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펙트럼 2012 (7.19-9.16, 리움)

 

리움의 큐레이터들이 ‘향후 성장 가능성이 주목되는 한국 작가 8인을 선정’한 이 전시는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의 작품이 번쩍거리는 스펙터클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멜랑콜리와 향수어린 시각들이 지배적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트스펙트럼’은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라, 무채색이 하나 더 추가된 삶의 스펙트럼이다. 젊은 예술가의 시각으로 볼 때 현대 사회는 밝지 않다. 미래지향적이기에는 작가들이 너무나 타자화 되어 있다. 작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사회는 작가에 무관심하다. 잘 먹고 잘살아야겠다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예술의 차지하는 특수성은 여전히 미미하다. 큰 미술관의 초대 전시에 걸 맞는 엄청난 노고가 깃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족적인 형식미 보다는 사회를 향해 무언가 말해 보겠다는 진지한 의도가 이 전시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작품들은 앞만 보고 달려왔던 현대 사회에 누적된 피로감과 회의, 그리고 물질적 진보가 예술적 풍요와 관련이 있을까하는 의구심들이 깔려 있다. 김아영과 배찬효의 작품에는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실증적 사실이나 역사에 내재된 허구의 몫이 두드러지며, 장보윤과 전소정의 작품에는 퇴락한 기운이 역력한 얼마 전 여가생활이 나타난다. 옥정호와 최기창의 작품에는 의미보다는 무의미에, 필연보다는 우연에 방점이 찍혀있다. 김지은의 작품에는 실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가시화되며, 한경우의 작품에는 판단 기준과 그것을 교란하는 잡음의 위상이 부각된다.

 

김아영의 영상작품 <PH 익스프레스>는 영국 해군이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약 2년간 거문도를 점거했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했다. 그것은 19세기 식민지 쟁탈 시대에 서구열강들이 거문도를 동아시의 전략적 요충지로 오판한 것에서 비롯된 돌발사건이었는데, 작가는 사건과 관련된 각국의 입장이 반영된 크고 작은 사료들을 꼼꼼하게 수집하여 사건을 재구성한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설명될 수 없는 빈 칸들이 많은데, 특히 이 사건은 사건 자체의 어처구니없음에서 비롯된 오해와 오판의 확대재생산 과정을 부각시킴으로서 역사를 희극으로 만든다. 누군가 역사는 두 번, 즉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소극(farce)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실증적 사실에 기반 한 준 역사물에 해당하는 이 작품에도 해당된다.

 

여기에서 역사와 예술은 관련이 깊다. 그것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 뿐 아니라, 서로 무관해 보이는 잡다한 자료들의 연결에 예술적 상상력이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재연 극장에서 각국 출연진들은 매우 진지하지만, 부조리극의 허수아비처럼 보일 뿐이다. 역사를 소격시키는 희극적 관점은 이해관계에 의해 추동되는 아전인수 격의 현실(역사) 인식을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역사와 현실은 결국은 무의미로 귀결될 과도한 의미 부여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반(反)형이상학적 관점, 단지 예술적인 관점’(니이체)이 있다. 역사가 해석에 의해 창작품이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배찬효의 작품은 세계를 무대로 펼쳐진 경쟁의 시대를 먼저 치고 나감으로 선취된 동일자의 입장,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는 지배적 상상계를 타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의상 속 존재>에서, 모종의 역할극 속에 등장하는 작가에게는 영국에 유학을 했던 동양의 남자로서의 자괴감이 묻어난다. 동양 남자가 분한 작품 속 ‘여자’는 타자들이 중첩된 것이다. 복장 도착자처럼 보이는 가장은 일관되지 않아서 상상계는 도처에 균열을 노출한다. 그럴듯하게 연출된 연속선에 난 틈새들은 관객의 상상과 해석이 활성화되는 장소이다.

 

<동화>는 권력자에게 선택되어 신분상승을 꾀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동화들을 참조했으며, 동일자와 타자 간에 설정되곤 하는 매혹, 지배, 소유 같은 권력 관계를 들춘다.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불린의 이야기 담은 <형벌>은 권력에의 의지가 동일자 뿐 아니라, 타자도 마찬가지임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동일자와 타자는 대립관계를 잃고, 서로를 전제한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보편적이다. 정교하게 구현된 시대 의상을 걸친 작가는 성, 인종, 국가 간에 드리워진 권력의 그물망 속에 배치된다. 정교한 세트 속 인물은 추상적인 힘의 장 속에 존재한다. 배찬효가 사진이라는 틀 거리 속에 압축하여 배치한 기호들은 단순히 자기만족적인 허구를 넘어서 현실을 체계적으로 모방하고 위조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보윤의 <천년 고도>에 등장하는 경주는 얼마 전까지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 같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통과 제의하듯이 거쳐 갔던 유명 여행지의 쇠락한 모습을 담는다. 여기에서 천년고도는 집단적인 관광 문화의 소비 항목으로 짧은 전성기를 누린 후, 더 그럴듯한 눈요깃거리가 넘쳐나는 현재에 아무 존재감 없이 그곳에 아직도 있다. 당시에 가장 흔했던 것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고 한다. 유행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짧은 시간의 경과도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킨다. 천년고도의 쇠락한 모습은 작가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작품은 마치 자료실 같은 분위기이다. 분리되면서도 연결되는 ‘자료’들은 35년 간 경주에서 택시기사로 일한 남자의 회고담, 신라의 달밤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U-튜브에 올려 진 빛바랜 관광 엽서 같은 영상들, 여러 화자의 목소리를 섞어 짠 경주에 얽힌 사연들 등이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재개발 때문에 폐허가 장소에서 주운 사진첩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경주였다는 데서 왔다. 버려진 장소에서 수집된 것들은 듬성듬성 그 장소를 되살려 내지만, 역사 뿐 아니라 기억으로부터도 멀어진 그곳은 향수나 풍자 등으로나 접합될 뿐이다. 여러 텍스트 또는 기호의 의미망 속에서 경주라는 실재는 허구화된다. 장보윤의 작품에서 최근의 일상은 사료 제시의 방식으로 재현됨으로서 소격된다. 치밀하게 조직된 이야기를 이루지 못한 채 엉성한 그물망을 이루는 기호들은 특정 장소로 수렴되지만, 기호들이 정확히 지시하는 대상은 불확실하다. 아카이브 형식의 작품들은 지시대상과 기호 간에 놓여 진 심연을 더욱 깊게 한다. 세상을 이루는 기호들은 결국 대상의 부재를 지시할 뿐이다.

 

전소정은 줄광대, 기계자수사, 극장 간판 쟁이 같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하는 직업군들을 마치 다큐멘타리 처럼 보여준다. 사실과 허구로 함께 직조되는 작품들에서 작가가 그들을 보는 관점은 외부적이지 않다. 작품 속에서 그들은 예술가적 속성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관객이 현실 속에서 사라지려는 그들에게서 향수를 느낀다면,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생활 속 장인들은 거세게 흘러가는 시간의 시험대 위에 놓여 있다. 올라가 놀 수 있는 줄이 있어 행복한 광대에게 줄이 주어질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수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빼곡하게 정리된 소우주 속 칩거하면서 옛 방식을 고수하며 작업하는 자수사나 이전에 그린 간판 위에 마지막 영화 간판을 덧그리는 남자는 그들의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왔던 숙련된 노동을 밀어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직면해 있다. 여러 장소에서 상영된 <마지막 기쁨>, <어느 미싱사의 일일>, <되찾은 시간>은 실증적이면서도 시적인 나레이션과 별도로, 각기 또 하나의 문학 텍스트와 연관된다. 그들의 삶은 예술화되어 있고. 전소정의 예술 또한 삶에 뿌리를 두려한다. 이러한 상호적 흐름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 끝없는 흐름 속에서 예술의 지속 가능성과 자유가 있으며, 예술로 인해 진정 가능해질 현실의 맥락화가 있다.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다는 점에 이 작품의 보편성이 있다.

 

옥정호의 작품에서 예술 행위는 그의 사진 <뻘요가>의 ‘뻘짓’처럼 나타난다. 그냥 뻘짓은 아니다. 그는 번듯한 직장인처럼 검은 양복 제대로 갖추어 입고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복잡한 제목의 요가 자세를 취한다. 이번의 뻘짓은 비판의 대상을 명확히 드러낸 채 경쾌한 자세로 풍자에 임했던 그의 이전 작품의 연장이자 단절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이 풍자의 대상을 넘어설 수 없었고, 결국은 그 대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한계를 느꼈다고 말한다. 풍자 대상에 기생하는 네가티브 전략은 소모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번 작품에서 직관적이면서도 몰입적인 수행성은 풍자에 전형적인 대립적 구도를 걷어낸다.

 

그러나 풍자 자체가 사라졌다기보다는 풍자가 작가라는 존재에게 되돌아온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일은 다 뻘짓으로 간주되지 않는가. 그러나 세상 자체가 뻘 아닌가. 예술은 목적 없고 무의미한 듯한 행동 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기능과 의미를 가진다. 4채널 비디오 작품 <태양예배자세-수르야 나마스카>는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예배와 관련된 자세를 취하는 작가가 등장한다. 그런데 엄숙한 의식이 치루어지는 배경들이 성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비록 예술이 그 어지러운 일상을 순화하기에 역부족이라 할지라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눈이 뻘게질 정도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 최기창의 2채널 영상 작품 <아이 콘택트>에서 등장인물들은 누구와 왜 대결하는지 모른다. <포춘 타이머>에서 양쪽으로 기계적으로 넘어가는 108개의 단어들은 무작위적 결합을 계속한다. 반복재생 되는 단채널 비디오 작품 <19x19>에서는 띄어쓰기가 안 되어 읽기 힘든 문장을 정사각형에 배치한다. 그의 작품에는 주사위 놀이처럼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운명적 결정이라는 공통 주제가 있다. 1892년 미국의 철학자 피어스가 ‘우연이 우주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요인이고, 자연관찰이 정확할수록 그 관찰은 법칙으로부터 불규칙함을 더욱 보여줄 것’이라고 한 과학철학의 원리는 현대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기창은 우연이나 운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결정되는 장과 규칙은 엄격하다. 그가 연출하는 우연놀이는 닫혀 진 총괄적 세계 속에 가두어진 세계에 숨통을 틔어 주는지, 아니면 마구집이 식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 그저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인지는 불확실하다. 체계화의 밀도와 강도가 높아질수록 우연의 힘은 더욱 커진다. 코드를 통한 체계화가 좀 더 촘촘하게 진행되는 현대사회에서, 운은 일종의 탈주로로 간주될 법도 하다.

 

김지은은 도시의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지기 위해 설 수 밖에 없는 가건물들을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구현했다. 고층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틀인 비계는 위험한 작업을 위해 줄광대처럼 비계를 탓 던 건설노동자들을 연상시키며, 전시장 천정이 가장 높은 장소에 시트지로 붙여진 12미터 높이의 망루는 각종 (재)개발 사업 때문에 수시로 삶의 맥락을 말소당한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초소처럼 보인다. 재개발 공화국인 한국에서 두 가건물을 심심치 않게 쌍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수많은 대나무로 일일이 짜 올려진 <비계 덩어리>은 비계를 지지대 삼아 완성될 건물 표면과 대조되는 분위기가 있다.

 




 

작가는 작품 후면을 관객의 동선에 포함시킴으로서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실체가 아닌 그것의 표피성을 폭로한다. 도시 노동자들의 노고에 못지않은 노동력이 투여된 그녀의 작품 역시 전시가 끝나면 철거될 것이라는 점에서, 작품 속 가건물의 운명을 따른다. 건물의 최종 표면이 될 반사면들과 달리, 대나무 구조물에는 대바늘뜨기 같이 하나하나 손을 거친 질감이 남아 있으며, 이것저것 얽어서 만든 망루는 절박한 필요에서 비롯된 자연발생성이 있다. 작품을 포함해 가건물이 될 운명에 놓인 것들에는 기계적 도시 문명과 대조되는 자연스러운 패턴이 발견된다.

 

한경우는 구식 또는 신식 모니터들을 등장시켜 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근대의 인간척도론을 근저로부터 무너뜨린 것은 현대의 전자매체였으므로, 기준의 문제에 인터페이스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레벨 테이블>에서 모니터에 붙은 자석을 떼어내면 직선으로 보이는 테이블이 원래의 휘어진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텔레비전 모니터가 투명한 창이 아니라, 자기를 띈 물체에 왜곡되는 주사선들의 모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마침 옆에 휘어진 테이블이 놓여 있어 원본대조가 즉시 가능하다. 그러나 디지털 코드는 점차 지시대상 없이 작기 참조적인 언어를 구사해 나간다. 교정을 할 만한 비교 기준이 사라지고 파생실재들로 가득할 또 다른 인터페이스에서 기준의 의미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46인치 모니터 10배 크기의 축구장>에서 작가는 크다는 것을 비교할 때 자주 나오는 축구장을 등장시킨다. 실제 축구장에 가는 사람보다 축구중계가 나오는 모니터를 통해 축구장을 접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점에서, ‘축구장 몇 개 크기의...’라는 기존의 기준이 ‘모니터 몇 개 크기의...’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바뀌는 것도 가능할 법하다. <화이트 노이즈-1>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지직거리는 노이즈 화면을 닮은 유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을 결합시킨 영상을 보여준다. 백색 잡음처럼 보이는 바탕 안에 인간이라는 신호는 보존된다. 텔레비전 노이즈 화면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빅뱅 이후 팽창하는 우주 저편에서 발생하는 전파가 잡힌 것이다. 캔버스에 그려진 백색잡음처럼 추상회화는 지시대상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인간적 척도를 점차 사라지게 했다. 이제 전자매체에 기반 한 문명의 새로운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될 것이다.

 

출전; 월간미술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