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권의 도시풍경은 무엇인가에 취한 듯 모든 것이 단단한 지반과 경계를 잃고 출렁거린다. 그러면서도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장소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지표가 남아 있다. 모든 것을 꿈결같이 뭉글거리게 만드는 환상성은 단지 붕 뜬 뭉게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연결 고리가 있다. 이러한 연결고리가 환상성을 배가시킨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현실과 환상은 상반되기보다는 서로에게 힘을 주는 상보적인 것이다. 환상성 없는 현실, 현실성 없는 환상은 힘을 못 쓴다. 현실과 환상의 역학관계는 재현주의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김병권의 작품은 묘사이면서 변형이고 현실에 바탕을 둔 초현실이다. 모든 정확한 목적과 기능을 가지는 도시 문명의 선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몰아치지만,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알아보게 만들 수 있는 경계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경계의 침식은 경계를 경계로 알아보게 만든다. 기이함이나 그로테스크는 반드시 이러한 경계의 역학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도시생활의 긴장을 야기하는 경직된 선들은 원래의 자리로부터 탈주하여 격렬하게 또는 부드럽게 율동한다.
작품 속 장소가 삼청동과 인사동, 홍대 앞과 강남, 종로와 여의도 등임을 봐서, 이러한 흥청거림은 소비도시의 특징을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지표가 남아있는 장소성, 그리고 그것의 왜곡은 사진과 컴퓨터, 그리고 회화와의 협업을 예시한다. 김병권의 회화에는 직접적인 체험 뿐 아니라, 미디어로 매개된 체험이 함께 녹아있다. 사진이나 영상은 ‘기억의 지속’이라는 이 전시의 부제에서 기억, 그리고 지속을 도와준다. 그러나 그 모든 직간접적인 체험을 최종적으로 종합하는 것은 회화라는 점에서 그는 화가이다. 그 또래의 세대답게 사진도 많이 찍고 인터넷 검색도 열심히 하지만,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스케치부터 붓으로 할 정도로 붓은 그의 손에 들러 붙어있다. 그에게 몸과 무의식까지 깊이 침윤되어, 자연발생적이다시피 한 미디어는 아직까지는 회화이다. 큰 붓으로 과감하게 그려진 그의 최근 그림은 도시의 유동성이 두드러지며, 이러한 유동성은 활기와 더불어 불안감을 준다. 그것은 나른함부터 암울함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의 폭으로 진동한다. 도시 풍경에서 빠질 수 없는 고층 빌딩들은 요동치고, 머리 또는 꼬리 쪽으로 불을 토하는 차들은 괴물 같다.
불안함을 주는 풍경은, 재개발 지역에 살면서 도시의 급격한 성장과 팽창을 목도해왔던 그의 이력과 차에 대한 트라우마로 해석가능하다. 지금 울렁거리는 현실은 뜬금없이 부유하는 환상이기 보다는 말 그대로 ‘기억의 지속’일 수 있다. 그의 도시 풍경은 아침이나 한낮 보다는 저녁 무렵부터 밤까지의 시간대가 더 많은데, 그 시간대는 인상보다는 기억을, 분리보다는 지속을 고무한다. 또한 이러한 야경에서 도시가 뿜어내는 인공 광원은 카메라의 긴 노출시간 때문에 지속의 느낌을 준다. 밤은 주로 소비의 시간이지만, 사람들을 많이 생략하는 탓에 장면은 북적거림 보다는 몽환성이 두드러진다. 나른한 몽환은 때로 불길한 악몽으로 돌변한다. 최근작에 많이 등장하는 헌법 재판소, 시청, 국회 같은 공공기관이 있는 풍경은 공권력에 작가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낸다. 공공적인 영역 또한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허상 같은 느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공공건물은 혼돈 속에 함께 흔들거리기 보다는 이러한 혼돈의 원인처럼 보인다. 근대의 계몽이 자유와 함께 억압 또한 만들어 냈듯이, 무질서는 질서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질서로부터 파생된다.

이 전시의 대표작인 <persistence of memory-1>은 비 오는 날 저녁 시청사 풍경을 보여주는데, 붉은 색 하늘을 배경을 뒤로 한 울렁거리는 건물의 검은 실루엣이 대파국이 도래하기 전야의 묵시록 같은 기운이 가득하다. 홍수처럼 흐르는 아래의 차량 전조등은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 이편으로 밀려올 듯하다. 국회가 나오는 작품 <persistence of memory-5>에서 짙게 깔린 먹구름이나 돌진하는 또는 화염에 휩싸인 듯한 차량에서 신뢰감 있는 정치 중심지로서의 면모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건물과 차량의 조합은 도시풍경의 전형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수직 수평의 두 축 모두가 유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수직의 흔들림의 수평의 흐름과 연합되고 그 사이에서 많은 변주가 있다. 거대 차로 사이의 고층건물이 있는 도심이 아닌, 낮은 건물들이 서로 마주하는 인간적 스케일이 남아있는 밀집 복합형의 구도심, 가령 삼청동 같은 장소에서 울렁거림은 상대적으로 기분 좋은 활기로 다가온다. 구도심은 모든 저항들을 뚫고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장소가 아닌, 걷고 머물고 대화하는 보다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익명적 구조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인간들끼리의 사회적 접촉이 차단되지 않는 그런 동네에서 접촉은 사고가 아닌 소통이다. 작품 <persistence of memory-10>은 이 전시에서 흔치 않는 낮 풍경이며, 인도 위에 사람들도 보인다. 좋은 날씨에 평화로웠을 것 같은 날의 풍경이다. 야트막한 가게들과, 가로수,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들이 아기자기한 작품 <sensitivity of memory-15>에는 유쾌한 들썩거림도 느껴진다. 구도심이라도 본격적인 유흥가가 되어버린 홍대 앞 같은 장소에서 요동침은 더욱 거세고 강렬하다. 작품 <persistence of memory-6>에서 건물과 차량이 일체화되어 흔들거린다. 엉클어져버린 경계선들은 그 안에서 흥청거릴 소비자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김병권의 작품에서 형태나 색의 왜곡은 단순한 조형적 재미가 아니라, 풍경에 투사된 작가의 느낌과 생각을 제시한다. 가령 작품 <persistence of memory-12>에서 텅 빈 도로에 배달 오토바이가 홀로 있는 풍경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속해 있는 반쪽은 야경처럼, 나머지 반쪽은 낮 풍경같이 처리한 작품은 밤낮이 공존하는 초현실적 풍경인데, 그것은 밤낮의 구별이 없는 도시를, 동시에 밤낮의 구별이 없는 암울한 노동을 예시한다.

도시는 인간에게 새로운 자연으로 다가오는 총체적 환경이다. 인간은 도시에게 도시는 인간에게 흔적을 남긴다. 도시의 구조는 인간의 산물이지만 점차 인간이 구조의 산물로 변해간다. 자신으로부터 발원한 것이 아닌 것이자 자신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않는 구조는 변형에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욕망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시야와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나 욕망으로 출렁거린다. 구조 또한 유연화 되어 운동한다. 그림 속 도시를 이루는 스펙터클 대부분이 상품 및 상업 활동과 연관되어 있으며, 건물과 차량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간 조명은 그것을 주도해야할 인간을 삼켜버리고 자율적으로 돌아간다. 대중소비사회를 특징짓는 스펙터클은 물활론적 활기로 가득하다. 이러한 활기는 주체로부터 빠져 나간 힘이 되돌아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소외이자 불안이다. 이러한 무인지경에서 활기와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 중의 하나가 속도감이다. 김병권의 작품에서 유동성은 속도감이 결합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근대에 들어 새롭게 획득한 유연성과 확장성 덕분에 근대는 무엇보다도 공간을 정복하는 무기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에 와서 힘의 피라미드는 속도에 의해 그리고 운송수단과 그에 따른 이동의 자유를 누가 갖고 있는가에 따라 세워졌다. 오늘날 이윤을 창출하는 것은 생산품의 지속성과 오래 유지되는 신뢰가 아니라, 생산품의 순환과 재활용, 노화와 폐기와 대체 과정에서의 속도이다. 힘은 전자화 된 신호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즉시성은 공간의 저항을 무화하면서 대상의 물질성을 용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순간을 무한한 수용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즉시성의 시대에 합리적인 선택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서 있기는 더욱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족은 불가능하거나 영원히 유예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열기로 달구어진 근대사회는 변화를 위한 변화를 고무한다. 데이비드 하비에 의하면 근대적 진보는 공간의 정복, 모든 공간적 장벽의 철폐, 궁극적으로 시간을 통한 공간의 괴멸을 수반한다. 모더니티는 시간성을 즉 공간과 장소에서 존재보다는 생성의 과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며 유동성이 극대화되어 있는 김병권의 풍경은 전형적인 근대 도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의 풍경에는 차량 같은 이동수단 뿐 아니라 가로수나 교통 구조물, 건물같이 정지된 것에도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도시 및 도시적 삶 전체를 특징짓는 리듬의 가시화이다. 그의 풍경에서 이 리듬은 사는 기계(건물), 이동하는 기계(차량)가 주도하며, 간혹 등장하는 배달 오토바이는 기계의 속도와 결합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차량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기계와 접속된 채 속도가 지배하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며, 홀로 소비의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도시적 삶을 상징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던 작가의 체험이 투사된 인물이 분명한 그는 만화경처럼 시선을 끌어당기는 흥분과 일체화되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동떨어져 있기도 하다. 도시에서 소비자 아닌 사람의 자유는 없으며 그들이 설 자리는 마땅치 않다. 그의 풍경에는 특정 인간이 온전히 속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익명의 인간들이 단지 통과할 뿐인 장소들만 있다. 익명의 대중들이 일시적인 관계를 맺는 이 장소는 소비를 촉구하는 막연한 흥분만이 가득하다.
공공건물이 있는 공간이라고 해서 공공성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공적 공간은 시장이라는 하나의 장에 복속되고 있다. 공공기관이 등장하는 김병권의 묵시록적 풍경에는 공공성에 대한 시민적인 합의와는 무관한, 어디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부당한 힘의 제전이 펼쳐진다. 그의 작품에 팽배한 힘과 힘의 흐름은 현대적 삶을 지배하는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권력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그림 속 기상 현상처럼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 속의 구성원들이 속속들이 영향 받는 바로 그 힘이다. 힘은 에너지와 권력 등으로 읽혀진다. 그의 그림은 이 힘의 분포와 배치 그리고 그 흐름을 감성적으로 표현한다. 힘의 흐름은 꿈이나 갑작스런 기억처럼 객관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을 이어준다. 전시부제인 ‘기억의 지속’은, 근대이전의 자연 및 환경과의 안정된 관계에 근거한 기억이나 지속이 아닌, 단절과 도약의 무대이다. 단절과 도약은 꿈과 기억의 속성이며, 도시의 초현실주의적 속성과도 중첩된다. 그램 질로크는 근대 도시 연구의 선구자에 대한 책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와 기억과의 관계를 말한다.
저자는 벤야민이 영감 받은 프루스트적인 무의지적인 기억, 즉 즉각적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충격과 사건에 대한 재빠른 인식을 가져다주는 기억을 언급한다. 이러한 기억은 침묵하고 있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무언의 사물이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한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근대도시 파리는 그러한 기억의 무대였다. 그 기억은 과학기술적 객관성에 의해 추상적으로 나뉘어진 생에 지속을 부여한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대도시는 원경의 불빛과 만화경, 소리와 소음의 불협화음과 다양한 인공물과 오락거리가 쌓여있는, 끊임없는 자극과 현대적 중독의 장소였다. 도시는 그들에게 신비롭고 마술적인 꿈의 풍경이었고, 그들의 작품에는 현대성의 신화가 구현된 매혹적인 대도시를 배회했던 체험이 직간접적으로 녹아있다. 그러나 19세기의 파리로 부터 21세기의 서울로 도약하면, 초현실주의적 낭만이나 신비 보다는 맹목적인 힘의 흐름이 두드러진다. 근대 이후에 시간은 보다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지난날 장구한 세월의 전근대 시기 동안 시공간은 긴밀히 얽혀 있었고, 따라서 거의 구분 불가능한 삶의 경험으로서 견고하고도 외관상 침입불가능한 일대일 교신 속에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 순간부터 근대는 시작된다. 근대에 들어와 시간은 역사를 갖는다. 시간의 가속화와 더불어 공간은 더욱 통합되며 구별되는 차원이나 거리감을 상실했다. 모든 것이 압도적인 현재로 쇄도할 뿐이다. 상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망각은 장려된다. 기억이나 지속이라는 이 전시의 키워드는 인위적으로 이어진 것을 끊고, 끊어진 것을 이어준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근대도시를 채우는 경치 경제적 스펙터클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한 기원을 망각하게 한다. 노동의 흔적, 노동자의 희생을 망각하는 것은 물신화의 전제조건이다. 인간으로부터 빠져 나온 낯선 힘이 도시 풍경을 뒤흔들고 있는 풍경에서, 어디에나 즐비한 상품들은 난데없는 마법적 생산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도시에서 기억과 지속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일 수 있다. 그것은 왜,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지속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