부지불식간에 매순간 벌어진다. 조용한 죽음은 차가운 현대의 일상에 편재한다. 벽을 향해 달리는 눈 없는 개떼들과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는 자동차는 맹목의 두 가지 차원이다. 유일한 방향성을 요구하는 진보된 문명의 압박은 다수의 패자들 뿐 아니라 소수의 승자에게도 파멸을 안겨줄 뿐이다.
출전; 인천 아트플랫폼 이론가 매칭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