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명 전(7.20-9.22, 송은 아트스페이스)
정문경 전(8.1--8.18, 아트스페이스 H)

 

천성명 전과 정문경 전은 큰 전시장 몇 개 층을 거대한 인형들로 채운다. 둘은 모두 조각과 출신이지만, 조각의 기본 질서를 이루어왔던 인체가 아닌 인형에 주목한다. 동시에 그들은 현대조각의 추이를 따라, 예술(Art)이 아닌 사물(Objecthood)의 편에 선다. 인형의 외관을 가진 작품들은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속이 텅 빈 플라스틱 통이나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진 천 주머니로서의 유사(類似) 인간은 세계의 척도로서의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여전히 기념비적 스케일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 그것들은 전시장 바닥이나 귀퉁이에 나뒹굴려 있다. 인형들은 그나마 온전한 형태도 아니다. 잘려나간 팔다리는 유기적 전체의 일부이긴 하지만, 이미 피 흘리는 고통을 끝내고 단편 고유의 생동감으로 꿈틀대는 듯하다.

 

벽면에 붙은 작품을 비롯하여, 전시장을 채우는 작은 작품들 역시 단편을 이루며, 퍼즐 조각처럼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간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인형 단편들은 전시 전체의 파편적 성격을 예고한다. 단편들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담지 한다. 그러나 깊은 본질과 핵심을 가지는 수수께끼는 아니다. 안팎을 뒤집어놓은 정문경의 미키 마우스는 표면의 바로 안쪽, 즉 너덜거리는 시접과 인형의 눈 코 입을 만드는 플라스틱 부속 기구들의 흉측한 돌출부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며, 천성명의 분해된 인형은 원래 형태로 조립할 수 있는 요철 구멍들을 노출한다.

 

 


 

 

인간 아닌 인형을 원형으로 삼아 제작된 산물은 내부와 외부를 구별할 만한 기준이 없다. 그것들이 자아내는 수수께끼는 심층이 부재하다. 수수께끼가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크기와 흩어진 모습을 통해 시점과 종점을 알 수 없는 표면들을 정처 없이 표류하게 됨으로서 생겨난다. 전시는 전체를 일괄할 수 있는 시점이 부재하다.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전시장 전체는 인형 자체에 내장된 기괴함이 증폭되는 무대이다. 프로이트가 기괴함(Uncanny)을 분석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인형이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공포와 매혹을 자아낸다. 인간의 꼭두각시로서의 인형은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주체의 타자이자 분신인 인형은 부분적 대상들이 조합된 것이며, 그렇기에 산산이 흩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준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판에 박힌 일을 단조롭게 수행하는 자동인형 같은 존재, 즉 인간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불안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도처에서 기계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침범하였다. 인간이 생기가 잃어가는 만큼이나 사물은 활기를 띄게 된다. 인간성이 부재한 현대적 환경에는 물신적 환상이 가득하다. 합리화의 절정에서 비합리성이 본성을 드러낸다. 두 전시에서 여전히 인간이라는 비유와 무관할 수 없는 인형들의 절단과 해체는 이러한 침범과 변형을 말한다. 

 

FRP로 만들어진 천성명의 인형들은 작가를 닮았다. 인형은 작가의 분신들로 자신, 더 나아가 현대인을 ‘부조리한 덩어리’(전시부제)로 간주하고, 여러 연극적 장치를 동원하여 은유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려진 인형 몸통이나 물 없이 수영하는 인형, 꺼내어진 심장 등은 인간과 환경 간의 단절감을 보여준다. 3층 전시장 바닥에 깔린 메가폰으로 흘러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발췌된 대사들은 온전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 전시장 여기저기에 배치된, 장대에 관통된 머리통, 돌처럼 웅크린 몸통, 목 잘린 소녀 상 등은 단편을 단편으로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연한 기준인 몸을 드러낸다.

 

2층부터 4층을 관통하는 공간에는 등불을 든 소녀가 수직으로 쌓여 있는데, 올 곧게 서서 여러 방향을 고루 향하고 있는, 자못 계몽주의적 광휘를 뿜어내는 상들은 머리가 없음으로 인해 맹목적 형상으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등불 든 소녀는 태양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태양은 지상의 부조리한 덩어리들을 더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천성명의 작품은 구성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이 엇박자를 이루면서 모순 덩어리로서의 인간을 부각시킨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구조에 둘러싸여 있지만, 상호간에 원활한 트임이 없다. 다른 수심을 암시하는 색이 칠해진 바닥 위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은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듯 보이며, 각 색깔에 맞는 심장은 바깥에 나와 있다. 주체와 대상 뿐 아니라, 주체 안에서도 괴리가 있다.

 

여러 개로 복제된 상들과 기호화된 자연, 태양을 대신하는 인공조명 등이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인공적 구조들은 연속적인 코드 화를 통해 톱니를 딱딱 맞추어 가는데, 정작 구조를 창조해야할 인간은 단순히 구조의 산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함은 오히려 건강함의 증후일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장면들은 아직 구조로 완전히 식민화되지 않는 상황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조보다는 배치의 기술을 통해 구조의 보편성에 틈을 낸다. 여러 방들 속 사물들은 표준적인 존재들을 생산할 유일한 기표의 통제아래 놓여 있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기호화된다. 생경하게 드러나는 절단면들은 미지의 것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속가능한 면으로 활성화 된다.

 

그것들은 기능성과 상징성을 박탈된 상태이지만,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는 생산의 회로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래서 소비도 될 수 없다. 새로운 접속을 시도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는 단편들은 몸의 일부라는 점에서, 욕망이나 죽음이 떠올려진다. 죽은 듯 고요하면서도 맥동하는 단편들은 재현이 아닌 변형, 승화가 아닌 배출의 무대이다. 이 위반의 무대는 가상을 통해 통합에의 환상을 주는 상상과 상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인간 대신 무대의 주인공을 차지하는 인형은 ‘모든 대상의 경계가 폐지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상’이며, ‘시체이며 조각난 신체이고, 주체성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신체이자 주체성이 생기기 이전의 신체’(할 포스터)를 예시한다. 

 

정문경의 ‘floating floating’전은 단편이 표면과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표면은 단편보다 실체(본질)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몇 십 배 확대된 거대한 인형은 잘려져 있을 뿐 아니라, 안팎이 뒤집혀 있다. 거기에는 단편에 고여 있을 조금의 내면성도 남겨두지 않는다. 눈과 코 부분에 돌출된 거대한 나사는 몸의 구멍들이 안팎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사실을 부정한 채 꽉 밀봉되어 있다. 전체가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어디와 어디를 잇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이음매들은 예술작품이나 유기체에 특유한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해체한다. 지인들의 옷을 수집하여 깃발을 만들어 경사지게 세워놓은 2층 역시, 전체는 조망되지 않고, 드리워진 깃발 하나하나를 열어젖히면서 나아가야 하는 통로로 다가온다.

 

 


 

 

몸의 연장으로서의 옷은 깃발이라는 기표의 형식을 갖추면서 그 표피적 측면을 강조한다. 몸통은 사라지고 외부를 향해 깃발처럼 게양해 놓은 껍질만이 펄럭거린다. 3층의 미키 마우스는 원래의 인형 크기와 유사하지만 홀딱 뒤집힌 형태이며, 벽면에는 그것을 직접 스캐닝 한 이미지들이 붙어 있다. 안팎이 뒤집힌 인형은 기계적일만큼 무덤덤한 표정아래, 어떤 강렬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다. 스캐닝 이미지들은 표면에 근접하여 있지만, 하나의 막이 쳐 있는 듯 흐릿하다. 그것들은 무의식 속에서 떠도는 형상처럼 보인다. 확대된 형태와 깃발의 형태에 이어, 스캐닝 한 형태는 깊이 보다는 표면을 강조한다. 흐들거리는 껍데기와 달리, 아주 깊숙한 곳에 있다고 가정되곤 하는 무의식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욕망은 억압과 승화로만 가능한 고정된 주체를 끝없이 요동치게 한다. 뒤집은 인형을 스캐닝 하여 떠도는 무의식을 표현한 3층의 작품은, 무의식이 어떤 심층구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 제작 방식으로 구축 되는 것’(펠릭스 가타리)임을 알려준다. 무의식은 깊숙한 내면이 아니라, 표층에서 현실의 사물들에 들러붙어 작동하는 것이다. 표면은 깊이와 달리, 표상이나 기호화, 의미화와 거리가 있다. 그것은 단지 욕망에 의해 출렁거릴 뿐이다. 유기체를 벗어난 새로운 모델에서, 절단은 단절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흐름을 만드는 접면이다. 접속 가능한 장소인 접면은 무엇과도 잘 붙어서 유동하는 표층을 유지한다. 부분은 동시에 전체가 된다. 분리된 신체에서 강박적으로 큰 머리(26배 확대)와 큰 손(18배 확대)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몸 전체를 나타냄을 예시한다.

 

‘불안스런 이질감’(프로이트)을 조성하는 이 상태는 정신분열의 증후로 간주된다. 기억 대신에 모든 것이 현재인 생동감 있는 현실을 살게 하는 분열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에서 상실감이나 박탈감을 벗어나,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저자들은 기계의 구조적 통일이나 유기체의 개체적 통일을 거부하고, 욕망과의 직접적인 유대를 요구한다. 이러한 유대는 주체를 구조로 환원시키려는 동질화에 맞서, 이질성 및 특이성으로 분산시킨다. 지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틀 벗어나기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보편주의적 표상은 무너지고 주체는 다시 창안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