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장 벽에 걸린 차승언의 작품에는 캔버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져 완벽한 밑칠이 이루어진 다음 이미지가 얹혀지는 일반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있다. 올이 숭숭 빠져나간 바탕 면 뒤로 캔버스를 지탱하는 나무틀이 보이고, 그려졌다기보다는 짜여진 이미지는 성긴 바탕면과 함께 중력을 받아 축 늘어져 있곤 한다. 바탕과 하나가 되어 늘어진 이미지는 관객이 만지면 형태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중성적 바탕 면이 아니라, 자체의 물질성을 주장한다. 캔버스 천 뒤의 나무 프레임 모양대로 염색한 후 직조한 작품 <프레임>은 프레임 자체를 부각시킨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저 건너편의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창이 아니라, 그 자체를 주목하게 한다. 언어의 물질성이란, 잘 모르는 언어를 읽으려 하거나 들으려 할 때 극대화된다. 가령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하얀 종이 위에 검게 씌여진 글자를 읽기 보다는, 심미성(조형성)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언어를 들을 때 억양 같은 음악적 요소는 두드러진다.
언어의 물질성은 참조대상과 의미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지만, 소통의 몸체를 이루는 또 다른 요소를 발견하게 한다. 예술이나 삶은 대상과 의미에 대한 명료한 지시성 보다는, 불명료함과 더 밀접하다. 언어의 물질성은 그것의 참조대상과 의미를 불투명하게 하는 방해꾼이지만, 참조대상과 의미에 묶여있던 언어를 해방시키려 했던 모더니즘은 이러한 방해를 해방으로 전도시키려 한다. 소격 효과, 낯설게 하기 등으로 정의되곤 하는 방해의 미학은 모더니즘의 대표적 전략이 되었다. 차승언의 작품 역시, 드리워진 베일처럼 늘어진 테이프처럼 그것이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들은 불확실하다. 성글게 함, 또는 늘어짐에 의해 한없이 불투명해진 언어는 사물과 의미를 여기에서 저기로 실어 나르지 않는다. 반대로 언어는 그것이 실어 날라야 할 사물과 하나가 되어있다. 말이 곧 사물이고, 사물이 곧 말이다. 언어학과 현대 미술에서 말과 사물의 간극이 의식된 이래로, 양자간의 거리를 좁히거나 아예 단절을 당연시하는 흐름이 있어왔다.
미술사가 보여주듯이, 현대회화는 환영 대신에 회화, 즉 평면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해체되어 왔다. 이렇게 해체된 요소들로 실험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외부의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완결되며 궁극의 목표를 내포하는 물체 및 언어로서의 본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미술사가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모더니즘의 역사가 장식과 밀접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났던 미술공예(Arts and Crafts) 운동이나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실험은 물론, 클림트, 고갱, 모네, 마티스 등 근대 회화의 대가들에서도 감지된다. 가령 안락한 팔걸이 의자 같은 예술을 추구한 마티스에게 ‘표현’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얼굴이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림의 전체적인 배열이 표현적이다. 인물이나 사물이 점하고 있는 면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빈 공간, 비례 등 이 모든 것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한다. 구성이란 화가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장식적인 방법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그린버그가 말했듯이, 장식은 모더니즘 회화를 괴롭히며 떠나지 않는 유령이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회화의 공식임무는 ‘장식을 장식에 대항해 사용하는 법을 발견하는 것’(그린버그)이다. 피터 웨렌에 의하면 그린버그는 시각상의 이미지를 회화의 물적 지지대(material support)-이젤화에서는 캔버스, 벽화에서는 벽이 회화의 물적 지지대가 된다-속에 용해시킴으로서만, 장식을 피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린버그는 입체파가 그림을 하나의 장식된 오브제로 변형시켰다고 하면서, 더 이상 캔버스에 장식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식과 캔버스의 초월적 통일이 이루어짐을 예시한다. 그리하여 장식성은 더 높은 가치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얻는다. 캔버스와 밀착한 가장 완벽한 평면성을 통해 회화 언어의 순수성을 획득한 모더니즘은 역설적으로 회화의 자율성을 침해해왔던 것들을 다시금 불러들였다. 사라져버린 이미지와 의미를 대신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미학적 개념이 그중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장식이다.
신화적, 종교적, 문학적 서사를 거부하려던 미학은 온통 철학적 개념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부차적인 것은 전경화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또 다른 난해함이나 복잡함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추이는 순수한 동일성의 몸체를 이루는 것은 잡다한 이질성이라는 것이 판명되는 과정들이다. 어떤 기능에 복속되는 공예 또한 이러한 타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다원주의’의 한 항목으로 공예를 복귀시킨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절충안은, 말만 그럴듯한 다원주의만큼이나 공허하다. 평면으로서의 회화라는 모더니즘의 조건은, 처음 전공한 섬유예술의 모호한 정체성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승언에게, 나중에 전공한 회화와의 관계를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섬유예술을 그만두고 회화를 하는 식은 아니었다. 공예/순수미술이라는 이분법은 현대에 와서 지탱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양자 간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섬유예술이 어느 순간 벗어나고픈 질곡으로 다가왔을지라도, 회화 또한 무슨 해방구였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기계 복제의 시대에 손(몸)으로 하는 모든 것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오히려 평면성으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현대미술에서 섬유예술 어법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것은 어느 하나를 억압하지 않고서 서로를 갱신하는 방식이다. 차승언이 주목한 것은 캔버스 그자체이다. 남들에게는 하얀 종이와 다를 바 없는 중성적인 캔버스가 작가에게는 평직, 능직, 수자직 등으로 짜여 진 천으로 보인 것이다. 참조대상이 사라진 현대회화에서 그토록 중요시되었던 ‘마띠에르’같은 물질성에 대한 실험을 차승언은 캔버스를 직접 짜는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바탕을 이루는 실이 선이 되어 운동하는 경향은 평면 뿐 아니라 설치나 행위로도 확장되었다. 가령 투명 실을 전시장이나 건물 외부에 일정 간격으로 드리우거나, 속눈썹을 길게 연장하여 서로 다른 세대를 잇는 이전 작업을 통해 작가는 분리된 항목들 간의 새로운 소통구조를 세우려 했다. 그것은 캔버스 천을 짜듯이 공간과 몸을 짜는 행위이다.
작품, 몸, 시공간을 관철하는 짜기라는 행위에는 이 모두를 텍스트로 간주함으로서 가능하다. 롤랑 바르트가 현대예술의 특징으로 작품(work) 대신에 거론하는 텍스트(text)란 ‘짜여진 것, 얽힘, 짜여진 방식’으로 정의된다. 바탕과 이미지가 일체화되어 있는 차승언의 작품에서는 재현이 아니라,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상호 엮어져 가며 만들어 내는 생성이 강조된다. 텍스트는 궁극적인 본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구축하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진다.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면, 동양의 직녀나 서양의 베를 짜는 여신 클로토처럼 고풍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연속적인 결합을 통해 확장되는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네트워크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로서의 작품은 무한한 구조가 있으며, 복수 언어적이다. 텍스트라는 형식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차이를 삭제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바탕은 하늘이나 대지처럼 변화무쌍하게 변화한다. 차승언의 작품에서 짜임새 속의 빈 공간 역시 텍스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요소이다. 재료와 방향, 밀도를 다르게 하여 짜여지는 바탕은 의미 체계가 미묘하게 변화하는 순간을 드러낸다. 캔버스나 틀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조차도 변화의 항목이 되는 차승언의 작품은 텍스트 그자체가 그렇듯이, 원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불완전한 원초적인 것을 대신하는 보충’(데리다)만이 있다. 여러 가지 기호들로 된 망을 엮는(짜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방식은 표면 밑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원리가 아니라, 표면을 더욱 다채롭게 확장하는데 힘을 쏟는다. 바탕과 이미지는 하나가 되었고,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 속에서 작품의 의미가 생겨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관련된 의미도 아니고, 순수와 자율로의 여정 및 그 이후의 상황논리도 아니다.
차승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과 초월이라는 양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의 매개지대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재료에 끌려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어 재료를 지배하는 것도 아닌, 수동과 능동 사이의 어느 화합의 지점, 중간태가 이제 재료와 나의 관계’이며, 작가는 ‘물질, 재료와 함께, 상호작용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2011)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섬유예술과 회화, 그리고 현대미술 간의 관계를 고심해왔던 오랜 우회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캔버스는 무엇인가로 덧씌워져 완전히 삭제되어 묻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작업 과정의 일부로 의식화 된다. 염색이나 칠하기는 어떤 패턴을 짜는 과정과 동등한 요소로 간주된다. 그 맥락에서 짜기와 그리기가 복합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페인팅과 염색, 그리고 다른 실을 넣어서 짜는 작업들이 많고, 공간 비워서 짜기도 한다. 이미지와 패턴은 뒤섞인다. 짜기와 페인팅이 복합된 실험에는 버버리 패턴과 마크 로스코의 회화 이미지가 결합되기도 한다.
양자가 단지 ‘명품’이라는 연결 고리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상과 이상, 물질과 정신 사이를 매개할 것을 촉구한다. 전시장 한 켠에 놓인 직조기는 차승언에게 직조기술이 공예도 회화도 아닌 어떤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역할을 했음을 증거 한다. 그렇게 짜여 그려진 이미지는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으로 수직수평이 중심이 된다. 사각형 화면의 틀을 반향하는 그리드 구조는 꼴라주와 함께 회화의 평면성을 확인하는 현대회화의 어법 중의 하나였지만, 붓 대신에 작가가 사용하는 직조기 역시 수직수평이라는 두 좌표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승언의 작품에서 수직/수평의 축은 기준이자 위반의 지점이 된다. 천막 무늬로 짜여진 한 작품 <천막>은 수직 수평에 준하는 패턴으로 짜여 지다가 돌연 사선으로 엇기면서 캔버스 뒷면의 나무틀과 빈 공간을 포함하는 다른 배치를 향한다. 어떤 지점부터는 짜이는 것이 아니라 틀과 축을 가로질러 활주한다.

그것은 이미 직물이라는 틀거리를 넘어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직물과 펠트를 대조한다. 직물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서 서로 구별되는 형식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즉 수평적 선율의 선들과 수직적 화음의 판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유기적 질서는 노동의 모델이 된다. 그러나 저자들이 지향하는 바는, 노동의 홈이 파여져 있는 판(직물)이 열려있는 고른 판(펠트)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고른 판은 모든 구체적 형태들의 교차이다. 이 고른 판은 모든 생성이 자신의 출구를 찾게 되는 궁극적인 문이다. 고른 판에는 익명의 물질, 즉 다양한 연결접속을 행하는 미세한 물질의 무한한 미세조각들이 서식한다. 이 무한한 판에서 작가는 수많은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수직/수평의 기본 틀은 사물의 윤곽을 확정짓는데 사용되지 않으며, 계속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연속적 변주를 통해, 바깥도 안도 또 형태도 배경도 또 시작도 끝도 없는 변이하는 선은 살아있는 선이다. 이 선은 곧잘 틀을 벗어나 여러 차원으로 변주되곤 한다. 차승언이 현대미술에 추가하여 변형시킨 이질적 언어는 실이라는 선적 요소이다. 선적 요소는 베틀이나 캔버스를 넘어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떼어내 놀이하고 실험한다.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실험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전시에서는 베틀이 그 시험대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질적인 것을 섞어 짜나가는 작품은 무척이나 불안정해 보이지만, 그것은 순수와 응용을 나누는 본질적인 언어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언어의 보편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착종된 지배적인 언어들 간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다양한 언어를 호출할 수 있는 판으로서의 베틀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이원론을 통과하여 진정 다원적인 우주로 향한 좌표축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