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 전 (5.18—7.15, 아르코미술관)
리경 전 (5.24-7.21, 코리아나 미술관)

 

이기봉의 ‘흐린 방’전과 리경의 ‘more light’전은 부정(‘흐린...’)과 더 강한 긍정(‘좀 더...’)의 어법을 통해 빛을 호출한다. 이들 전시는 수증기나 연기로 가득한 크고 어두운 공간에서 번뜩이는 빛의 궤적을 통해 그 안에 들어선 관객의 현존을 일깨운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고요하고도 강렬한 느낌이 있다.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을 이끄는 빛은 형이상학적 발산이나 인공적 조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계에 충실한 미보다는 한계를 넘어서는 숭고와 관련된다. 이들의 작품에서 경계와의 접촉이라는 숭고한 사건을 일으키는 공통된 출발점이 텍스트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기봉 전에서 많은 작품들이 텍스트의 형식을 포함하며, 리경의 영감은 [창세기]에서 왔다.

 

장-뤽 낭시는 [숭고한 봉헌]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서 중 가장 숭고한 대목을 지적한다. 하나는 신성한 계명의 내용, 다시 말해 재현을 제쳐두는 대목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의 또 다른 명령, 즉 창세기에서 나오는 ‘빛이 있으라’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고대부터 숭고의 특출한 예로 간주되었다. 재현은 적합성과 의미를 매개로 구성된다. 그러나 제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섬광에 관여한다. 이 전시들에서 빛은 명백한 가시성의 장을 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몸을 휩싸고 도는 공감각성을 추동한다. 이 점에서 이기봉과 리경이 설치의 어법을 활용한 것은 회화의 확장이나 보완을 넘어서는 필연적 선택이다.

 

 대부분 신작이거나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만들어진 작품들로 이루어진 이기봉 전에서 2003년 작 [Bachelor: The Dual Body]는 규모는 작지만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려준다. 푸른 액체로 가득한 수족관에 책을 빠트린 이 작품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책은 책이 가져야 할 무게를 삭감시킨다. 책에서 의미가 발생된다면, 그것은 본질적 깊이가 아니라 끝없이 유동하면서 표면을 넓혀나가는 표류에 의한 것이다. 자라는 수직, 수평을 표현한 한 쌍의 작품 [Sense Machine]에서 수증기와 레이저 광선은 텍스트 형식으로 배열된 것들을 가로지른다. 그것이 만약 텍스트라면, 텍스트를 통해 발신자가 전달하려고 했을 명료한 의미의 이해는 상당한 방해를 받을 것이다. 투명한 의미 전달 대신에, 그 사이로 끼어드는 것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오독이 텍스트의 창조성을 낳는다.

 

가장 큰 작품인 [Cloudium]은 몸을 씻어낸 비누거품이 거대한 텍스트 판을 덮어나간다. 그것은 마치 해일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것처럼 강력해서, 이로 인한 감각적 충격은 공포와 희열을 구별할 수 없게 한다. 거품이 만들어낸 불확실한 형태가 매순간 허물어지는 작품 [Romantic Soma]는 붉은 빛으로 번뜩이는 기묘한 생기를 머금고 있다. [There is No Place]는 거대한 유리 상자 속에 안치된 저 편의 나무가 안개 머신에 의해 출몰을 반복한다. 이기봉의 작품에서 거품, 수증기, 물 같은 액체적 요소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위에서 범람한다. 안무가 정영두의 퍼포먼스와 영상에서 예시되듯, 액체적 요소의 근원은 몸이다. 몸은 그림을 비롯해 단단한 사각형 틀로 만들어진 텍스트들과 달리 거품처럼 모호하다. 그러나 이 모호한 실체는 명료한 실재감을 가지는 텍스트 안팎에서 맥락을 만들어내는 간(inter) 텍스트의 몸통이다.

 

 

텍스트는 평면적인 형식인 회화와 관련이 깊다. 인쇄술은 중세 말에 발명되어 원근법의 시대를 이끌었다.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인쇄술이 귀의 시대에서 눈의 시대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제1 효과는 귀로 들리는 말을 가시적인 단어로 전환하는 것으로, 인쇄는 당시 자연 과학의 발전, 즉 비가시적인 힘에 가시적인 형식을 부여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근대세계는 어떤 감각보다도 시각을 우선시하는데,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획일적이고 반복 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시각적인 것은 회화, 시, 논리, 역사에 있어서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을 만든다. 모든 것을 시각적 코드로 번역하여 균질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재현주의적 대세는 과학과 기술, 산업과 경제, 그리고 ‘사실주의’라고 알려진 미술형식을 추동했다. 이기봉 전에서 선형적(lineal)이며 연속적인 질서로 배열된 문자적 양식은 비문자적 양식에 의해 동시적이며 불연속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시각성은 선적 형식 논리를 통해 최고의 정밀성을 획득했지만, 근대의 황혼기에 텍스트 자체의 위상도 재고된다.

 

이제 텍스트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지식과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과 일탈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텍스트의 즐거움이란 자신의 몸이 이념들을 추구하는 그 순간을 이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의 몸이란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념들을 가지고 있다. 환희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학적 전제들, 그들의 기호, 가치, 기억들의 일관성을 뒤흔들어 언어의 관계를 위기로 몰고 간다. 환희란 금지된 것이어서 ‘행간 이외에는 말해질 수 없는 것’(라깡)이다. 이기봉의 전시에서 텍스트의 행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몸, 또는 몸의 원소들이다.
 
 리경의 ‘more Light’전은 막막한 공간을 가르는 빛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몸을 위치시킨다. 빛의 공간 속에서 몸은 다양하게 맥락화 되면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1층 작품 [more Light]는 거울과 유리, 레이저 광선으로 만들어진 빛의 방, 또는 거울의 안쪽이다. 정십자 공간 말단에서 발사된 빛의 각도를 엇기게 하는 유리판의 배열은 공간 속 주체에 빛을 집중시킨다. 주체는 집중적으로 조명 받는 것 같기도 하지만 빛의 감옥에 갇힌 듯도 하다. 주체를 사방팔방에서 관통하는 강력한 빛의 쇄도와 그 반대편에 그림자처럼 완전히 허상화 된 또 다른 반영상은, 중간 단계 없이 전체와 무를 바로 연결시킨다. 지하 공간의 작품 [I am telling a lie]에서 빛살은 극소화되고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좌표가 혼란스럽지만 무엇인가의 안쪽에 있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천정에서 비추어지는 분열적인 분홍 광원, 또 다른 방의 눈이 멀 만큼 강한 백색 광원, 공간 전체에 편재하는 정신을 멍하게 하는 소리와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길 찾기를 촉구한다. 계단으로 난 길을 찾으려면 레이저 광선이 연기와 만나 면을 이루는 정확한 위치에 서거나 빛 자체를 등져야 한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다양한 색과 강도, 두께를 통해 혼돈 속에서 길을 찾는 드라마를 이끈다. 빛은 반투명하거나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실재감을 가진 어떤 것을 만나게 한다. 자신을 반농담조로 ‘크리샤머니스트’라고 부르며,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는 리경에게 작업은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아름다움을 갖춘 형태의 제작을 넘어선다. 종교의 재현으로서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들과 일치할 수 없는 깊은 신앙은 예술과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공통된 의지의 원동력이다.

 

 이 전시에서 빛의 상징적 근원은 2002년 성곡 미술관에서 열린 ‘금단의 열매’의 전시 작품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 나타난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빛과 관련이 있다. 너무 강해서 맹목을 야기하는 빛은 보이는 것만 현실로 인정하는 물화된 시선과 그에 기반 한 인식체계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금기를 어긴 인간은 지식을 얻지만,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상실한다. 자신의 위치와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라 할 수 없다. 시각성에 기반 한 근대 과학기술 문명 역시 지나친 명료함 속에서 길을 잃게 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회귀는 하나의 맹목에 대항한 또 다른 맹목이나 퇴행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진정한 맥락을 부여하는 것으로의 역행이다.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비추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가늘게 드러날 뿐인 빛은 이러한 회귀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밀도와 무게가 다른 연기 입자와 만나 가느다란 선과 면을 이루는 빛은 깊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어떤 지점과 순간에 경계를 형성한다. 경계를 이루는 빛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한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숭고는 경계와 밀접하다. 장 뤽 낭시의 [숭고한 봉헌]에 의하면, 숭고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경계선 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질문이다. 주어진 한계에 충실한 미와 달리, 숭고는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면서 바깥과 타자라는 낯선 것을 현시한다. 낭시는 미와 숭고를 대조한다. 형태나 윤곽은 경계를 한정한다. 그것은 미가 하는 일이다. 반면 탈경계는 숭고의 영역이다. 숭고는 경계의 제한을 벗어난 것의 움직임과 관련된다. 경계가 궤적을 그리는 과정에서 배태되거나 그 과정에 가담하는 탈경계는, 경계를 이어가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제거한다. 탈경계의 시공간에서 주체는 섭리 없이 부유하는 먼지 입자 같은 존재를 초극하고 충만한 전체와 조우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