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연의 도시풍경에는 사람들 대신에 사람 사는 흔적만 있다. 기존의 구조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새로운 구조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 안팎의 삶들이 익명적 구조들을 잠식한다. 이러한 잠식은 빈곤과 무질서의 산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점차 강화되고 있는 일률적 구조와 길항작용 하는 이질적 요소로 다가온다. 그곳들은 사적 소유의 침해가 금기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 것과 내 것을 구별 지으려는 명확한 경계들이 무너져 있거나 취약하다. 김희연의 그림에서 위기에 처해진 것들을 대표하는 듯한 나무는 비좁은 입지 와중에도 경계를 넘나든다. ‘경계의 그늘’이라는 전시부제는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가 작동되기 위해 만들어진 경계들 안팎을 변두리 도시풍경을 통해 보여준다. 풍경자체가 과도기적이다. 곧 사라질지 모를 풍경에는 향수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작품 속 도시의 모델이 된 곳은 구시가지 외곽으로, 인천, 동두천, 청량리, 그리고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석관동 등이다.
풍경은 전경이 아니라 부분으로 포착되어 있고, 관심을 끈 일부분만 강조하여 그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특정 장소임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현실을 채우는 잡다한 지형지물이 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생경한 분위기로 치환된다. 값싼 감상주의는 자제되지만, 간혹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의 힘은 그것들이 극히 현실적인 소재로부터 왔다는데 있다. 김희연의 그림에는 현실이 상상이나 상징보다 더 풍부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기억에 의해 여러 곳이 조합되기도 하고, 생략은 하지만 없는 것을 더 보태지는 않는다. 작품 속 장소들은 ‘저발전의 상태’ 즉 개발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 재개발이 안 되어 있는, 그렇지만 곧 재개발이 될 장소들이 많다. 언제 이주할지 언제 뜯겨질지 모르므로, 많은 사물들이 좌표로부터 벗어나 제자리를 잃은 듯 어정쩡하게 펼쳐져 있다. 도처에 방치된 사물들이 낯선 병치를 만들어내고, 얼마 전까지 그곳의 외지인이었던 작가의 눈에 어김없이 포착된다.
이상하게 다가오는 풍경 중 하나가 공사장 가림 막 사이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다. 나무는 구조물에 의해 포위되어 있고, 지상의 잡다한 것들 위로 뚫린 하늘만이 태양과 바람을 향한 자연스러운 뻗어나감을 받아준다. 나무의 숨통을 잠시 틔워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조여 가고 있는 듯한 건물구조, 이 이상한 조합은 원래의 나무자리가 침해되어 생겨났을 것이다. 이 부당한 침해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은 강인하게 생명력을 이어가며 말없이 불안한 변화를 지켜본다. 인적 없는 풍경에서 인간이라는 등장인물 대신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나무이다. 이런 저런 건물이나 가건물에 치어서 주변화 된 나무들은 뿌리 뽑힐 위기에 있는 모든 삶을 압축한다. 풍경 속 나무는 전통적 풍경에서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마을 어귀를 지키는 상징적 중심을 차지하지 않으며, 대규모 도시계획에 의해 어디에서부터인가 공수되어 설계도에 지정된 녹지를 채우지도 않는다. 나무들은 주변의 낡은 집들만큼이나 그곳에 오래 있었지만 그것들의 자리는 불안정하다.
김희연의 도시풍경이 주는 낯섦은 장소의 특성 뿐 아니라, 원근감마저 모호한 부분들을 포착하는데서 온다. 난개발 지역은 전체를 관통하는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다. 조망적 시점과 관계없이 문득문득 부분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낯설다. 뭔가 더 이어져 있어야 하는데 딱 잘려있고, 상호 이질적인 것들이 접붙여진다. 작품에 따로 꼴라주 기법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현실자체가 생경한 꼴라주인 것이다. 가건물 구멍 위로 솟은 나무 풍경이 대표적이다. 가건물과 나무가 등장하는, 2011년과 2012년에 집중적으로 그린 [숨] 시리즈는 작품 규모나 수로 봐서 전시를 대표한다. 작품 <숨#5>은 밝은 색 가건물 위로 나무 솟아 있는데, 가건물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가 ‘경계의 그늘’이라는 전시부제를 떠오르게 한다. 나무 그물망의 자세한 표현은 고난 중에도 이어가는 강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공사장 펜스나 가림막 사이로 뻗쳐 나온 나무가 있는 [막] 시리즈는 좀 더 어수선한 세팅 속에서 삶을 부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래된 건물과 나무의 조합도 안정적 풍경을 이루지는 못한다. 2011년 작품 [틈]이 보여주듯, 건물과 담사이의 좁은 공간에 침엽수가 자라는 식이다. 나무는 틈들 사이에 꽂혀있을 뿐이다.

이러한 과도기적 풍경에서 자연만을 위한 넉넉한 자리는 없다. 인적 없는 풍경에는 밀려나는 자연과 등치되고 있는 어떤 삶이 내재한다. 타자화 된 나무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옥상 같이 관심을 벗어난 장소에서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거친 도시생태계 속에서 나무들은 적응하고 공(共)진화한다. 방치되어 있는 누추하고 오래된 된 건물과 자연은 쓸쓸한 빛을 받으며, 어떤 새로운 괴물로 채워질지 모를 임시적 공백 위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더 이상 연기가 나오지 않는 굴뚝,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철제 탑, 오래된 공장 등은 공사장 펜스의 틈에 고개를 내민 나무만큼이나 과도적이다. 특히 나무만큼 자주 나타나며 비슷한 수직적 구조인 굴뚝은 나무만큼의 풍부한 디테일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오직 하나의 욕망만으로 추동된 채 위로만 솟구쳐 있을 뿐이다. 나무숲들 사이에 비죽이 솟아있는 그림 속 굴뚝들은 왜 무엇 때문에 거기에 서 있는지 모호하다. 그것은 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음울한 구조적 비유가 아닐까.
풍경 속 하나둘 씩 연기가 꺼져가는 굴뚝들은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타자를 착취함으로서 유지될 뿐인 신자유주의 시대 성장의 그늘을 보여준다. 굴뚝 산업들은 이제 또 다른 저개발국가로 이식될 것이다. 풍요를 지향하는 사회를 특징짓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방해하고 있는 흉물들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세워졌을 그것들은 나무보다 더 단명할 것이다. 김희연의 작품에는 등장하는 구시가지들은 오랜 도시의 안정된 모습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공사 중이고 건물과 가건물의 차이도 별로 없다. 구시가지들 역시 자연적이기보다는 그자체가 개발의 결과물일 것이다. 좀 더 빨라진 시간의 주기에 의해 갱신될 것을 요구받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차가운 추상적 구조 역시 시간의 힘에 의해 자연화 된다. 김희연의 작품 속에서 많이 발견되는 자연화 된 구조는 새로이 발흥하는 구조에 의해 휩쓸려가는 중이고, 그것이 과도기적인 풍경을 만든다. 생명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더욱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을 주는 틈새의 나무들 또한 개발될 당시에 함께 식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힘에 의해 재구조화되기를 기다린다.
발전지상주의적인 비전 아래 놓인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물에 대한 시간의 처분은 가혹하다. 집은 단순히 추상적 공간 속에 위치하기 보다는, 지상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가장 안정된 장소로 기대되지만, 압축성장을 해온 한국사회에서는 바다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받아왔다. 이러한 이상한 항해에서 점차 소수만이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는 반면, 더 많은 이들은 멀미를 느끼게 된다.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이 만들어지기 위해 기존의 흔적이 삭제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한 파괴인지 알 수 없는 파편들에는 의구심만 가득하다. 우리의 근대화는 개발이라는 하나의 모델을 따라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그자체 만큼이나,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은 양면적 과정이었다. 마샬 버만은 [현대성의 경험]에서 현대문화의 영웅으로서 파우스트를 든 바 있다. 파우스트 신화가 추구했던 현대적인 자의식은 발전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충동이다. 파우스트가 원하는 것은 쾌락과 불행 같은 인간의 모든 경험적인 유형을 포함하고, 또 이러한 것들을 자기 자신의 끝없는 성장과 결부시키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자아의 파괴까지도 자아의 발전에서는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것은 발전에 합당한 커다란 손실을 야기한다. 이것이 파우스트와 악마와의 관계에 대한 의미이다. 모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끔찍스러운 세력을 야기할 수도 있는 음침하고 두려운 에너지에 의해 발전될 수 있다. 여기에는 창조성과 어둠의 결합이 있다. 파괴에 대한 악마의 탐욕은 창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이러한 파괴력과 더불어 세상에서 어떤 것이든지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꼼짝 않고 있다면 나는 노예가 될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사건의 급류 속에 뛰어드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한다.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쉬지 않는 행동이다’ 파우스트는 현대생활에 대한 무엇인가 가장 창조적이고 무엇인가 가장 파괴적인 잠재력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는 파괴자와 창조자의 합성인, 즉 우리시대에 ‘개발자’라고 부르게 된 암울하고도 애매모호한 인물이 될 것이다. 서구에서의 현대화의 폭발적인 분위기, 즉 공동체의 와해와 개인의 심리적인 고립, 격리된 대중과 계층 간의 대립, 윤리적이고 정신적으로 절망적인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한 문화적 창조성이 주변부에도 이식된다.
권력의 중심을 향해 있는 순차적인 재현의 과정에 의해 주변부에도 주변부가 생겨난다. 김희연의 작품 속 구 시가지들이 이러한 이중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 향상을 위한 진보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한국의 자원도 없는 좁은 땅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교육열과 재개발 열풍을 낳았다. 땅(주거)과 교육문제는 여전히 다수의 행복에 발목을 잡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남아있다. ‘진보’란 늘 오해의 여지가 있는 모호한 개념이었고, 정치적 보수주의를 재생산해오곤 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물질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그러한 열풍도 기성세대의 열망일 뿐이다. 김희연 또래의 젊은 세대에게는 성장의 한계가 목도되고, 변화를 위한 변화에 대한 어지러움증이 더 많이 감지되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왔던 작가에게는 구시가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성년이 넘은 어느 해인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풍경들이고, 작품에 내재된 향수는 얼마 전에 발견한 그것들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함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작품 속 그곳들은 너무 주변화 되어 변화로부터도 소외된, 즉 지체된 발전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특정한 모델을 겨냥한 발전에의 열망은 변수와 시차를 가질 수 있고, 성장 자체가 이러한 차이를 벌림으로 인해 가능하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단선적 회로에 속히 진입하려는 욕망에서 단절감은 필연적이다. 단선적 진보와 기대를 좌절시키는 또는 무리한 도약을 요구하는 단절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개념적 쌍이다. 여기에 진보의 역설이 있다. 생산과 소비의 장을 구별하고, 하나의 욕망으로 소비를 집중시키는 과정은 과도한 밀집 속에 공백을 낳는다. 도시는 하나로 수렴되는 시간의 주기에 모두들 복속된 생산자/소비자들의 주거기계가 되었다.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 김희연의 풍경에는 밀집된 주거환경 속 텅 빈 광경, 세워진지 몇 십 년 도 안 되어 낡은 것이 되어 처분되기만을 기다리는 건물, 자연과 인공의 기이한 만남이 있다. 작가는 과도기 속에 존재하는 공백에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들의 자취들로 가득 채우거나, 위기에 몰린 생명의 그림자조차도 공들여 표현한다. 그것이 숨 막히는 개발에의 갈망에 숨통을 틔워놓는 작가의 방식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이력이 반영되어 있는 듯 리넨에 아크릴로 칠해진 작품에는 종종 여백에 할애된 화면이 발견된다. 지붕이나 담, 하늘 등으로 나타나는 여백은 미세한 생명의 그물망으로 가득 채워진다. 소외감을 주는 풍경에 빠질 수 없는 서늘한 그림자는 과도기적인 풍경에 실체감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림자 없이 공회전하는 시뮬레이션 시대에도 사라질 수 없는 현실감각이다. 한낮의 빛 속에 잠긴 야트막한 건물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정지된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킨다. 그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기에 더 오랫동안 시선을 머물게 한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낳는 고층빌딩을 위해 뭉개져야할 임시적 풍경에는 이미 폐허의 기운이 역력하다. 수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도심 한가운데 존재하는 폐허 속 적막에는 막연한 신비로움보다는 우리 시대 삶의 단면이 드러나 있다. 김희연의 풍경은 변화를 위한 변화, 더 정확히는 자연을 포함한 다수의 삶을 뿌리 뽑는 맹목적인 변화에의 지향을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