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한주는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체인 신문에 시간이라는 변수를 개입시킨다. 단선적 논리를 내포한 시간은 나이테나 메아리, 파장처럼 공간화 되면서 더욱 유동적인 것이 된다. 기사로 완성된 어떤 사실들은 잘게 찢어져서 다시 편집된다. 문장의 구조와 전혀 다른 배열 방식에 의해 그것들은 거의 읽을 수 없는 무늬로 변한다. 시간의 시험은 사실에 이미 내재된 허구의 몫을 늘리곤 한다. 유한주에게 신문은 처음에 기록, 사실, 역사 같이 객관성을 상징하는 매체로 도입되었지만, 미술작품으로의 재편집 과정에 의해 기억이나 해석이라는 주관성에 방점을 찍게 된다. 본래의 문맥에서 찢어져 나온 단편들이 다시 헤쳐 모여 또 다른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것들을 출발과 목적지가 분명한 메시지에서 단절과 순환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한다. 작가는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여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는 건 아닐까’라고 말한다.
사실과 기록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 것일까?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역사가들은 역사적 자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뿐 아니라, 이러한 자료를 문제로서 구성하고, 그 문제를 설명과 결합시킴으로서 해결하는 이론 형식에 대해서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설명과 메꾸기와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로 얻어낸 동떨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결합시킴으로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그의 상상력을 사용한다. 오직 사실만이 존재한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계몽주의의 역사 서술 형식들은 사실을 연속적인 질서의 산물로 다룬다. 역사에 대한 객관주의적 환상을 거부하는 헤이든 화이트는 특정한 역사 서술의 문체는 역사가가 역사기록에 포함된 사건의 연대기로부터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여러 설명 전략이며, 그것은 역사의 장을 예시하기 위해 이용하는 언어적 규약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형식을 중시하는 것이다.
역사의 장이 언어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면, 역사는 예술처럼 표현과 상상, 그리고 직관과 연관된다. 니이체는 역사를 예술로 고양시킨 대표적인 철학자로 평가된다. ‘현재에 대한 가장 강렬한 관심사에 의해서만 그대는 과거를 설명할 수 있다. 미래를 창건하고 있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고 말한 니이체는 역사적 사고를 시의 형식, 특히 세계를 이해하는 은유 형식으로 되돌리려 하였다. 니이체적 관점에 의하면, 어떤 견해가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오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견해가 다른 모든 견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목적을 위한 특정한 이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실증적 사실에 대한 이해에 대해, 역사가나 과학자보다는 예술가의 입장에 놓여 있는 유한주의 작품 역시, 역사의 장은 개념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를 창조하는 무대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현상과 본질 그리고 해석과 사실은 엄밀히 구별되지 않는다.
책이나 기타 인쇄 매체가 아닌 신문이 선택된 이유는 그것이 매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간주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파장을 늘려가지만 명확한 중심점이 없는 형태는 사실과 기록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점이나 원인을 텅 비워둔다. 텅 빈 중심에 위치하는 사실과 기록의 위상은 그것들이 해석이나 기억만큼이나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한주의 작품에서는 사실이나 진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이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이 중시된다. 화면의 가장자리는 신문 조각을 남겨두기에 파장, 또는 주름은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느낌을 준다. 작품 [ripple(red)[(2010년)과 [ripple(blue)](2010년)처럼 정사각형 화면이나, 작품 [spread] (2011)처럼, 각기 오른쪽과 왼쪽에 무게중심을 둔 한 쌍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그렇다. 확장되는 과정의 일부만을 잘라낸 듯, 또는 양쪽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처럼 바깥으로 울려 퍼진다. [floating](2011) 시리즈에 나타난 바처럼, 화면의 여백은 형태들이 떠 있는 느낌을 주거나, 또는 기억이 비워진 공간처럼 보인다.
새로이 끼어든 간격들에 의해, 시각성에 충실한 애초의 기록과 사실은 리듬이나 촉각성 같은 모호한 느낌으로 남는다. 그것들은 2010년 전시 제목처럼 ‘읽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최초의 영감은 공간을 켜켜이 키워가는 나이테 모양이었지만, 점차 동적이고 시간적인 차원이 강조된 파장의 형태로 변모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확장되면서 실타래같이 이어지다와 끊어 지다를 반복하는 선들이 동심원 형태로 축적된다. 5개가 한 시리즈를 이루는 작품 [untitled](2011)처럼, 빗방울이 떨어지듯 한 화면에 얼룩이 하나씩 배열되기도 하며, 한 화면에 여러 개가 배치되기도 한다. 각각의 작품들은 빈 중심을 여러 군데 두면서 한지로 이루어진 여백을 다변화한다. 한 화면에 여러 개의 파장들이 배치됨으로서 경계 부분은 간섭파를 만든다. 주름과 주름이 부딪히는 완충지대는 새로운 사실, 또는 기억이 출발하는 불연속이 지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신문의 기사가 배치되는 방식 자체에 내재된 간격들을 반영한다.
가령 우리는 신문의 한 페이지에서 지옥과 천국의 풍경을 동시에 보는 일이 흔하다. 일상화되다시피 하는 충격적 병치는 충격을 상쇄시키곤 한다. 매일 뜨거운 사건사고들로 채워지는 신문을 보는 대중들은 쿨 하다. 그것은 정보 소비자의 입장이며, 정보의 통로가 인쇄 미디어에서 각종 인터페이스로 옮겨가면서 생산과 수용 사이의 온도 차는 더욱 커진다. 현대는 사실이나 진실 보다는 개인과 관련된 소소한 가상들에 더 몰두하기 마련인 나르시시즘의 시대이다. 기사부분을 이루는 흑백 꼴라주 사이사이의 색지들 역시 신문으로부터 왔다. 독자가 아닌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광고지면은 대체로 화려한 원색 화보로 채워지지만, 사진기사 또한 포함된다. 기사 반, 광고 반으로 채워지는 신문처럼, 흑백과 원색의 비중 또한 비슷하다. 이미 기사는 광고이고, 광고는 또한 정보이기에 사실과 허구, 기록과 기억의 관계만큼이나 가변적인 것이다.
작품 제목 [swirling](2011)에 나타난 바처럼, 사실 또는 기억이 재편집되는 과정은 정적인 나이테가 아니라 역동적인 소용돌이 형태에 가깝다. 이전에 비과학적으로 여겨진 소용돌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소용돌이가 없다면 어떤 것도 실재하거나 형성되지 않는다고 본다. 소용돌이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시간의 이미지이다. 미셀 세르가 생각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어떤 계획이나 목적에 따라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며 예기치 않게, 요컨대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가장 단단한 굳은 것들도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점성이 강한 액체에 불과하다고 보는 그는 고체에 근거하는 이전시대에 실증주의는 보다 유동적인 것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유한주의 작품 속 시간 개념 역시 하나의 객관적 체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각 흘러가며 단지 몇몇 합류점만을 보여줄 뿐이다.
서로 다른 위상 공간을 가지며 소용돌이치는 시간은 발생하는 우주나 구름 같은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투명 종이를 말아서 만든 이전의 작품 [구름](2007년)은 항상 변하는 작은 물방울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을 표현한다. 인쇄물의 선적 질서를 액체, 또는 기체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작품들은 단선적 체계를 상대화시킨다. 시간이 선적인 질서를 잃어가는 경향은 본래부터 허구인 예술은 물론, 반쯤은 허구가 섞여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 심지어는 엄밀한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서사와 정치적 전략은 객관적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유한주의 작품은 새로운 시간관에 입각하여 새로운 기억의 방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선적이고 인과적으로 규정지어진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를 재조정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