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창 전(5.16일-6.29, 사비나 미술관)
리경 전(5.24-7.21, 코리아나 미술관)
한기창 전과 리경 전은 둘 다 어둑한 공간에서 빛을 매개로 한 일련의 서사를 들려준다. 환자의 X-레이 사진을 이용한 한기창의 작품과 종교라는 상징적 우주를 레이저 광선으로 표현한 리경의 작품은 모두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려한다. 하나는 몸이고 하나는 정신이지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성의 장에 배치하는 과정에 임상의학적 시선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으로, 신앙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한 기술적 방법론과 만난다. 이들에게 빛은 어둠 속에 잠겨있는 실재를 명확한 언어로 드러내는 수단이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 요소이다. 이념, 관념, 개념 등, 보이지 않는 것에 몰두했던 이전 시대의 작가나, 상품 이미지나 스펙터클 등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신세대 작가들과 달리, 대조되는 항 사이의 유의미한 관계를 통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태양에 의존해 살아가는 지구에서 빛은 생명의 근원을 넘어서 진리의 은유가 되어왔다. 빛은 물리적 우주뿐 아니라 상징적 우주도 가득 채운다. 인류의 대표적인 신화와 종교들은 빛의 상징주의를 중시했다. 빛은 신화와 종교를 비롯한 상징적 우주가 쇠퇴함에 따라 진리의 은유로서의 위상이 약화된 듯하지만, 현대 기술과학을 이끌었던 계몽(enlightenment) 역시 빛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보존한다. 그것은 ‘이성의 빛’이라는 은유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빛을 형이상학적 전통 속에 연구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현대로 올수록 진리의 자연적인 발산력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제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한다. 빛을 다루는 시각 예술가들은 진리를 드러내려는 드라마 속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한기창, 임상의학적 시선에 의해 재현된 몸
한기창 전의 부제인 ‘AMOR FATI’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를 사랑함으로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가장 치명적인 운명은 질병과 죽음이다. 병의 증후를 나타내는 의학 자료들과 치료기구들은 큰 교통사고를 이겨낸 작가의 운명애(AMOR FATI)를 증거 한다. 완전히 부서지다시피 한 뼈를 치료하기 위해 찍은 수많은 엑스레이 사진들은 치유의 과정과 새로운 작품의 출발을 중첩시킨다. 비정상이 정상의 감각을 일깨우듯, 질병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일깨운다. 전시에 사용된 자료들은 질병의 징후와 치유 과정을 드러낸다. 의사가 환부에 칼을 대고 약을 투입하지만, 치료라는 것은 자연과의 협업과정이다. 이 전시에는 파괴를 복구하는 생명의 힘이 여러 차원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조명된다.

혈관과 뼈 같은 인체의 기관들은 풍경으로, 풍경은 몸으로 전환된다. 전환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순환을 이룬다. 한기창의 작품에서 투명한 필름을 통과하는 빛은 소우주와 대우주간의 연결망을 만든다. 질병의 징후들이 하늘거리는 물속의 해초, 해골 위의 나비, 돌아가는 휠체어 바퀴 등과 결합되는 작품들은 자연회귀라는 메시지를, 이 전시의 부제를 탄생시킨 니이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연결시킨다. 환부조차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화려하게 빛내주는 엑스레이나 LED를 낳은 근대 과학은 진보나 발전이라는 단선적인 시간관과 조응하지만, 작가는 이 선적 시간관을 보다 큰 주기 속에 포함시킨다. 그것은 동양의 세계관과도 조응할 수 있는 순환적 시간이다. 어느 순간 질병으로 보이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보면 그 또한 신비로운 생명의 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도약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기창은 초월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꼼꼼하게 임상의학의 시선을 반복한다. 몸이라는 어두운 대륙이 투명하게 드러난 것은 임상의학의 탄생에 의해 가능했다. 먼저 해부학이나 현미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고, 엑스레이나 내시경은 해부 없이도 몸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했다. 그의 작품 속, 뼈를 잘라내고 근육과 피부를 갈라내는 수술도구들은 투명한 가시성의 장 아래 놓여 있는 물질로서의 몸을 일깨운다. 미셀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대상이 근대에 와서 명쾌한 임상 의학적 시선 안에서 포착되었다고 말한다. 푸코는 임상의학적 시선에서 점차 어둠으로부터 광명의 빛을 찾아 나오는 모든 권력을 본다. 거기에는 알고 결정하는 시선, 즉 지배하려는 시선이 있다. 몸이라는 어둠의 왕국에 새로운 시선의 왕국을 세워 놓은 임상의학은 문법구조와 수량적 가능성의 영역을 도입함으로서, 가시성의 장을 열었다.
임상의학에서는 보여 진 존재와 말해진 존재를 통해서, 질병의 속성이 진리 안에서 드러난다. 근대의학은 구체적 인간의 몸을 합리적 언어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드러나는 장을 완전히 새롭게 코드화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려는 과정은 치유와 교정을 넘어, 몸을 촘촘한 정치의 그물망(biopolitics) 아래 놓는다. 몸의 코드가 완전히 해독되고 프로그램 되면 치유가 완성될까? 지식과 권력과의 밀접한 속성을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몸은 완전히 코드화 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과학(의학)과 예술의 분기점이 생겨난다. 과학자나 의사 못지않은 분석적 시점으로 작업 해온 한기창에게 몸을 비추는 빛은 운명, 사랑, 생명처럼, 물질 너머의 것들을 향한다.
리경,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리경의 ‘more Light’ 전에서 빛은 빛에 기대되는 바의 명약관화함을 포기한다. 빛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의 사이에서 매 순간 그 경계를 갱신하는 민감한 표면이 된다. 공간을 가득 채운 연기 입자는 빛의 단면을 역동적 표면으로 만든다. 거의 텅 빈 전시공간은 좀 더 많은 빛이 좀 더 많은 것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도 좌절시킨다. 작품 [more Light]는 거울과 유리로 된 수평의 층이 정십자 공간을 만들고, 말단에서 쏘여지는 레이저가 만들어내는 반사에 반사를 거듭하는 면이 그 안에 들어선 관객을 비춘다. 관객은 맞은편에 보이는 블랙홀과도 같은 실루엣을 통해 자신이 검게 삭제되어 있음을 느끼고, 그자체도 실체감 없는 빛의 얼룩으로 변해버린다. [more Light]의 효과는 유리 두께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틀어짐에서 온다. 그것은 완전한 겹쳐짐이 아닌 빗나감이 편재하는 공간이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결코 투명하게 대상에 도달하지 않는다. 빛은 명료함이 아니라 불명료함을 극대화한다. 빛은 층층으로 구조화된 수많은 매개과정을 거치며, 대상의 위치와 상태에 따라 다르게 현상한다. 겹겹이 드리워진 방해물은 의미를 밝히려는 의지를 더욱 고양시킨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그것의 상징적 구조와 위치, 그리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작품 구조와 관객 위치의 조합에 따라 빛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최고 높이가 8미터인 천정에서 떨어지는 분홍빛 광원은 각을 많이 낸 렌즈의 반사면 때문에 교란을 넘어 분열을 꾀한다.
지하 공간의 작품 [I am telling a lie]는 높은 천정까지 가득 메워진 연기, 그리고 벽과 바닥의 동일한 표면 처리를 통해 이음매 없는 공간을 연출함으로서, 이 무한한 공간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붉은 레이저의 선, 또는 면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한다. 빛과 만나는 자리에만 면이 보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길, 그 뒤로 이어진 계단이 드러난다. 빛은 독재자처럼 한 지점에 한 관객을 위치 지운다. 그러나 또 다른 작은 방에서는 정 반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눈이 멀 정도로 강한 빛에 등을 돌려야만 자신이 서있는 위치와 가야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절대적 타자 앞에 주체를 곧게 세우는 힘이다. 동시에 이에 등 돌리는 사건을 통해서야 깨달음이 가능한 반전과 역설의 드라마를 이끈다. 여기에서 빛과 상호작용하는 몸은 객관적인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다. 육체는 자신이 지각하는 환경에 매 순간 반응하는 일종의 감응체계이다.
거대한 공간 그자체가 작품인 감각의 현장은,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말하듯이, 그곳의 모든 점이 추축(樞軸)이 되고, 모든 선이 위상이 되며, 모든 표면이 평면이 되고, 모든 색이 분위기가 되며, 모든 음이 화음이 되는 존재의 왕국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처럼 운동하는 입자들이 표면화, 전면화 되는 공간에서 감각은 의미와 방향을 일치시킨다. 메를로 퐁티는 불가분적 힘이 그 자신에게 현전하는 항에 투사하는 것이 바로 주체성이라고 말한다. 주체성은 움직이지 않는 자기 동일성이 아니다. 주체성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에게로의 열림이다. 몸 역시 자기충족적인 존재가 아니다. 몸은 세계와 대면해 있다. 리경의 작품은 세계와 몸 사이에 필요한 접촉면을 만든다.
출전; 미술세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