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전시부제)를 묻는 이세준의 전시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한다면, 실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주로 나타나는 도상-풀, 나무, 화분, 그림도구들, 드로잉, 곤충, 파충류, 맹수, 인체 등-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그 조합의 수는 무한하기에 그의 작품은 무척 다채롭고 복잡해 보인다. 크든 작든 하나의 화면에는 여러 도상들로 붐비는데다, 여러 크기의 화면들이 종횡무진 이어지며 공간을 장악해 나가는 방식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그림의 배경 자체가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정글의 이미지가 우세하다. 그것이 문명적 장소라면 안팎의 구별을 와해시키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같은 부조리한 구조물이 등장하곤 한다. 전시는 화면 안팎 모두에서 뿌리줄기 식으로 이어지는 미로를 이룬다. 미로는 출구를 찾기 힘든 복잡한 길을 의미한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미로는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에게 준 마지막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이제 직선을 넘어 미로가 복귀하고 있다고 예언한다. 직선은 발전을 위한 전망을 가지지만, 꼬불꼬불한 우회로로 이루어진 미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공략하고 소비한다.

 

이세준은 미로 같은 작품 역시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아탈리가 말하듯이 예술에서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창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 예술이란 잃음으로서 얻는 것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세준의 작품 속 서사 또한 미로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읽는 것은 미로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사건의 행렬은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혼돈으로 가득하다. 그는 이러한 무아경적 스펙터클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사건들 대부분은 정의할 수 없다. 구체적 도상들이 등장하지만 읽으려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에서, 이세상은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태생적 불가해성을 가진다. 그가 이러한 불가지론의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회의주의자였거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무익한 방황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난감한 결과는 그러한 노력의 과도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물학에서 천문학까지, 신화에서 종교까지, 음악에서 문학까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온 젊은 예술가의 전형이다.

 

동시에 그림은 그 모든 것들을 집약시켜주는 장이라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화가이다. 그림이라는 결정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그의 섭렵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소비에 머무는 문화와, 생산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가지고 있는 예술의 차이이다. 그러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재현은 어떤 차원을 생략해야만 가능한 것에 반해, 그는 그가 접한 것들을 손실 없이 담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손실은 불가피하다. 이세준의 작업에서 직접 관찰보다 기억이 가지는 더 큰 비중을 생각할 때, 잃어버린 시공간을 찾는 과제는 무엇보다도 긴요하다. 독립적이면서도 이어지는 장면들은 공존과 병렬, 기억과 지속, 동시성과 공명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재현주의의 일면성을 피해가는 그의 방식이다. 여러 요소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함께 작동하면서 작품이라는 복잡한 텍스트를 짜나간다. 그림은 그의 감성과 지식, 관심과 경험에 닿은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모자람 없이 담아내는 큰 그릇이지만, 그 용광로는 아직도 끓고 있는 중이기에, 그 안에서 명멸하는 사건들은 명확한 좌표 속에 고정되지 않는다.




 

이세준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열정적인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다. 질문은 끝이 없으며 어떠한 대답도 결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불확정성은 속 편한 불가지론과는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일련의 서사가 있지만 기승전결 같은 서사의 구조가 없다. 그것이 증식되는 방향 또한 확정되지 않는다. 이세준은 ‘세상은 마치 한 눈에는 미처 전부 들어오지 않는 그림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역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원래 주택이었던 장소를 전시장으로 개조한 공간의 구조는 미로식의 작품과 어울린다. 낮은 천정에 경사지게 접어 넣은 캔버스나 이런저런 통로로 연결된 그림들을 이동하면서 봐야하는 구조는 결코 하나의 시점으로 일괄될 수 없다. 따로 또 같이 작동하는 화면들을 이어주는 작은 그림들이나, 그림 바깥으로 나와 있는 오브제들은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캔버스 여러 개가 가운데 사각형을 남겨 놓고 배열된 작품 ‘초여름의 틈사이로’는 전시장의 빈 벽면도 작품 여백으로 활용한다.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정글과도 같이 복잡한 화면 안에 여러 방식으로 배치된 인체는 서술적으로 붙여진 작품 제목과 연동되면서 일련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하는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들은 복잡한 배경과 구별되는 화면의 주인공들이기에, 서사에 대한 기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머리카락도 이목구비도 없는데다, 뭉글뭉글한 살덩이로 등장하는 인체들은 개체로 분화하기 이전의 사람에 대한 원형질이다. 인체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뭉실 대는 형태들은 무엇으로 변형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를 암시한다. 구름을 닮은 그것들은 가변성을 나타내는 기표이다. 사람 뿐 아니라, 풀, 나무, 악어 등 이세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들의 특이한 형태는 사진적 재현이 아닌, 기억에 의한 드로잉 습관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림을 기억의 산물로 생각하는 작품들에는 머릿속에서 복잡한 것이 얽혀 있고,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증식하여 쏟아져 나오는 도상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그는 사진을 찍기 보다는 최대한 많이 보고 보았던 느낌을 떠올리려 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여기에서 망각은 변형과 생성의 동인이 된다. 그것은 그에게 악영향을 주었던 입시미술의 잔재를 일소하는 방식이자, 이미 만들어진 코드들의 공격으로 상상력이 마비되어 가는 미디어 사회에 역행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회화가 여타의 기계 복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언어를 생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세준의 작품은 사진의 재배치가 아닌 드로잉들의 재구성이기에, 단자(monad)와도 같은 단편들은 각자의 세계를 오롯이 간직한 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인체 또한 다른 도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리된 세계들을 잇는 매개 고리로 활용되곤 한다. 성별과 나이만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인 인체들은, 표정이 아니라 긴장 또는 이완되어 있는 자세를 통해 이야기한다. 대부분 그들의 육체의 상태는 대부분 육체적 전성기에 있는 젊은이들이며, 흘러넘치는 욕망은 그들을 둘러싼 온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 작동한다. 몸은 우주와 함께 태어나고 소멸하며, 사랑하고 절망한다. 대부분 표정이 없고, 아예 상체가 제거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 인체들은 그자체가 욕망이 상연되는 무대가 된다. 인체는 타자와 결합하기 위해 그 전체를 또는 부분을 변형시킨다. 이접은 그의 작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자르고 붙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세준의 작품에서 그 에너지는 주로 나무에 숨어있다. 나무 실루엣을 가득 채우는 비정형 패턴은 개체 안에 내재된 에너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화면 여기저기에 포진하면서 언제든 분출된 기회를 노린다. 그것들은 대우주와 소우주, 인체의 안팎을 넘나드는 또 다른 에너지의 흐름과 같은 계열이다. 다채로운 색과 복잡하게 꼬인 형태는 어떤 참조대상과도 연결되지 않은 물감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것은 외부의 참조대상과는 무관한 자율적인 기호이며, 이러한 기호의 물질성은 작품에 내재한 차원 수를 늘려나간다. 이 물질 덩어리에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잠재되어있으며, 구체적인 도상과 상호작용하는 추상적 패턴들을 이룬다. 그것들은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심리적 물리적 상징적 사건의 파장을 확장하거나 완충작용을 한다. 1번 ‘풍장 하는 시대’부터 18번 ‘시간의 틈’에 이르는, 18개의 장면이 좌우로 길게 이어진 <밤의 숲> 시리즈는 계절의 운치가 반영되곤 하는 이세준의 작품에서 겨울에 해당된다. 겨울, 밤, 숲의 시공간 이미지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기 위해 격어야 하는 원초적 혼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죽음과 희생, 생존과 진화, 인류와 미래 등이 꿈처럼 펼쳐지는 <밤의 숲> 시리즈에서 인간들은 어두운 혼돈의 숲 속에서 뱀이나 악어 같은 괴물과 대결하거나 잡아먹히고, 때로 합체된다.

 

동물이나 동물 기관의 이미지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특히 남자와 여자 간의 관계를 중층적으로 상징하며, 색 띠로 가득 채워진 숲의 나무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밤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햇빛과 신록 가득한 계절의 여운이 있는 <초여름의 틈 사이로> 시리즈는 악어나 거대한 머리 석상이 뒹구는 초록 밀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다. 이 시리즈 중 머리가 녹아있는 여자가 하얀 거품 형상이 가득한 밀림 한가운데 누워있는 ‘한낮에 꾸는 꿈’은 제목 그대로 백일몽과 같은 나른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만약 화가가 여자였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성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5명의 인체가 순차적으로 작아지며 연속적인 운동감을 보여주는 ‘소년들’에는 공간적인 형식인 회화가 어떻게 시간을 도입하는지를 애니메이션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낮은 천정과 모서리까지 이용하며, 퍼즐처럼 죽 이어진 설치방식이 특징인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은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 즉 예술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의 자의식- ‘드로잉을 고르는 순간’, ‘어떤 예술적 고민’, ‘페인트칠하는 남자’ 등 -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선택받지 못한 작품들’에서 깊은 고뇌의 흔적을 잔뜩 머리에 이고 있는 남자는 화분에서 자라나고 있는 에너지 패턴의 나무처럼 영감이 자연스럽게 성장해주길 바란다. 화분 속의 식물은 때로 거대한 밀림을 이루기도 하니까 말이다. 머리에서 자라난 혹은 피어오른 상상력에는 직선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무엇으로든 변형 가능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동력 또한 자연적인 것이다. 문인지 액자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통과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속한 평면을 칠하고 있는 사람은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회화의 특징이 드러난다. 차원의 넘나듦을 상징하는 도상 중의 하나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이 위상기하학적 공간들은 화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여러 화면들을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낮은 천정과 모서리를 이용한 설치작업이 돋보이는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화면을 이어주는 화면 안팎의 장치들이 있다. 일렬로 연결된 <한마디로는 정의할 수 없는> 시리즈는 세계와 예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결코 모색을 멈추지는 않는다.

 

작가에게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의 언어는 과학 등 여타 다른 분야의 언어보다 복잡다단한 현실계를 포획하기에 적절하다. 그것은 예술이 은유의 언어이며, 인간의 사고 또한 본질적으로는 은유적이기 때문이다. 한 눈에 포괄할 수 없는 이세준의 그림은 다양한 우주가 똬리를 틀고 있으며 예기치 못한 연결고리를 통해 상호적 변형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엄청난 식욕으로 흡수한 지식과 경험들이 원동력이 되어 자라난 상상력은 하나로 정리된 결정론적 인과 고리가 아니라, 다양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조차도 매순간 재구축된다. 끝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느슨하지만, 전체를 흩어지지 않게 해준다. 쉬지 않고 하는 드로잉들, 특히 작은 그림들은 미지의 거대한 퍼즐을 연결하는 작은 단편들로 작동하곤 한다. 그의 작품은 각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는 다원적 우주에 대한 유비로 다가온다. 하나의 시점으로 일괄될 수 있는 총체성 대신에 병렬적 집합을 이루는 그의 작품에는 여러 도상들과 패턴들만큼이나 여러 소리들이 들려온다.

 

원초적 혼돈 또는 축제의 기운이 역력한 이세준의 작품은 안정된 선율이나 화음의 조화보다는 다성적(polyponic)이다. 공간적 복수성은 시간적 복수성의 이면이다. 작품 속 도상은 사물자체보다는 그 이전이나 이후의 유동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는 서사가 있지만, 결론을 향해 최 단축 거리를 설정하는 논리적 언어와는 다른 서사이다. 그것은 시간예술인 음악이나 문학과는 다른 조형예술만의 방식인데, 관객의 시선은 독자나 청자와 달리 정해진 경로를 따를 필요가 없다. 공간적 형식인 미술은 이 부분을 봤다가 저 부분을 봤다가 할 수 있다. 정해진 시간적 연속으로부터 벗어나, 관객이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매번 이야기는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다양한 시점이 복합되어 있는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미술의 어법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여러 사건의 조직’(아리스토텔레스)을 뜻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플롯 역시 느슨해진다. 어떤 목적과 계획을 추진시키게끔 되어 있는 작품 속의 사건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와해된다. 그러나 아무 연관 없이 나열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찾아내 단지 하나의 상자 안에 넣고 흔든다고 해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기계이든 유기체이든 효과적인 연결망이 있어야 작동하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그것을  ‘존재의 대연쇄’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에서 찾기도 했지만,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의 시대에 그것은 각자 찾아야 한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이 알고 보면 이런저런 고리에 의해 연결망을 이루듯이, 이세준의 작품은 또한 연결망을 지향한다. 그런 연결망이 명확히 감지되는 않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하나의 주된 줄기를 가지는 나무모델이 아니라, 뿌리줄기의 모델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시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나의 그림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닮아있다’고 밝힌다. 현대소설의 어법을 확립한 이 ‘탈 중심화 된 구성’은 현대미술의 어법과도 유사하다. 공간적으로는 중심과 주변의 유기적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달라진다. 사물과 말, 사건과 서사, 지각과 기억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현대예술은 이 간극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탄생했다. 가령, 시간을 주제로 하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에서 소설이 재생하고 추구하고 지우고 예견하는 것은 특히 시간이라고 말한다. 마르트 로베르에 의하면, 소설이 끊임없이 그의 가짜 연대기 속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 이야기, 혹은 간단히 말해서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탐구’라는 제목은 소설이 실로 지닐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 소설이 잃어버린 시간의 탐구이고 감정교육이며 배움과 형성의 시기, 다시 말해서 사용된 시간과 공간의 탐구인 것이 사실이라면, 소설은 환상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미니멀리즘 이후 현대미술 역시 시간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시켜 왔다. 모더니즘에 전제된, 공간적 관계의 명료성이라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시간이라는 불순한 요소에 의해 시작도 끝도 없는 불분명한 과정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현대미술의 추이는 회화라는 형식의 억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세준은 회화를 통해 이러한 현대적 감수성을 표현한다. 현대예술의 추이가 그래서일 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러하다. 우리 인생을 잡다하게 채우는 수많은 단기적인 목표들은 목표 없는 시간에 대한 공포증에 불과하다. 이세준의 작품은 이러한 시공간 간극들에서 예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출전; 2012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