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채널 비디오와 사진 등으로 이루어진 이봄순의 전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기하추상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난데없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전통의 정점에 서있는, 이 바람 한 점 불어올 것 같지 않을 진공의 세계를 교란시킨다. 화면은 곧이어, 구획된 면들 사이로 들락거리는 관객의 머리들을 보여줌으로서 이 이상한 조합의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작품 [뮤지엄 포트폴리오]에서 발자국 소리들이나 사람들은 형식미 충만한 순수 추상의 세계에 침입한 이질적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기하학적 요소로 구획된 이 세계가 미술사의 논리를 구축해 해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을 유명 미술관의 한 모퉁이임을 들춰낸다. 작가는 미술관에 가서 작품보다는, 작품이 놓여 있는 배경에 주목한다. 그 배경은 아마도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구석들이 분명하다. 이 장면은 연출된 것도 아니고 가공된 것도 아니며, 단지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하얀 벽, 칸막이, 출입구 등의 건축적 요소와 그 위에 떨어지는 인공 및 자연광의 상태, 결정적으로는 카메라의 시점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다.

 

사진적 시점은 지나치기 쉬운 장면들을 포착해 내곤 한다. 특히 부분 사진들은 시각에 있어서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해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현대 회화 또한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해체함으로서,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졌다. 자율성을 간취한 미술 언어가 순화되어 그 정점에 이른 것이 어떤 재현적 환영도 떠오르지 않게 할 완전 평면이었다. 평면성을 향한 진보는 모더니즘 미술의 시각적 이데올로기임이 추후에 밝혀지긴 했지만, 현대미술은 아직 모더니즘이라는 거인의 그림자 안팎에서 노닐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 건물 내부를 찍은 [Form of Abstract] 시리즈는 중간 중간 검게 칠한 부분이 있는 독특한 건축 공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에서도 작가가 따로 첨삭한 부분은 없다. 눈에 띄지 않는 한 장면을 선택했을 뿐이다. 결국은 빈 공간이다. 작가는 공간에 놓여 진 그 무엇이 아닌, 빈 공간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무의미도 의미의 한 종류이듯이, 이 빈 공간조차도 의미나 해석으로 채워질 것을 요구한다. 곧 이어질 해명들은 작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소통은 완료되었다고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봄순이 제시한 빈 공간, 더 나아가 비워둠은 준비된 대답으로 채워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9월 공근혜 갤러리에서 있었던 [아무것도 없는 전시 3]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전시는 나지막이 들려오는 1인칭 현재 시점의 나레이션이 들려오는 가운데,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텅 빈 무대를 비추는 조명만이 있을 뿐,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전시였다. 이 몸 둘 바 모르겠는 공간은 너무나 투명해서 수수께끼 같은 장소이다. 이 전시에 대해 그녀는 ‘결론이 나거나 해결점에 도달하기 직전의 순간에 머무르고, 그 불확실함 속에서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은 즐겁다. 이러한 입장은 때때로 작업의 주제이자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무대 앞 계단 아래 짙은 물감을 풀어 조성한 심연은 극명하게 보여 지고 분명하게 말해진 것들의 한없는 불확실함을 예시하는 듯하다. 들추어진 채 검은 막으로 뒤덮인 전시장 모퉁이, 그리고 출구 쪽에 걸려 있는 달 이미지 역시 결코 이면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시되고 확실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전제나 제도적 관성에 의한 판단’에 의한 것이고, 작가는 이를 ‘거절’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오차’에 관심을 갖는다.

 

 

 

 

 

이 전시의 작품 [뮤지엄 포트폴리오]와 [Form of Abstract] 또한 시차를 이용한다. 진기한 볼거리와 충만한 의미들로 가득해야할 전시장을 텅 비워 놓는 이봄순의 작품에서 오차는 해명이나 보정으로 해결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그자체로 작품을 서있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일종의 개념미술로 보여 질 수도 있지만, 개념을 재현하거나 개념 미술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뭔가를 잔뜩 늘어놓는 ‘아카이브 스타일’을 벗어나, 지각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연극적 장치들이 볼만하고 말할만하다. 관례적으로 볼 때 전시 공간은 볼거리와 말할 거리가 집중되어 있는 장소이다. 이봄순은 전시장에서 안 봐도 될 귀퉁이나, 아무런 재현(표현)적 장치가 없는 빈 무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아무것도 없는 전시 3]에서 보여 짐 대신에 공간을 채운 목소리 역시, 작가라는 발신자가 관객이라는 수신자를 향해 발언한 명확한 메시지 전달과는 거리가 있는 불확실한 서사로 흘러갈 뿐이다. 비디오, 사진, 때로는 실제 공간에서 연출되는 이 텅 빈 무대는 단순히 지우기나 비워내기를 넘어서, 분명하다고 믿어지는 갖가지 견해들과 사물들이 삶과 예술을 왜곡시켜 왔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된 현대 언어학은 소통의 가장 강력한 수단인 언어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기표에 일대일 대응하는 고정된 기의에 대한 개념은 포기됨에 따라, 의미는 끝없는 의미화 과정으로 와해되었다. 이봄순의 작품에서 오차와 시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각하는 몸을 가운데에 놓는 연극의 무대는 시간성과 관련된다. 하염없는 시간성은 지시대상이나 의미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지연은 보충을 요구한다. 그것은 내뱉어지는 말이나 서술되는 글처럼 불확정적이다. ‘아무 것도 없는’을 강조하는 이봄순의 작품은 믿어지는 만큼의 안정성과 고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우리의 소통 수단을 주목하게 한다. 현실의 모호한 단편이나 텅 빈 무대는 기의 없는 기표에 해당된다. 화이트 큐브에 안치된 예술작품에 전제된 자율성이나 초월성은 제도적, 언어적 맥락의 문제이기에, 맥락을 조금 비틀었을 때 그 파편적 우연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진실 된 순간이 폭로되는 상태나 상황을 부각시키는 것은 동요하는 기호들이다. 이봄순은 이러한 폭로를 위해 또 다른 장황한 수다나 대규모 물량 공세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뒤집기는 그 안에서 일어나지, 외부의 무엇을 요구하거나 호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배후가 없다. 배후가 없기에 해석 또한 모호해진다. 관객 면전에 기표가 있고 그 기표에 딸려오는 기의와 참조대상이 확실할 때 해석이 성립된다. 예술에 있어 형식과 내용의 관계 또한 그렇게 설정되어 왔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말했듯이, 예술작품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환상을 떠받쳐주는 것도 예술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예술작품에 접근하는 습관에 불과하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해석은 작품 전체에서 일련의 요소를 뽑아내는 것을 뜻한다. 해석의 임무는 실질적으로 일종의 번역 작업이며 이는, 텍스트를 보존하기 위한 근본 전략이다. 그것은 진짜 텍스트인 숨은 텍스트를 찾기 위해 배후를 파헤치는 것이다. 작가가 심어놓았다고 가정되는 어떤 분명한 의미를 추후에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달리, 진정한 해석이란 텍스트에 산재한 빈 공간으로부터 구축되는 것이다. 개념미술에서 나타나는 바의 전반적인 탈 물질화 현상은 이러한 빈 공간을 부각시킨 바 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만 이봄순의 작품은 개념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새로운 개념의 창안에 방해물이 될지 모르는 대상들이 사라진 자리에, 예술을 향한 태도만을 남겨 놓는다. 수지 개블릭이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뒤샹의 견해를 인용하듯이, 예술작품은 모든 사람에게 습득될 수 있는 반복적인 동작을 요구하는 기술 혹은 솜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한다. 뒤샹은 물체 자체가 지닌 특별한 가치 또는 기능이 아닌, 그것을 예술로서 수용하려는 의지와 예술을 향한 태도만이 예술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순수 사고를 위해 미술을 축소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축소조차 다시금 미술계라는 제도를 통해 다시금 맥락화 되긴 하지만, 미술사에 등장했던 개념미술이 미술의 외연을 넓힌 것만은 사실이다. 이봄순의 과감한 작품은 작가의 진기명기가 발현된 전문화된 예술작품이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가득한 현실에 가세할 뿐인 독단적 의미의 폭주를 탈각시킨다. 독특한 상황의 발견 또는 연출은 폭주하는 의미를 느릿한 불확실성으로 전도시키는 ‘의미 있는’ 태도이다. 이봄순은 이미 많은 관례로 가득 차 있는 화이트 큐브의 중심을 텅 비워 놓고, 그 주변에 주목한다.

 

 

 

 

사건은 중심이 아니라 경계들이 교차하는 전시장 모퉁이나 빈 전시장 같은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며, 작품이란 이러한 사건을 눈에 띌만한 것으로 세워놓는 것이다. 작가가 창안한 개념은 수년째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왔지만, 그 개념은 어떤 정보나 객관적 본질 같은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대상과 의미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둔감해진 지각을 일깨우기 위해 비워둘 뿐이다. 이봄순의 비워두기는 수동적 체념보다는 과감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연한 ‘당신’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말들은 어떤 논점을 향하거나 논쟁의 상대를 전제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전시 3]에서 관객을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로 이끌고, 빈 무대와 심연 사이에 선 관객이 그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떠도는 견해들은 전시장 바닥에 조성해 놓은 바닥없는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불행은 바로 견해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예술은 견해를 갖지 않는다. 심지어는 철학마저도 그렇다고 본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우리는 종종 철학이란 ‘소통 가능한 합리성’이나 ‘보편적인 민주적 대화’로서의 끊임없는 토론이라는 생각을 품지만, 이보다 더 부정확한 생각은 없다. 누구든 결코 동일한 구도 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하지 않고 비판하는 자들이 바로 철학의 치부이다. 오히려 논쟁가들은 앙심으로 고무된다. 그것은 대화를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거시키는 냉혹한 독백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공허한 일반 개념들을 서로 대립시키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들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철학은 토론을 혐오한다. 철학이 논쟁을 참아내지 못하는 까닭은 철학자체의 불확실성이 철학을 좀 더 고독한 또 다른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예술은 개념과의 관계에 있어서 철학과 차이가 있지만, 저자들의 결론은 공유될만하다. 작가와 작업, 그리고 작품을 불확실성에 열어놓는 것, 그리고 비워놓음과 침묵은, 끝없는 토론과 회의, 프레젠테이션과 강의, 논증과 번역, 노동에 가까운 작업에 시달리는 현대의 작가에게 진정 필요한 오아시스 같은 장소이다.

 

‘아무것도 없는’ 전시를 꾀하는 이봄순은 ‘의미의 잉여가치에 대립하는 무상성’(알랭 로브그리예)을 강조한다. 성스러운 단순성의 편에 놓이는 무상의 것들은 의미를 제공하고 제공받으려는 조바심들을 걷어낸다. 로브 그리예가 말하듯이, 진정한 작가들은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우리의 맑은 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분절언어는 의미의 법칙들을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 이 맑은 의식은 무의미와 결핍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이봄순의 작품은 이미 많은 견해들로 뒤덮여 있는 화이트 큐브와 화면에, 결국은 도그마가 될 또 하나의 견해나 그 견해를 표현(또는 재현)할 대상들을 무화시킨다. 창조를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비워둠이다. 예술의 공간은 이러한 무한한 비워둠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비워둔 자리에서 작가는 ‘또 다른 공간의 다가옴, 창조적인 기원, 그리고 시적인 모험의 장소로서의 공간을 건립하고,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블랑쇼) 또 다른 언어에 몰두한다. 이봄순은 이 전시에서 거의 아무 것도 만들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극단적인 비어있음의 자리를 다가오게 함으로서, 진정 창조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출전; 송파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