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GS 타워 갤러리에서 열린 ‘animalia’전에서 나타나듯이, 예미의 작품에는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동물은 의인화되어 인간사회를 풍자하기도 하고, 만물의 영장이자 만사의 척도로 인간을 중심에 세워 놓았던 고정 관념에 의해 억압받는 타자로 나타난다. 동일자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타자이기에, 타자의 억압은 그 해악이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예미의 작품에서 인간 사회는 진정한 목적을 잃은 문명의 수단이 동물성과 얽혀 있다. 수단을 위한 수단이 동물성과 결합될 때 이성은 맹목이 된다. 무리에 섞이기 힘들었던 작가의 자전적 배경은 주변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관찰하게 하였고, 그 또한 인간사회에 대한 다소간 냉소적인 관점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인간-동물 군상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작품에서 사회생물학 같은 관점도 보인다. 그녀가 사회에서 주로 관찰한 것은 집단성과 폭력성이다. 예미의 작품에서 이러한 인간의 부정적 성질이 투사된 대상은 동물이다. 인간이라는 배타적 집단은 ‘인간’이라고 간주되지 않은 것들을 폭력적으로 다룬다.

차이가 차별로 전화되는 것은 인간사에 흔히 일어난다. 지배적 인간에 속할 수 있는 부류들도 점점 줄어드는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에서, 타자는 소수가 아니라 점차 다수가 된다. 예미의 작품에서 약육강식의 문화, 특히 육식은 비판의 정점에 놓인다. 공장식의 대량 사육은 타자의 고통에 무심하고 다른 생명을 도구시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동물적 야만성을 극복했다고 믿는 문명이, 인간 또한 동물이라는 점을 망각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예미의 작품에서 개, 늑대, 여우는 사회인의 세 가지 전형을 나타낸다. 길들여지지 않은 늑대는 이상적이며, 개의 사회성은 일반적인 인간과 비슷하며, 여우는 개과에 속하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맴도는 성질이 개인주의적인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개에게는 사라진 야성을 그린 <13월_늑대자리>, 미리 주어진 같은 동작을 집단적으로 반복하게 함으로서 주입식 학교 교육을 풍자한 <개 훈련소>, 만발한 꽃을 배경으로 닭을 물고 있는 <닭 잡은 여우>가 그 예이다.
또한 동물성은 여성과도 중첩된다. 출산과 육아에 의해 좀 더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간주되어왔던 여성은 숭고함과 비천함을 한 몸에 각인하는 모성적 존재이다. 예미의 작품에 나타나는, 동물성을 감추지 않는 활기찬 여성은 30대 중반의 결혼한 여성 작가로서 자의식이 투사된 캐릭터이다. 예미는 카이스트에서 남성들이 가장 많이 전공하는 과 중의 하나를 졸업했지만, 그 또한 예술을 통한 문명 비판의 한 항목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생각한 바를 빙빙 돌리지 않고,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표현 경제성 원리에 충실한 면모도 보여준다. 여러 색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게 쓱쓱 그어진 붓질에는 혼돈과 활기가 뒤섞여 있다. 보호색처럼, 배경과 잘 구별되지 않은 형태들은 경계에 대한 작가의 감각을 표현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파괴와 진보가 결합된 산물인 괴물의 모습에서 두드러진다. 가령, 방사능 누출 같은 문명사회의 재앙은 신화시대의 괴물이나 묵시록적 공포를 상기시킨다.
일상생활과 밀착된 폭력은 육식문화를 풍자한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작품 <우리는 전쟁 중에 살고 있다>에서 돼지 바비큐 굽고 있는 단란한 가족 소풍에는 남의 살을 먹는 폭력적 행위에 대한 자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육가공 공장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어 파는 인간들을 포함하여 유모차에 실린 아기까지 모두 돼지화 된 모습이다. 작품 <육식 요리사>에서 가정용품 광고에 나오는 듯한 밝은 표정의 주부는 고기를 요리하고 있는데, 찬장에는 인간의 머리와 손 등이 진열되어 있다. 동물과 인간이 뭐가 다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비판과 공감이 더불어 있다. 양자가 도구화되는 단계에서 비판이 시작된다.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린 채 식탁에 놓인 돼지로 만찬을 하는 여자들을 그린 작품 <봄 만찬(모성)>에서 작가는 ‘자기 새끼를 먹이기 위해 다른 동물을 희생시키는 모성을 아름답기만 한가?’를 묻는다. 작품 <예쁜이 약육강식>에서 애완동물, 여자, 그리고 예술작품은 예뻐야 잘 팔린다는 경쟁사회의 논리에 의해 동일한 반열에 놓인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맞게 동물을 길들여 왔지만, 과학기술이라는 수단을 가진 현대사회에서 동물은 더욱 착취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도구화된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은 동물성을 극복하고 그것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믿었지만, 오늘날 억압된 타자의 복귀 속에 동물성 또한 예기치 않은 이질적이고 낯선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동물과의 차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왔던 인간은 차이-가령, 언어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직립의 존재-를 큰 의미를 부여해 왔지만, 오늘날 더욱 발전된 과학기술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토템이나 신화의 시대 못지않은 잡종 공동체의 시대로 만든다. 예미의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은 많이 중첩되지만, 지난 9월 홍대 앞의 요기가 표현 갤러리에서 있었던 그룹전에서 보여주었던, 자신의 유년기를 주제로 한 최근 작품들은 인간의 특징을 부각시킨다. 다른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유독 오랜 유년기를 거쳐야 하고, 자연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이 잠재 기간 동안 상징적 언어를 비롯한 문화의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필요와 욕구를 넘어서, 자아의 요구와 주체의 욕망이 양성되는 과정에는 전래된 관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가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말하듯이, 지배담론은 인간의 태생적 나약함을 인간 고유의 우월한 힘으로 전도시키고, 심지어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근원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또한 인간의 속성, 그 뿌리가 가리키는 것은 자아의 소유이고, 이는 비(非)인간을 자기 것으로 삼으며 연장된다. 우리는 지나간 유년기에 대해 관대하게 회고하곤 하지만, 그 역시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 인간이란 것이 되기 위해 강제되었던 갖가지 질곡들을 겪어왔던 시절이다. 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의 분별은 교육을 통한 상징 언어의 내면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 앞서 이미 주체를 구성하고 잠식하는 상징 언어는 중성적이지 않으며, 권력관계에 물들어있다. 인간 잘되라고 만들어진 문명은 자연을 괴물로 만든다. 자연은 인간의 거울이다.
방사능 누출 사건에 의해 기형화된 동물들을 그린 작품들은 그 맞은편에 존재할 인간 괴물을 예시한다.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말하듯이, 오늘날 주체성은 더 이상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적인 세계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끝없이 재 발명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미의 작품은 ‘어떻게 주체성을 생산하고 포획하고 풍부화 하는가’(가타리)에 대한 문제에서 동물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강조한다. 예미의 작품에서 동물성과 여성성이 연결되는 지점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여성을 문명과 구별되는 자연으로 간주해왔던 지난 시대의 성별 이데올로기- ‘여성들은 오로지 종의 번식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들의 소명은 그 점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여성들은 개체로서보다는 종족으로서 살아간다’(쇼펜하우어), ‘여성은 아름다운 동물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동물이다’(프루동)는 식의 관념에서 여성은 결정적으로 인간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를 반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내야 할 주체성의 문제로 다가온다.
마녀들로 몰려서 화형당한 여자들은 고양이나 뱀, 두꺼비 등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오늘날 그러한 희생의식은 상대가 고기임으로 인해 자신은 고기가 아니라는 도그마를 확산시키는 대중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지배적 문화에서 여성이 고기로 취급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인간성을 동물성과 애써 구별하려는 태도에는, 결국 먹고 먹히는 원초적 사회관계를 은폐하려는 기도가 있다. 난 멜링거는 [고기]에서 육식선호가 생물학적인 진보과정의 결과이며 육류 음식은 호모 사피엔스가 발전하는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본다. 육식은 가장 기본적인 섭식의 차원에서 권력 관계에 기반 해 있는 이분법의 기반을 이룬다. 착취되는 자연에는 동물 뿐 아니라 약자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타자를 잉태할 수 있는 존재인 여성은 타자의 고통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예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여성과 동물성의 유대는 타자들과의 동병상련이자,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대안의 정체성을 위한 중요한 선택이다. 지배와 억압을 야기하는 문화/자연의 양극화를 거부하려면 인간과 동물의 매개 고리가 필요한데, 경계 위에 서 있는 여성은 그 역할을 맡기에 적합하다.
출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역량강화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