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의 사진은 기념비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앞 다투어 솟아올라 기념비 아닌 기념비가 되어버린 도시의 경관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정복이 어떻게 시간의 시험을 거치는 지를 주시한다. 전시는 전쟁의 폐허 후 우리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950년에서 6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변형시킨 <모뉴먼트> 시리즈와 대단지 아파트 공사장을 찍은 <공사장> 시리즈로 이루어진다. 등록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는, 또는 그에 준하는 건축물을 찍은 <모뉴먼트> 시리즈는 계속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의 용도가 변경된 건축들이 대부분이며, 100년도 채 안된 근대 건축이 얼마나 낯설게 다가오는 지를 강조한다. 우리의 대표적인 주거 문화의 단면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공사장>은 현재 진행형의 역사지만, <모뉴먼트> 시리즈에 나온 낡은 건축들만큼의 수명도 보장받지 못할, 가속화된 생산과 소비의 주기에 속해 있다. 양자는 모두 시간의 시험대에 오른 공간의 폐허 같은 모습을 강조한다. 모뉴먼트와 공사장의 면모는 화려한 도시 스펙터클의 이면이나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그 핵심을 찌르고 있다.

 

 

정지현의 사진은 우리의 환경과 관련하여 많이 생각하게 하는 대상을 소재로 하지만, 대상에 대한 건조한 기록이나 애틋한 향수, 도시적 현실에 대한 어떤 강한 주장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는 대체로 지시대상에 충실한 사진의 어법을 따르지만, 작품은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변형을 야기 시키는 재배치는 지금여기의 지배적인 삶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위한 거리두기이다. 전시 제목과 일치하는 <모뉴먼트>(2011) 시리즈의 작품 제목에는 장소에 대한 어떤 정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볼 이 건물들은 결코 기념비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뉴먼트라는 제목은 매우 풍자적으로 들려온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건축들은 대부분 웅장하게 보이려는 욕망으로 가득하여, 과도한 파사드와 열주들로 이루어진 시멘트 덩어리들이 많다. 당시로서는 멋진 건물이었음에 틀림없었을 대학 건물과 아파트, 상가는 최소한의 현실을 남겨 놓고 낯설게 다가오는 부분을 더욱 낯설게 배치하였다. 기능주의에 충실했을 당시의 건축들은 지금은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모호한 부분이 종종 있는데, 그는 그러한 부조리한 기능들을 강조한다.

 

다른 것이 첨가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요소로 재구성하는 몽타주는 한 술 더 뜨기 전략에 해당한다. 그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건물의 일부를 과장하거나 삭제하고 겹치는 방식으로 변형을 가함으로서, 기능주의의 부조리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근대의 패러다임이기도 했던 기능주의에서, 기능이란 결코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역사주의의 끝에서 역사의 마지막 판본을 연출하려했던 근대의 야심 찬 기획들은 무척이나 역사적이다. 역사를 넘어 신화가 되려하는 그의 기념비 컬렉션들에서, 근대의 헐벗은 기능주의는 근대가 극복하려 했던 신화의 시대를 다시 불러들이는 듯하다. 모 대학의 낡은 건물을 소재로 한 작품 <Monument 02>에서 관객은 고대의 신전 같은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2009년부터 시작한 공사장 시리즈는 지난 역사가 아닌, 지금 형성되고 있는 공간을 소재로 한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공사장 시리즈는 75x100cm로, 모두 같은 크기인데, 그것은 장소가 달라도 현장을 규정하는 구조는 비슷하다는 것을 샘플처럼 보여준다. 지금은 완공되어 삶의 터전이 된 곳들도 있는 공사장들은 막 지나간 현재이며,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중첩된다. 현재의 폐허는 곧 다가올 폐허의 전조인 것이다.

  

작품 속 공사장은 분당 일대의 판교 신도, 인천의 청라 신도시, 서울 신내 택지 개발지구 처럼 아파트 공사장이 대부분이며, 대한주택공사의 협조를 얻어 현장에서 세트를 갖추어 놓고 찍은 것이다. 그는 기본 골조가 되어 있는 거의 완성된 텅 빈 공간들을 탐사한다. 작품에는 그곳이 어느 동네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건축 전문가가 아니고선 아직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공간과 구조적 장치들은 기능의 낯선 모습을 보여주며, 현장에 있는 물건들을 전시장에 오브제를 놓듯이 재배치한 후 찍은 사진들은 ‘기능성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를 예시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시적인 동영상은 상상이 아닌 탐사와 발견의 성과물이다. 태아의 발생으로 치면 아가미처럼 얼굴이 형성되는 단계의 구조들에서 기능의 간극은 넓어진다. <city project>(2009)는 작가가 찍은 건물 사진을 붙여 도시 모형을 만들어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 또는 잔디 위 같은 곳에 배치한 것으로, 소비적 기능에 충실한 도시문화를 축소모델로 보여준다. <city project>는 얼마 전 과거와 현재의, 또는 다가올 미래의 폐허는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짧은 생산과 소비주기에 기인한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도시는 개발주의의 노선에 따라 대량 생산되어 사용되고 버려질 것이지만, 자연은 이를 얼마만큼 수용해 줄 것인가. 정지현의 작품은 도시의 확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폐허의 확장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러나 있다. 아파트에서 태어난 세대들 역시 환경이 재개발되는 현장을 보고 자랐으며, 그들의 눈에도 시공간의 간극은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우리를 둘러 싼 공간은 시간에 저항하는 상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가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정지현은 얼마 안가서 또 역사가 될 현장을 담는다.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담아내는데 사진은 회화보다 날렵한 도구이지만, 그는 무거운 대형 필름 카메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작업한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공사현장에서 하루 종일 찍어도 5장 밖에 찍지 못하는 꼼꼼한 작업 방식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광적으로 질주하는 시대의 속도를 거스르는, 그의 말대로 ‘수행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도시를 빠르게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면밀한  감식자의 눈으로 시공간을 천천히 탐사한다. 

 

이러한 탐사는 맹목적 질주를 끝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 되돌아볼 시점을 겨냥한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를 거스르는 그의 작업방식 때문인지 몰라도, 피사체들은 당장 사라질 것 같은 임의성이 아니라, 묵직한 실재감을 가진다. 고도성장을 위해 스스로 뿌리를 잘라낸 과도한 활기의 사회가 세우고 쓰러뜨리기를 반복했던 건물들은 그의 사진에서 기념비로 재탄생한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상징이었을 근대 건축물과 곧 고가의 상품으로서 완성될 아파트 공사장은 고고학적 탐사의 대상이 된다. 막 지나간 과거와 곧 다가올 미래를 한 묶음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둔다. 분칠한 듯 화려한 도시의 스펙터클은 민낯을 드러내고 벌거벗겨진 채 ‘역사적 깨달음을 주는 단편’(벤야민)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도시는 인간이 아닌 구조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구조는 역사와 인간, 그리고 그 양자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사회를 싫어한다. 오늘날 가장 큰 구조는 자본이며, 그것은 자기만의 메커니즘을 고수, 확대재생산 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진보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에 의하면, 자본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성장을 이루어내며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희망의 가능성을 착취하며 생활 속도를 가속화시킨다. 자본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낳는다.

 

인간이 빠진 구조로서의 도시는 유기적으로 통합될 사이도 없이 파편으로 뭉쳐 있다가 다시 파편으로 사라진다. 특별한 조작 없이도 그자체로 충분히 몽타주적인 현실에 약간의 변형을 꾀한 정지현의 작품은 어딘지 모를 이물감을 준다. 성장의 상징인 새로움은 더 빨리 낡은 것으로 변하며 폐허로 향한다. 아직 간간이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억과 관심에서 거의 사라진 근대 건축물들과 그보다 더 빨리 사라질 공사장들은 덧없음이라는 알레고리가 새겨진 유적지의 면모를 띈다. 발터 벤야민은 현대적인 것에서 폐허를 발견한 선구적인 도시 역사 연구자이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에게 사물의 진짜 알맹이는 사물이 본래 위치해 있던 맥락이 사라지고 난 후, 즉 대상의 표면이 부수어지고 소멸의 가장자리에 남아있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몰락, 즉 사물 표면의 부서짐은 그 안에 담긴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 계기를 풀어놓는다. 상품의 유토피아적 요소들은 상품의 쇠퇴에서 드러난다. 유행에 뒤떨어진 물건은 유행의 현실을 폭로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현대적인 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오직 회고적으로만, 점차적인 소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대상의 참된 성격이 나타난다. 소비자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상품을 진열하고 수용하기 위해 부르주아가 건설한 건물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그것이 급속히 시대에 뒤떨어져 낡은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 의하면, 벤야민은 19세기에 파리의 첨단 건축이었던 파사주를 ‘꿈 세계의 잔여물’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현대성의 특징이 순간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이라면 현대성의 진실은 오래 끄는 자취 속에 있다. 현대의 폐허를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시선은 한 시대의 꿈을 다루며, 건축의 신화적 표면과 대상 속에 묻혀 있는 희망과 약속을 발굴한다. 사소한 것, 혐오스러운 것, 어처구니없는 것은 해독해야 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며, 구조해야 하는 귀중한 사물이다. 도시의 고고학자는 신화 속에 담긴 유토피아적 계기, 즉 꿈꾸는 집합체의 참된 욕망들을 포착하여 신화, 즉 강제, 반복, 물신성을 종결시키려 한다. 정지현에게도 대상의 참된 내용은 소멸될 때 나타난다. 그에게 폐허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말해주는 의미 있는 단편이 된다.

 

그의 작품 속 곳곳에 포진한 쇠퇴의 기호는 현대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의 사진에서 자주 발견되는 버려진 공간이나 용도 변형, 또는 용도 불명의 사물에 내재한 수수께끼는 초현실주의적이다. 그 묵직한 실재감이 주는 신비와 침묵 속에서 현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근대건축이나 건설현장이 모두 폐허처럼 나타나는 작품들은, 기념비가 만들어지자 마지 곧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현대의 속성을 압축한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기념비는 시대의 상징을 담는 중심이 되지 못한다. 그것의 기원과 목적은 모호해진다. 굳이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면 시간의 시험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취약함 또는 덧없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기념비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이기 보다는 신화로 다가온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기념물은 이중으로 신화적이다. 기념물은 한편으로 거짓된 역사를 환기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영속성을 스스로 선언한다. 기념물을 화석화된 신화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쌓인 과거의 잔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련의 기념물이다. 망각과 기억을 교직하는 도시는 과거를 정의하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화적 형식과 인공물을 만나게 한다.

 

제임스 영은 [기억과 기념비]에서 기념비들은 기억을 위한 공통 공간을 창조함으로서, 공통의 기억이라는 환영을 선전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공공기념물, 국경일, 공유된 일정들은 결국 모두가 그 주변에 표면적으로 공통의 민족적 동일성이 만들어지는 공통의 장소를 창조하기 위하여 작동한다. 기념비들은 오랫동안 기억을 위하여 귀속화 된 장소를 제공해 왔다. 기념비의 몰락은 지역과 공동체의 사라짐과 관련이 있다. 공통의 경험과 기억,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특별한 장소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기념비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 국가라는 것이 형성되었던 시대에 선전을 위해서 수없이 만들어졌던 잡다한 역사주의 풍의 기념물을 야만적이고 범죄적인 장식이라고 간주하고 싹 쓸어버리려 했던 모더니즘 역시 또 하나의 쇠락한 기념비로 다가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념비는 부활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뿌리 없는 스타일의 유희였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코드가 되어버린 마당에 무엇은 호출이 되지 않겠는가.

 

제임스 영은 루이스 멈포드를 인용하면서, ‘근대의 기념비라는 것은 명백히 모순된 것이다. 그것이 기념비라면 근대적일 수 없고, 그것이 근대적인 것이라면 기념비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멈포드는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시대에, 기념비들이 한때 표상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보편적인 상징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지현이 포착하고 변형시킨 근대의 기념비들에서 쇠락의 기운이 역력히 느껴진다면, 그것은 기념비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관통했던 그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 불가능성일 것이다. 성장에 대한 강한 지향이 근대 한국 사회에 편재했던 모순들을 봉합해왔지만, 그 헐거운 봉합선들이 하나둘 터지고 있다. 기념비성에 대한 거창한 수사학은 대중을 볼모로 한몫 챙기려는 정치가와 사업가의 어법일 뿐이다. 사회의 중심이나 안쪽이 아니라, 경계 및 바깥에 서있는 작가는 시간보다 더한 시험대 위에 기념비들을 올려놓는다. 정지현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사진을 이용하여, 새로움의 이데올로기를 폐허로 만든다. 여기에서 폐허는 기념비의 흥망성쇠가 일어나는 장이다. 폐허 위의 이 기념비들은 곧장 반기념비(counter-monument)로 전화한다.

 

출전; 송파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