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주 전(3.28-5.10, 갤러리 조선)
정직성 전(5.4-6.14, 김종영 미술관)

 

정정주와 정직성의 작품은 건축 및 도시라는 인공구조물 속에서의 삶과  무의식이 드러나 있다. 건축과 도시는 인간사회의 의도가 관철된 인공물이기에 자연 같은 다양성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구성요소들 간 조합을 통해 자연에 준하는 복합적인 환경을 창출한다. 정정주의 영상 설치가 도시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을 방문하였을 때의 낯선 체험을 빛이라는 요소를 통해 조명한다면, 정직성의 회화는 도시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동적인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정정주가 정적 속에 빛의 움직임을 통한 드라마를 펼친다면, 정직성에게는 끝없는 이합집산의 과정 중에 있는 동적 메커니즘이 두드러진다. 두 작가는 정지된 구조를 공간에 물화시키지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은 주요한 매개 변수이다. 몸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구조를 접하고 깊숙이 들고난다. 이러한 몸 적 체험에 상응할만한 심리적인 사건들이 쇄도하고 변형되며 사라진다. 빛은 구조보다는 과정을 강조한다. 가령 [주거기계]같은 정직성의 이전 작품은 어느 날 똑같이 지어진 집단주택의 모습이 무한 반복되는 구조로 펼쳐지면서, 이 핍박한 반복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광경을 비추는 냉랭한 빛이 있었다면, 이제 근대의 ‘주거기계’들은 보다 빠른 시간의 주기 속에서 생성 소멸한다.

 

구성요소들은 견고한 자리를 잃고 무너지고 깔아뭉개지며, 상호관통하고 심지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유기체처럼 체액을 줄줄 흘린다. 정정주의 ‘낯선 방문’전에서도 빛은 익숙함 속에 낯섦을 야기한다. 현대미술의 키워드가 된 낯섦은 그 출발에 집이 있다. 집은 자아나 주체처럼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설다. 정직성과 정정주는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도시공간과 건축들을 주목하고, 구조들 간에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조명한다. 그럼으로서 자연과 인간이 부재한 가운데 벌어지는 구조, 그리고 구조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사건의 세계를 표현한다. 주체가 무엇을 새로이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로 너무 많이 채워진 근현대 세계에서 구조는 영원하지 않다. 구조는 어떤 의지와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에 변질된다.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이 두 전시에서 정적인 질서의 이면인 무차별적 카오스가 횡행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물화된 구조적 질서를 교란하는 유쾌하고도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 

 

   

정정주에게 변화하는 빛의 구조화는 정교한 축소모델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카메라 같은 동적 요소에 의해 구체화된다. 빛은 역동적이다 못해 물활론적이다. 인도 악어 공원에서의 경험담이 인상적이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악어들이 움직임 없이 정지해 있었는데, 사육사가 먹이를 던져주는 순간 그 많은 악어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고 말한다. 무생물이나 무기물에 가까운 형태나 형식이 질적으로 도약했을 때의 그 낯섦과 놀라움이 그의 작품에 깊이 새겨진다. 정정주가 빛을 다루는 방식은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움직이는 악어 떼와 같다. 빛은 우주를 채우는 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생존본능에 의해 강렬한 움직임을 낳는 동물성과 비슷하다. 그에게 강한 빛이 방으로 들어와 움직이는 과정은 따뜻함만큼이나 섬뜩함을 자아낸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빛이 공간과 그 속의 인간을 낱낱이 스캐닝 하는 느낌은 ‘낯선 방문’전에서 깊이 체험된다. 스테인레스 스틸과 아크릴로 만들어진 현대식 건축의 축소모델 안에 투사된 영상에 한 인물이 무엇인가 말하는 작품 [lobby]처럼, 정정주에게 건물은 인간과 같다. 따라서 건물과의 만남은 타자와의 만남에 해당된다. 360도로 돌아가는 카메라가 방문자를 포함해 작품과 공간을 두루 보여주는 [inner brain]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나 빛은 정적인 구조를 움직이는 시각과 정신을 나타낸다. 움직이는 빛은 나와 환경, 나와 타자 간의 긴장을 극화한다. 타자와의 만남은 충돌이라는 사건을 만든다.

 

알루미늄과 아크릴로 된 아치형, 정방형 건축 구조물이 뒤엉켜 한 덩어리가 된 작품 [crash]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공간체험이 드라마틱하게 조명된다. 공간은 방문자의 움직임에 따라 매번 다른 기하학을 펼친다. 매 순간순간이 낯선 단면들과 충돌하는 과정이다. 3D 애니메이션 작품 [room]은 여러 방향으로 뚫린 문과 창문을 지나가는 빛이 스캐닝하  듯 공간을 가로지르면, 가상의 건축적 구조물은 음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기하학적 장면을 펼친다. 그에게 건축은 단지 무엇을 담는 용기가 아니라, 가능한 구성 요소를 배치하고 실험하는 가상의 장이다. 빛의 변화로 두드러지는 시간성은 정적인 구조에 움직임을 낳고, 구조의 움직임에 상응하는 감정의 상태를 창조한다. 작품 [10 houses]는 여러 건물의 형태가 중첩되며 변화하는 애니메이션으로, 다양한 실루엣들은 건물의 얼굴에 해당된다. 거울이 아닌 그림자로부터 탄생한 회화에 대한 가설처럼, 실루엣은 친숙한 동일자가 아닌 낯선 타자로부터 탄생한 초상화의 기원을 떠오르게 한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다람쥐의 헛바퀴처럼 늘 자신에게로만 되돌아오는 동어반복과는 거리가 멀다. 건축이라는 친숙한 구조를 통해서, 동일자 속의 타자를 주목하는 정정주의 방식은 익숙함 속의 낯섦, 구조 속의 운동, 움직임 속의 정지 같은 여러 차원과 질의 변주가 있다.     

 

반복의 순간에 고정된 질서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던 정직성의 회화는 돌아가는 바퀴, 뻗어나가는 관, 쓰러진 기둥 등을 연상시키는 도시나 건축의 구성물이 자기 자리를 잃은 채 서로를 관통하고 뒤엉킨다. 이전 작품에 대한 인상 때문에 건축적 요소처럼 보이지만, 화면을 가로지르는 것들은 점 선 면이라는 조형 요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건축적이든 조형적이든, 요소들은 역동적으로 이합 집산하는 중이다. 정지에서 동작으로의 변화가 감지되지만, 전체와 부분간의 유기적 관계가 사라진 것은 동일하다. 어떤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들인지 알 수 없는 구조의 단편들이 헤쳐 모여 다른 것으로 재조합되는 과정을 질서화 하는 형식은 90x90cm로 규격화된 캔버스들 뿐이다. 그것은 물리적, 심리적, 육체적인 차원을 아우르는 광경들을 모듈화 한다. 그러나 이 모듈이 모여서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은 각각의 소우주이면서도 계열을 이루며, 정적인 구조가 아닌 구조화, 또는 해체의 과정을 보여준다. 세계의 주요 도시를 온통 격자 구조로 변모시켰던 근대 건축가들이 욕망하였듯이, 건물은 거주하는 기계가 되었지만, 노출된 단면들을 가진 기계는 이제 무엇과 접합되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 불가능하게 되었다. 분열하면서 생성되는 과정은 자본의 욕망처럼 통제되지 않으며, 그것들이 언제쯤 제자리를 잡아서 예정된 조화를 이룰지도 기약이 없다. 정지된 장면이지만, 시리즈 작업을 통해 회화 속에 내재된 시간성은 극대화된다. 여기에는 생성되고 파괴되는 과정만이 영원하다. 근대에 와서 실체는 관계가 되었지만, 관계는 과정으로 가속도가 붙는다. 불규칙적인 크기와 단면을 가지는 구조들은 강하게 충돌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라면, 화면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감 자국들은 생성의 기쁨만큼이나 파괴의 고통을 전달한다.

 

 


 

구조적 질서는 해체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될지에 대한 긍정적 비전은 발견되지 않는다. 맞부딪히는 생경한 형태와 색채의 파편들 간에 놓여 진 것은 깊은 불연속이다. 그것들은 재현주의에 전형적인 연속적 코드화를 배제하고 이전의 것과는 다른 것의 발생을 예시할 뿐이다. 카오스와 복잡성 사이에 오고가는 연결고리를 순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속도이다.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말하듯이, 모든 정렬의 주형인 선조적 질서는 이미 감속하고 있는 것, 즉 실존적 끈적거림과 응고이다. 속도는 비록 우연적인 것들끼리의 순간적 만남에도 불구하고 강렬도(intensity)를 낳는다. 가타리는 정신에 연관된 모든 것을 언어학적인 기표의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은 구조주의에서 범한 중대한 오류라고 본다. 그는 보편적 수학소를 세우는 가운데 구조주의자들은 내기의 복잡성을, 즉 수많은 상상적 영토들로부터 조립되고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기호화되는 현실적-가상적 세계들의 결정화를 물상화 하고 축소하였다고 비판한다. 정직성의 작품 역시 모든 차원의 움직임을 틀 짓는 구조에 대항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의 다양성이다.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화면에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부품들이 접속하여 작동한다. 정직성의 회화는 가시적인 구조를 넘어 이질적인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기계적 무의식’(가타리)의 세계로 진입한다. 기계적 무의식은 이미 있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제작 방식으로 구축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색다른 배치는 단지 지층을 이루는 분리와 분절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모든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