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진은 시멘트 덩어리를 파서 그랜드 캐년 같은 기념비적인 지형을 만든다. 전시된 작품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기술과 노동이 투입되었지만, 단지 실제를 그럴듯하게 모사한 축소모형은 아니다. 일단 자연적 소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멘트 덩어리는 모사의 재료로 어울리지 않는다. 조각 재료로 흔치 않은 ‘시멘트’는 ‘나이롱’ 만큼이나 가짜스러운 것을 대변한다. 그는 처음부터 실재와의 대결을 포기한다. 막 지은 건물 냄새가 풀풀 나는 속이 텅 빈 시멘트 덩어리는 바위나 흙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추출, 정제된 것이다. 그는 땅에서 캐낸 대리석 덩어리처럼 일정한 크기의 시멘트 블록을 만들고, 그것이 단단하게 굳기 전에 커터 칼로 긁어서 형상을 만든다. 블록의 면이 남겨짐으로서 인공성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어떤 전체로부터 잘려져 나온 단편이지만, 전체는 일괄될 수 없다. 그것들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기 보다는, 일련의 계열을 이룰 뿐이다. 형태가 새겨지지 않은 매끈한 면들은 지지대나 다른 블록들과 연합하여 전체 풍경을 구축할 것이다. 그는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이라는 틀을 유지함으로서 동일성 속의 차이를 강조한다. 하나의 원본으로 출발하지 않은 형상들은 차이의 유희가 발생하는 장이다. 일련의 단위 구조들로 구축하는 방식이지만, 세모 네모 식으로 조합된 추상은 아니다.

 




 

그는 수많은 컷터 칼을 이용하여 수백만 년 전에 융기와 침식을 통해 독특한 지형으로 형성되었을 미세한 자연의 주름을 하나하나 새겨 나간다. 실제의 산은 지금도 서서히 변화하는 중이지만, 장소의 특이성을 알려주는 표시들은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이 전시는 그가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인 그랜드 캐년을 모델로 하였지만, 꼭 그 산만을 참조한 것은 아니다. 전시부제 ‘the mountain’은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거나 무의식 속에 저장된 산의 이미지들이 조합되는 장이다. 그의 작업실에 붙어있는 참조 사진들은 대부분 험준한 지형으로, 조각적 양감이 극대화 된 형태가 다수 발견된다. 그에게 산은 일종의 이상향으로, 특정 산의 재현이기보다는 닮음 꼴이다. 그의 양평 작업실도 산에 둘러싸여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가 흠모하는 산은 동네 뒷동산 같은 친근한 일상적 공간이 아니다. 그의 모델은 깍아 지른 기암괴석이 태곳적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세계의 명산들이며, 야트막한 녹색 산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지금 여기와는 동 떨어져 있는 별천지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실제로 가본다고 실재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실재계는 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다.

 

그런 곳에 가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투입될 희생이 산출될 희열보다 더 많을 것이기에 사람들은 어딘가를 그리워해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몸을 더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많은 인터페이스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상상의 여행을 더 많이 하곤 한다. 대신에 김한진은 실제의 탐험 못지않은 희생을 작업에 투여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나온 고통의 산물은 관광객들이 그곳에 가서 찍어온 수많은 상투적 여행 사진과는 또 다른 체험을 준다. 그것은 체험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의 등가물이다. 예술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참조대상과 아무리 가까워 지려해도 완전히 중첩될 수는 없기에, 오를 수 없는 그의 ‘산’은 실제의 차원과는 다른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 마음에 담아둔 산들에 가보기는커녕 등산조차도 즐겨하지 않는 그의 취향은 경험의 결과물로서의 예술작품이라는 상식을 깬다. 인생과 예술은 선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평행선상에 있는 등가물인 것이다. 재현주의나 표현주의에 내재된 이분법적 종속관계를 깰 때, 경험의 등가물로서의 예술작품은 다양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작가에겐 그가 온 시공간을 투여할 수밖에 없는 작업 과정 자체가 또 다른 경험을 산출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지옥과 천당을 오고가게 하는 것이 작업이다. 어쨌든 작품이란 것은 작업 중에서 나오는 것이지, 단순한 탐닉이나 꿈에서 나오지 않는다. 전시장 중앙에는 지층이 여러 모양새로 새겨진 시멘트 블록들이 부채꼴 형식으로 설치되어 있다. 조합의 방식에 따라 풍경은 다르게 펼쳐진다. 뿌리 없는 자연은 최대한 가변적이다. 김한진의 작품은 유사(類似) 자연이면서 동시에 구성과 배치의 기술이다. 쇠로된 좌대 위에 올려놓은 블록들은 뒷면들은 밋밋하여 앞을 향해 진열된 사물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실제 산과 달리 이리저리 옮겨질 수 있다. 한 눈에 쏙 들어오게, 또는 웅장하게 보이도록 배열될 수 있다. 바닥에 들쑥날쑥하게 쌓아 놓은 노리끼리한 색감의 작품은 블록 한 귀퉁이부터 갉아서 지층의 미세한 굴곡 면들을 새겨 자연과 예술에 있어 과정성과 시간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것들은 공간을 갉아낸 것만큼이나 시간을 갉아먹은 산물이다. 가로축으로 또는 세로축으로 새겨진 주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작가의 감탄을 자아냈던 지형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수집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며, 대부분 색이 없기에 어둑한 조명 속에서 강하게 음영 져 있다.

 

시멘트 덩어리에 새겨진 미세한 주름들은 실제에 버금가는 실재성이 있다. 그것은 조형적 환영에 의해 창출된 실재성이다. 자잘한 장식 없이 물질과 노동이 생경하게 부딪히며 만들어낸 산물은 자연의 야생성 못지않은 야생성이 있다. 근대 도시 풍경의 골격을 형성해 왔던 시멘트 구조물은 이전시대의 건축보다 더 많은 폐허를 남긴다. 문명 또한 야생적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적 야생성보다는 문명이 파생시킨 야생성을 더 많이 느끼게 한다. 김한진의 시멘트 산은 실재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지만,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이라는 점은 유사하다. 관객은 마치 관광객처럼 시간과의 싸움을 자청한 작가가 만들어낸 사물의 겹을 탐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불활성 덩어리가 무한한 겹과 결이 부여됨으로서 숨 쉬는 생체막같이 활성화된다. 작가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 사물과 사고의 미세한 결을 파악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는 이다. 전시장 한 켠에는 나무 책상 위에다가 그가 여태까지 만들어왔던 산 모형들을 죽 올려놓아 마치 지도 같은 풍경을 펼쳐놓는다. 책상에는 이 가상의 산에 대한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으며, 책상머리 앞에서 하는 상상의 여행을 예시한다.

 

선반 위에는 여러 크기와 모양, 색을 가진 그릇들 속에 산 모형들을 결합시켜 놓았다. 수북이 담긴 음식처럼 산은 그릇 위로 솟아 있다. 그것은 그가 상상해오던 산들을 담아 모은 듯한 양상이다. 그 뿐 아니라 사각형 틀이 유지되는 작품들 역시 세계를 수집하는 사진의 사각 프레임 같은 느낌을 준다. ‘담아오기’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다. 오늘날 예술을 대신하여 대표적인 심미적 체험이 된 것이 바로 관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소에 선망하던 그곳에 가서 무엇을 어찌할 줄 몰라 사진만 찍고 온다. 사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전유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김한진의 그릇은 카메라나 액자 같은 기능을 가진다. 산과 담는 틀이 경계 없이 일체화된 형식은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다는 은유로 다가온다. 일체화되어 있기에 산은 결코 그릇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에베레스트나 그랜드 캐년 같은 대자연은 재현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제시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미가 아닌 숭고와 관련된다. 장-뤽 낭시는 숭고의 미학을 논하면서 예술에 대한 사유의 핵은 숭고이며, 미는 단지 그것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스텔 톤의 다소간 장식적인 면모도 보이는 그릇 안의 산들은 대자연의 법칙을 인간적 규칙의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것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소유 가능한 형식으로 변모시킨다, 반구 안팎에 솟아난 산 모형들은 지구의 중심부터 표면에 이르는 산의 실재성을 조형적 장치로 상징화한다. 그릇 안의 산, 선반이나 책상위에 올려 진 산, 그리고 각목이나 금속 틀을 좌대삼아 이러저러하게 배치될 수 있는 산은 실재성을 결여한다. 그의 산은 여러 색과 피부 그리고 모양새로 변모한다. 10개 정도 만들어 놓은 모델이 여러 맥락 속에서 다르게 연출된다. 그것은 실제 가보지 않은 장소를 여러 복제물들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파생실재,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본도 복사본도 아니며, 양자 간의 위계관계도 거부한다. 그것은 몇 번의 복사를 거쳤는지 알 수 없는 헐거워진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가 연출하는 자연 풍경은 축소모델이 아니라, 가상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어느 부분은 실제에 버금가는 실재성의 환영이 있다. 강한 조명을 받는 조각된 시멘트 덩어리는 녹색이나 노랑 계열로 착색되지 않은 것도 바위 산 특유의 질감이 절묘하다. 김한진의 작품은 실재에의 환영과 그것을 단절시키는 장치가 동시에 작동됨으로서, 예술작품에서 실재와 환영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복사물들 또는 표상들이 세계를 도상으로 제시한다면, 시뮬라크르는 세계를 환각으로서 제시한다고 말한다. 시뮬라크르는 새로운 정초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정초들을 삼켜버린다. 전시에서 풍경은 단면들을 도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편들이 놓이는 면 역시 잘려져 있는 뿌리를 강조한다. 재료의 색, 물감의 색이 그대로 드러난 점 역시 인공성을 극대화한다. 또한 시뮬라크르는 현대의 속성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철학이 만들어지는 것은 거대한 숲속에서나 오솔길에서가 아니라, 도시와 거리에서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보다 인위적인 것들 안에서이다. 인공물은 언제나 복사물의 복사물이며, 이러한 과정은 그것이 본성을 바꾸어 시뮬라크르로 전환될 때까지 나아간다. 김한진의 시멘트 덩어리로 만들어진 대자연을 닮은 또 다른 자연은 스스로가 가짜 존재임을 도처에서 드러낸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원형의 복제물이나 그 반사물이 아니라, 육화되고 물질화 된 것이다. 무엇하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없는 작품의 면면에는 실제의 산을 오르는 것 만큼의 설레임, 또는 실망스러움이 녹아있다. 오늘날 시뮬라크르의 중요성은 그것이 다양성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논리]에 의하면 에피쿠로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원리를 일자 또는 전체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하나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의적으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는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동일성도 모순도 없다. 단지 유사성과 차이, 구성과 해체, 연결, 농도, 부딪힘, 접촉, 운동들을 통해 모든 사물들이 형성될 뿐이다. 공존과 와해, 이것이 사물들의 본성이다. 자연주의는 다양성의 생산을 설명해줄 엄밀하게 구조화된 인과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가로지름은 언제나 존재한다. 가로지름은 원인들이나 인과계열들의 환원 불가능한 다수성, 원인들을 하나의 총체로 결합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김한진의 작품에서 자연의 산물들은 그들의 본질적 속성인 다양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여기에서 자연은 총체화가 불가능한 합이다. 자연은 다양성과 생산의 원리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여러 형식에 담긴 자연의 요소들은 세계의 유일성이나 총체적 우주를 가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자연은 ‘...이다’가 아닌 ‘그리고’를 통해 드러난다. 산이라는 소재의 통일성만 보여주는 이 전시의 여러 배치들은 ‘그리고’의 어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어법의 작품은 자연의 잠재력이 단번에 총체화 되거나 하나의 조합 속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을 하나씩하나씩 존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