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人)-자연(然)’이라는 제목과 주제가 있는 이창수의 최근 작품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놓는다. 그는 작가와 작품, 또는 자연과의 관계를 대면이 아니라, 끼어듦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작업은 비우기를 위한 시간이다. 그에게 한지는 거부감 없이 자신과 합일할 수 있는, 이른바 ‘물아일체’의 재료이다. 작업의 출발인 자연은 생명과 동일시된다. 깊은 침묵에 잠겨있는 자연은 예술적인 어법을 통해서 비로소 활성화된다. 종이 이전의 원초적인 단계, 그 위에 붓 이전의 도구들로 가다듬어진 두터운 바탕 면은 자연적 대상과 쓰기를 하나의 과정으로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물은 여러 겹의 두께를 가지며 지속적으로 해독해야할 상형문자가 된다. 이창수의 작업에서 작가의 위치는 사물과 말을 이끄는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에 앞서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며, 작품과 함께 탄생한다. 작가가 주체가 되어 자연적 대상을 설명하고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체를 해방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을 끌어낸다.
이창수는 두툼한 한지의 층에서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장을 마련한다. 최근 작품의 키워드인 ‘人-然’은 자연과 인간의 인연을 말한다. 사람 자리에 삶을 넣은 작품제목 [生-然](2008)은 자연, 생명, 사람의 동일성을 확인 한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자연의 대표색인 푸른빛과 그것의 시간적 흐름을 내표하는 베이지 계열의 색이 많다. 여기에 선과 점이라는 단촐한 조형적 요소로 흐름과 확산이라는 자연적 과정을 담는다. 베이지나 쪽빛으로 만들어진,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가는 점들이 있는 작품은 액체적 흐름을 기체적 확산으로 변주한다. 바탕과 형상이 하나의 과정으로 융합되어 있는 작품들은 언어가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고전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종이가 형성되기 이전의 원초적 질료의 밀고 밀리는 끝없는 조탁과정에 의해 형상이 스스로 드러나는 방법론은 특정한 주체와 대상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언어의 장에서 차이적 관계를 만든다. 그는 이원론에 기반 하는 재현주의적 가정을 거부하고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분명해 지는 맥락을 만들려고 한다.
이창수의 작품은 화려한 스펙터클의 시대에 눈길을 확 끄는 색채나 형태가 부족하다. 그려지기 보다는 제작되는 그의 작품은 형태 대신에 바탕으로부터 솟아오르거나 내려앉은 요철이 있을 뿐이며, 특정 형태를 덧씌운 색채 대신에 재료에 스며들어 완전히 일체가 된 색조가 있다. 그는 형태와 색채를 대폭 삭감함으로서 재현주의로부터 더 멀어진다. 물결이나 바람 결, 인체의 곡선 같은 자연적 형태가 연상이 되기는 하지만 모호하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이다. 그는 미술의 원형을 어릴 때하던 모래장난, 흙장난 같은 것에서 찾는다. 그는 여전히 아카데미의 과정을 지배하는 재현이란 의사소통에 대한 훈련일 뿐, 그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 모방이나 자기표현이 아닌 과정을 중시한다. 미학에서 자기표현은 자연모방과 대립되는 개념인 듯하지만, 양자는 모두 주체/객체 간의 이원론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과 생명을 참조하지만 그자체가 무수한 과정이 되기에, ‘텅 빈 기호’(이창수,2008년)로 귀착된다. 주체와 객체를 하나의 과정으로, 작품이라는 하나의 야생적 바탕으로 녹여내는 이창수의 작품들은 표현 또는 재현으로서의 예술을 거부하는, 현대 언어학에 기반 한 비평적 담론과 만난다.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작업 과정은 주체의 표현이나 객체의 재현을 벗어나 추상적 화면으로 이끈다. 그러나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추상미술은 미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이원론에 기대는 재현이나 표현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 추상미술은 재현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지만, 곧 20세기 미술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이후 추상은 구성이자 해체의 과정을 통해서 극복된다. 이창수의 최근작은 허상인지 잔상인지 모호한 결 모양의 굴곡진 표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푸른 색조나 수평선을 암시하는 듯한 선들은 물이 있는 풍경을 연상하게 된다. 화면을 이루는 선과 점은 추상적인 조형요소이자 자연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1차적으로 물결, 그리고 햇빛이 반사되는 수면의 지점들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수면에서 선은 곧 점이되고, 점은 곧 선이 되곤 한다. 점과 선은 서로를 무화시키면서 서로를 두드러지게 한다. 수평적 선은 초기작에서는 나이프로 그은 것 등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나무로 두들겨 만들었다. 작업실에는 다양한 두께와 길이의 나무 회초리들이 구비되어 있으며, 여느 화가가 물감을 고르듯이 필요에 따라 이것저것을 활용한다.
나무 회초리들이 만들어내는 수평적인 주름에는 그 자체가 가지는 가학적인 고행의 과정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주름진 표면으로 결과 된 산물에는 잔잔함과 편안함, 온유함이 배어 있다. 그것은 회초리가 만들어내는 주름보다는 한지의 부드러운 물성과 하나가된 색조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1-3가지 색으로 채워지며, 블루, 그레이, 블랙, 화이트 등이 주조를 이룬다. 화려하지 않고 침침한 색조들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낡아 보인다. 칠해지기보다 뿌려지거나 담가서 만들어진, 한지에 스며든 색은 색보다는 빛에 가깝다. 녹물이나 쪽물 염색은 자연 친화적이다. 흰색-노랑 계열은 한지 원래의 톤에 가장 가깝다. 한지 고유의 색상은 시간의 흐름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한지는 바탕과 형상, 여기에 행위까지 하나의 과정으로 만드는 재료로,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해체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매체이다. ‘종이가 되기 직전의 살아 숨 쉬는 펄프와 닥나무 줄기들’은 ‘두드림의 반복 속에서 피어나는 요철을 통해 자연과 호흡’하며, ‘펄프와 천연염료는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창수,2008년)을 표현한다.
작가는 자연의 모방이나 주체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을 반복한다. 영원히 회귀하는 무수한 반복에서 차이가 생겨난다. 원재료를 두들기고 원재료에 스며들게 함으로서 바탕과 형상과 색이 완전히 일체화된다. 회화라기보다는 부조 같은 형식이다. 말라가면서 만들어진 형상은 유연하면서도 질기다. 한지는 살아있는 재료로 물과 공기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이창수의 한지 작품은 유기체처럼 흡수와 호흡의 과정을 각인한다. 한지 작품은 원료자체의 인장력 때문에 접착을 위한 또 다른 재료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는 화학적인 것을 비롯한 인공적인 것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작품의 색도 화려하지 않으며 형태 또한 두드러지지 않는다. 말라가면서 형태가 만들어지는 한지 작품은 시간성이 중요하다. 동양화의 먹선 같이 수정이 안 된다. 두들김을 통해 섬유질이 섞여서 결속되는 작품들은 때마다 매번 성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동양화 같은 분위기가 있다.

근작으로 올수록 작품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점점 더 뺌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행위의 흔적만을 남겨둔다. 이 흔적에서 최초의 시작과 최후의 마무리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과정만이 지속적이다. 행위의 흔적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통해 패턴화 되지만, 완전한 반복은 없다. 그의 작품은 대립하는 이원적 체계가 과정으로 해체 된다. 그것은 기표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기의를 포기하는 것으로, 고정된 의미는 의미화의 끝없는 과정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나뭇가지로 유동적인 한지 재료들을 두드리는 주요한 방법론을 통해 본질과 실체는 차이와 흔적으로 해체된다. 그리기보다는 두들기기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낸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의 자연은 하나의 근원이나 중심, 본질과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에 상실과 부재를 보충하는 끝없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은 자유로운 놀이를 방해하는 중심적 구조로부터 해방을 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