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고가 각기 다른 방들로 이루어진 공간은 그 다음에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동굴탐사처럼 미지의 장소를 향하게 한다. 그러나 전시 공간은 동굴처럼 어둡거나 비좁지는 않다. 석순처럼 바닥에서 올라오거나 천정에서 내려오는 구조물들은 모두 하얗다. 마지막 방에 안치된 동물상들과 기묘하게 생긴 가구들 역시 그렇다. 공간을 채우는 사물들은 하얗게 칠해진 표면만큼이나 인공적이다. 첫 번째 방에서 만나게 되는 탑 같은 형태는 가구의 다리를 만들 때 쓰는 돌려 깍기 기법으로 둥글려진 나무들이 수직으로 쌓여 있다. 두 번째 방에서는 고드름처럼 천정으로부터 하얀 입방체들이 내려온다. 첫째, 둘째 방에서 발견되는 대칭과 정방형 구조는 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얀 표면은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본래의 재질을 숨기고 있다. 마지막 방에서는 아래서부터 올라온 가구 다리와 위에서부터 내려온 박스들이 합체된 듯한 것들이 모여 있다. 그 위에 올려놓은 동물상들은 마치 박스 안에서 꺼낸 듯한, 또는 곧 그 안에 넣어질 듯하다.

 

가구다리와 박스, 동물상이 합체된 형태는 수직으로 쌓기라는 공통된 방식을 보여준다. 장리라의 이번 전시에서 주된 방법론인 쌓기는 비좁은 일상공간에서 무엇인가를 첩첩이 쌓아놓을 수밖에 없는 생활 경험으로부터 왔다. 이전 작업에서 벽을 타고 구부러진 소파 같은 초현실적 가구들은 유학시절 좁은 집에서 부대끼면서 생성된 상상이었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나 그 안을 채우는 물건들은 늘어만 가는 것이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다. 공간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법한 것들을 죽 쌓다보면 서로 이질적인 것들도 기묘한 어울림을 낳는다. 수직으로 쌓여진 것들에서는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수직은 수평과 달리 살아있음의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건을 옮기기 위해 거칠게 만들어진 나무 박스는 매끄럽게 표면처리가 된 우아한 가구다리가 붙어있으며, 동굴벽화가 그려지던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동물들은 포장과 이동이 용이한 현대적 사물의 방식과 결합되어 있다. 토템처럼 보이는 원시적 동물상과 현대의 일상적 기물이 만난다.

 

동물상들이 섬처럼 모여 있는 한편, 여행용 트렁크 가방이 첩첩이 쌓인 것과, 앉는 또는 무엇인가 놓여 질 부분이 스폰지와 인조털로 둥글게 부풀려진 것은 쌓기가 만들어낸 변형, 그리고 변형에 내재된 물활론적인 분위기가 있다. 수직 방향으로의 상승은 유기체의 성장을 연상시킨다. 이번 전시에 주로 보여주는 동물머리 작업들은 이전에 만들었던 초현실적 가구들이 유기체적인 느낌을 주는데서 출발하였다. 작가는 고정되어 붙박혀 있곤 하는 가구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유기체적인 꿈틀거림을 발견한 것이다. 세라믹과 FRP 등으로 만들어져 재질감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하얀 도색을 통해 통일감을 주는 동물 형상은 일종의 좌대 위에 위엄 있게 배치된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양, 토끼, 고양이, 멧돼지, 수달, 강아지, 올빼미 등이며, 미어 캣과 부엉이는 머리가 셋으로 되어 있는 등 신화적인 형태가 있다. 기념비적 형태를 갖춘 동물들은 좌대 위에 놓여 져 추앙되고 공간을 지배한다. 동시에 그것들이 놓인 자리는 물건을 담아 나른 후 폐기되는 포장 용기처럼 일시적이다.

 

그것들은 자못 기념비적 양식을 갖춘 듯하지만, 그 토대는 취약하다. 싫증나기 쉬운 장식품처럼 그 존재감이 희미하다. 동물상들은 신화시대의 상징적 우주에서처럼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의 기념비는 그것을 향유할만한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상징의 힘을 잃고 세워지자마자 몰락의 기미를 띠며 대부분 장식물로 전락한다. 세라믹이나 자동차 도료와 마감된 표면에는 장식적인 면모가 있다. 신화 속의 동물들은 이제 거대한 문화산업의 도구가 되어 상품으로 유통되기 용이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포장용기로 이루어진 좌대는 유통의 회로 속에 편입된 자연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얗고 매끄럽게 가공된 동물들은 자기 본래의 색을 잃고 현대적 상품의 코드에 맞추어 탈색된다. ‘색깔’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1차적인 코드이다. 이 동물상들은 자기색이 없는 것이다. 종과 관계없이 모두 매끈한 하얀 표피로 마감된 동물들은 원래의 거친 야생성을 숨기고, 위생 도기류의 청결함과 깔끔함으로 포장되어 있다.

 

유령처럼 모호한 양상을 띄는 동물들은 인간이 자기 편의를 위해 그어놓은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변질된다. 이러한 변형은 현대에 맞게 진화된 동물/사물의 형태로 보여 진다. 다양한 종들이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지만, 색채나 배치 등 일관된 형식을 통해 마치 한 개체가 동질이상(同質異像)의 형태로 변신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한 공간에 오밀조밀 모여 있음으로 인해, 잠재적인 운동감, 즉 이행하는 느낌을 준다. 특히 그것들은 머리 형태이기에 상상을 통한 변모가 연상된다. 아래의 박스 안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면 곧장 자신이 원하는 다른 종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술적 형상들이다. 서로를 명확하게 구별 짓는 경계는 사라지고 뭉게구름 같은 가변성을 가진다. 상상력은 서로 다른 것에서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상상력은 오성과 이성의 개별화시키는 것들을 종합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한다. 분업화된 근대사회에 넌더리 치던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을 이성 위에 놓았다. 상상력은 이성보다 그들을 더 충만하고 만족스럽게 해주었다. 셸리는 ‘이성과 상상력 사이의 관계는 도구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 육체와 정신,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상상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변신은 정신과 자연을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예술작품은 자연과 상상을 매개하는 상징이 된다. 그러나 장리라의 작품은 인간적 상상의 한계 또한 드러내는 듯하다.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시키는 상상은 동시에 차이를 간과하곤 하는 것이다. 자연의 다양성이 주는 차이는 신화적 원형을 반복하는 행위에 의해 묻혀 진다. 박스 위의 하얀색 일색의 동물 조상들이 말하는 것은 상상 또한 당장의 필요와 기능만을 추구하는 현실만큼이나 천편일률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질성은 친숙한 인간화로 덮여진다. 현대의 캐릭터 산업에 나타나듯이, 그것들은 거의 동물의 탈을 쓴 인간들이다. 실제로 장리라의 이전 작품 속 동물상들은 탈처럼 뒤집어 쓸 수도 있게끔 고안되어 있었다. 한편 본능적 반응을 요구하는 현대의 표피적 환경들은 억압되어 있던 동물성을 다시금 끌어들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동물들은 심신 양면에서 인간중심의 목적론에 복속되어 왔다.

 

탈색되고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직립하고 말하는 인간을 닮은 장리라의 동물상들은 인간화된 동물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역사는 인간의 인간화와 동물의 길들임 사이의 상관성을 확인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대개 동물이었다. 죄 많은 인간 대신에 속죄하는 존재들은 순결의 색을 둘러쓰고 있을 법도 하다. 인간과 동물간의 명백한 서열관계 속에서 정신분석학은 인간 깊숙한 곳에 동물성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귀환인지 전락인지는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성큼 다가온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인간이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동물성은 다시금 돌아온다. 장리라의 작품은 건조하게 느껴질 만큼 중성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어느 한쪽에 악역을 맡기는 판단을 보류한다. 그러나 작품 속 동물들이 그 이질성과 차이를 잃고 순화되어 인간의 세계에 편입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신화와 일상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산업에 의해 오용되곤 하는 자연이란 자원은 대중의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계몽 이전의 신화시대와 연결되어 있다. 시인 블레이크는 ‘불행하게도 인간은 신화의 세계를 먼저 습득하며, 그런 뒤에는 가능한 한 그것을 실제세계로 위장하려 한다’고 했다. 자연은 물론, 인간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물조차도 그 자체의 현실성만으로 온전히 서있기는 힘들다. 그것들은 원시시대의 신화부터 현대의 정치나 광고가 부추키는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으로 지탱된다.


이러한 지지물로 만들어진 아우라는 실체와 본질이 제거된 현대적 사물을 가득 채운다. 장리라의 작품에서는 쌓기를 통한 섞기가 이루어지지만, 그 원칙은 분명치 않다. 그것들은 지층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 공간적 구조이지만, 마치 무의식이나 욕망처럼 하나의 뒤를 잇는 그 다음 하나를 예상하기 힘들다. 이 유령 같은 존재들에서 자의와 자유를 구별하는 경계는 확실치 않다.

 

계몽의 시대처럼 자유를 ‘필연의 인식’으로만 볼 수는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자의의 바탕인 우연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장리라의 쌓기 작업에는 놀이적 측면이 있다. 작업은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물리적 법칙만 준수하면서 수행되는 놀이의 규칙이 관철된다. 가장 안쪽에 있는 동물상을 만나기 위한 관객의 여정에서, 자연은 인공에 특유한 기하학, 가령 몇 가지로 한정된 구성요소로 레고 블록을 쌓듯이 올라가는 나무 기둥이나 테트리스 게임을 닮은 정방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한다. 이 전시의 대표색이라 할 만한 흰색은 고요함 속의 질서라는 고전성과 청결과 기능에 충실한 현대성을 동시에 부각시키며, 조각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흰색은 단지 여러 색중의 하나가 아니라, 근본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색을 잃은 세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이러한 상실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시작을 가리킨다. 옛 지도에서 미지의 장소를 하얀 공백으로 표시하곤 했듯이, 하얀 도화지 같은 텅 빔에는 다양한 상상적 투사와 변형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출전; 부산 조현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