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 그리고 회화의 정체성
① 이솔
이솔의 작품은 개가 주인공이다. 여러 연극적 상황 속에 배치된 개는 인간을 대신해서 연기한다. 개는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고 인간계에 길들여져 있어서 이러한 연기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작가는 ‘우리네 인생사’를 ‘길바닥 인생’과 비교하며, 개를 풍자의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풍자가 가능한 것은 동물이 인간화되었기 때문이다. 디즈니 같은 대중적 문화산업의 캐릭터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동물들이 다수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은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차이도 있다. 연기에 몰입중인 인간화 된 이솔의 개는 동물 특유의 이질성이 삭제되어 있다. 이질성은 동질화 된다. 작가는 그것들이 비록 개이지만 눈빛은 늑대라고 강조하지만, 개들이 야성을 드러낼 때조차 감정 과잉 상태의 배우 같은 대역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물탈을 쓴 인간의 연기는 농익을대로 익어 공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으로 물든 세상은 인간적인가? 휴머니즘의 역사를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휴머니즘에 근거한 19세기적인 재현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에서 인간의 범위가 너무 협소한 탓에 다수가 타자화 된 탓이다. 작품 또한 길들여짐과 야성 사이에 존재한다. 작가는 개의 야성이 발현될 만한 부분을 붉은색으로 두드러지게 했다. 붉은 색 방점으로 이성적 조절이 힘든 그 부분 또한 코드화된다.
② 김남현
김남현은 인간의 코드화된 행동을 본 딴 캐비닛을 만든다. 그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장소를 사람 실루엣에 맞춰서 변형 압축한다. 장소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함으로서 장소를 연상시킬 뿐 만 아니라, 그곳에서 행해질 하나의 행위를 보여준다. 연인과 껴안기 위한 장치, 화해를 위한 대화장치 등 종류도 다양하다. 보호와 유폐, 그리고 증폭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그것은 하나의 역할극 속에 가두어진 행위이기도 하다. 한명 또는 두명이 들어가도록 설계된 그곳은 마치 한 순간을 고정시킨 관같은 느낌이다. 죽음에 가까운 고독감을 줄 수 있는 그것은 동시에 권력이 고착화된 형태이다. 실제로 그는 교실, 병원, 군대 등에서 영감을 얻은 자세들을 많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개인을 구조화하는 권력의 장치인 것이다. 선생과 학생, 환자와 의사, 졸병과 상사 간에는 서로가 취해야할 자세가 있다. 장소는 달라도 개인을 개인으로서 형성하고 구조화하는 규율이 공통적으로 몸과 마음에 관철된다. 거기에는 자책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벌 받는 기구도 포함되어 있다. 나를 가두기 위한 이러한 감옥은, 외부로부터 억압당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관리하는 단계로 권력이 몸과 정신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시리즈 작업 또한 하나의 틀일 수 있다는 자각에, 인간끼리의 충동을 느낌가는대로 자유롭게 표현하려 한다.
③ 김성윤
김성윤은 가장 정적으로 보이는 그림형식으로 스포츠 선수를 그린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존 사전트의 초상화 기법을 차용했다고 밝힌다. 괴리감이 큰 것 같지만, 1896년에 시작된 올림픽 게임과 당시에 상류층을 주로 그려왔던 아카데믹한 초상화가의 활동 시기는 겹친다. 19세기 말의 올림픽 선수들을 나름의 동시대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당시에는 모더니즘이 무르익고 있었고, 올림픽의 사라진 종목만큼이나 고전주의는 구시대의 언어였다. 이러한 괴리를 작품으로 표현하게 된 계기는 그가 지방에서 아카데믹한 그림을 배우고 풍경화와 인물화를 잘 그리고 싶었던 청년이었다는 것에서 왔다. 서울로 유학 와서 현대미술을 접하고 그 문법에 익숙해지자 자신의 언어는 여러 스포츠 중의 한 종목에 불과했다는 자각이다. 그러나 그는 잘 그린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그 ‘고리타분한’ 스타일로 현대미술을 실행한다. 그의 작품 속 현대성은 몰개성과 차용이 결합된 양식에 있다. 그의 그림은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여 그렸을 뿐 특별한 내용이 없다. 내적인 고백이나 시대정신을 반영했다기보다는, 관객과 공유되는 코드를 최대한 중성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역설을 표현한다. 가령 관객은 1930년대 베를린 올림픽 때, 나치 복장의 올림픽 선수의 모습에서 신고전주의와 나치즘, 사회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이상한 조합을 발견할 수 있다.
④ 최혜경
최혜경의 초창기 작품은 향수를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이는 1차적으로 향수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지만, 향수가 소비사회의 여러 품목 중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주는 인공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압축한다. 향수의 황홀함은 인간의 원시적인 부분에 호소한다. 가장 원시적인 것을 가장 세련되게 가공해 판매하는 것에 이윤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매혹과 비판을 동시에 야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이다. 마침 최혜경의 향수 그림 같은 극사실주의 풍의 그림은 미술 경기의 반짝 호황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없는 소비만을 권하는 스펙터클 앞에서의 소비자는 곧 한계를 보인다. 최혜경의 최근 작품은 물신주의를 야기하는 시각성을 벗어나 말랑거림이나 부드러움 같은 촉각성에 몰두한다. 주된 형식 또한 그림에서 설치로 이동하였다. 시각성에서 몸으로의 전환에 비닐, 장식용 구슬 같은 반투명하고 연약하고 일시적인 재료들이 활용되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향수처럼 마법과 관련되지만, 사용된 재료나 배열방식이 상품에 전형적인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다. 시각적 소유보다는, 전신에 바탕을 둔 향락에 방점이 찍힌 설치작품들은 프레임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세련된 감각적 소비재에서 쓰레기와 유사한 것으로 변한 것들은 몸조차도 코드화를 통해 식민화시키려는 권력으로부터 미끄러진다.
2. 경계 위에서
① 오영은
오영은은 어떤 상황 속에 던져진 인간을 표현한다. 명료한 시공간적 좌표계에 위치지어지지 못하고 던져짐으로서 형태는 이미 불확실해진다. 인간은 감정의 덩어리로 가시화 된다. 분절화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응어리진 낙진들로서의 감정은 불투명하다. 감정의 응어리들은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다가, 어떤 자극에 의해 휘둘려지면 예상치 못한 형태로 튀어나온다. 작품이란 이러한 미묘한 순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또한 또 하나의 언어이기에 표현은 순조롭지 않다. 무언의 것은 언어화하는 미술은 늘 상 불확실성과의 게임이다. 불안과 분노를 표현한 작품 <전해지지 못한 드로잉>이나,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기 힘들다는 듯 이빨만 강조된 작품 <반짝이는 이빨>은 소통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소통의 필요성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불가피하지만, 그것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불투명한 덩어리의 의사소통 방식은 괴물적이다. 작품 <찌를 수 있을까>는 공격과 방어라는 1차원적인 본능으로 퇴행한 소통을 보여준다. 이때의 소통이란 지배적 언어로의 번역이 아니라, 전염이나 감염, 오염 같은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감정이 있고 그다음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 자체가 언어이고, 언어 또한 감정에 물들어 있다. 무엇보다 작품 속 감정은 이미 어딘가에 있는 감정의 전달이 아니라, 작품을 하면서 생겨나는 감정일 경우가 많다.
② 김기석
김기석은 [구석공간을 위한 연구]에서 세 개의 축이 만들어내는 구석에 인간을 놓는다. 그것은 추상적 좌표에 위치 지어진 공간 속 개인이기도 하고, 가장 내밀한 자리에 있는 개인이기도 하다. 공간과 자리의 중첩은 사회적 인간과 실존적 인간을 비교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세 개의 축은 개인을 만들지만, 그를 고립시키기도 한다.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만드는 상징적 구조로서의 언어는 긍정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구석의 개인, 즉 고립과 유폐 속에서 질식할 듯한 그를 향해 달려오는 거센 흐름은 다소간 공격적이다. 한국 사람들이 손거울처럼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작은 인터페이스는 GPS로 개인의 위치를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그 개인이 사회와 원활하게 통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배적 가치 체계에 동화된 생산자이자 소비자일 경우에만 그의 구체적 자리는 추상적 공간과 조화롭게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의 생산자는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품은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속해 있다. 작가 역시 유령 같은 존재이다. 자리 없음은 작가의 영원한 조건이다. 반복적인 사회화로 인한 소외와 상처, 그리고 박탈감을 진기하게 찾아올 뿐인 창작의 희열이 온전히 보상해줄 수 있을까? 그의 작품은 세 개의 축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구조에 온전히 포획될 수 없는, 오히려 그것과 상호작용 하는 경계 위의 존재로 다가온다.
③ 김철환
인체작업으로부터 시작하는 조각은 지상에 우뚝 선 세계의 중심이자 만물의 척도인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 그것은 미술사의 중심을 이루어 온 누드의 역사에서 여실이 보여 진다. 그러나 김철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이다. 인체가 아니라 인체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머리카락, 각질, 때, 손톱, 발톱, 음모 등 지저분하여 금기시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비천(abject)한 오염(defilment)물이다. 나오자마자 폐기되어야 할 부산물은 일일이 수집되어 고풍스러운 장식장에 고이 간직되고 전시된다. 스스로 설 수 없는 나머지 것들은 프레임화 된다. 그것은 경계에 서 있는 예술이다. 그러한 작업의 시작은 밤샘작업 후 향긋한 비누 냄새가 풍기는 욕실 안에 들어온 자신의 악취였다. 조각가로서의 그는 아카데믹한 인체에 한계를 느꼈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한계선상에 서 있음을 자각했다. 이후에 자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산물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것은 창조에 관련된 낭만주의 신화의 역전이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은 인간이 폐기물로 변하는 과정을 기념하는 반(反)기념비적 작품이다. 인체 부산물을 이용하여 우주의 풍경을 연출한 작품은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을 대조한다. 거대한 우주의 시공간 속에서 먼지에 지나지 않는 인간 존재는 미미하다. 그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린다.
④ 권선
미술을 전공하기 이전에 화학을 전공한 권선은 작품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독특한 안료를 사용한다. 그의 작품은 이미지 자체 보다는 사라짐, 변화의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의미는 변화의 낙차에서 발생한다. 시간성은 핵심적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작품에서 관람객은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은 어떤 특이한 재료가 있기에 그러한 작품을 했다기보다는 그의 평소 관심사에 그 재료가 맞아 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소재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반짝 아이디어로 비슷한 작품을 무한 반복하는 맥 빠진 작업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느 날 벽을 보는데, 균열이 가고 페인트 떨어져 나가는 변화를 통해서 어떤 이미지의 스러짐을 겹쳐보게 되었다. 한 꺼풀 씩 벗겨져 실체는 무(無)가 된다. 특히 인간의 사라짐은 많은 울림을 준다. 이후 그는 금색 조각을 석고로 마감하고 인공강우를 뿌리면, 석고들이 떨어져 나가 금색이 드러나는 등의 작업을 통해 변화의 극적인 순간을 작품으로 기록하게 된다. 작가는 시간에 의해 흩어지는 삶에서 죽음을,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추이를 본다. 그 무엇도 시간의 시험을 벗어날 수 없다. 변화는 작은 균열의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작지만 계속 누적되면 걷잡을 수 없는 변화가 야기된다. 그는 변화를 일으키는 간격과 틈을 작품에 심어 놓는다.
3. 다양한 것을 담는 그릇
① 송민정
공식 미술교육의 피해자로, 그리기에 이미 질려있는 송민정은 주변에 넘쳐 나는 여러 미디어로부터 비롯된 이미지를 활용한다. 어디선가 퍼오기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끄는 자료나 자료를 조합하는 방식이 동시대 젊은이들이 이미지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을 촘촘히 감싸는 스펙터클처럼 융합되지 않고 순간적으로 조합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반어법과 풍자, 재미와 충격은 기본이며, 무엇보다 주제가 다양하다. 하나에만 몰두하기 힘든 웹 서핑의 구조가 다양한 작품 스타일에 녹아있다. 짧은 시간에 발표한 바로는 무려 5개의 시리즈가 있다. 첫번째로 <자아-동정> 시리즈는 나는 일관성이 없는데 정의를 내려야하는 현실의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진작업이다. 두번째로 <구애-구애받다> 시리즈는 사랑이 속박이기도 하다는 메시지이다. 세번째 <진여> 시리즈는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생각이다. 작가는 이 종교 저 종교를 마구 섞어 놓고, 얼음으로 만든 불상을 녹이는가하면, 불상을 자르기도 하는 불경한 태도를 보인다. 네 번째는 직접적인 시각 충격 보다는 은유로의 전환을 시도한 작업인데, 성처녀의 눈물을 효험 있는 성수로 판매한다. 마지막으로 [위계질서의 방]은 작품의 모든 요소들이 설치의 형식으로 종합된다. 주체, 사랑과 종교, 위계질서 등 하나같이 중요한 주제들을 놀이의 방식으로 경쾌하게 가로지른다.
② 배윤환
배윤환은 2009년부터 독서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가 독서의 시작 연도까지 기억하고 있음은, 독서가 그냥 독서가 아니라 그의 작업에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통합되는 단계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놀이터 같던 작업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겠다는 생각은 2010년 천안 함 사건 때였다고 밝힌다. 그리고 2011-2012년에 비로소 대중들을 처음 생각하고 자신의 작품이 이해되기를 바랬다. 스스로 이런 정리를 해야 할 만큼, 그의 작업이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올해 발표한 작품에는 블랙이라는 코드로 자신의 작업을 다잡으려 했다. 블랙은 세상의 모든 색이 수렴되는 색이기에, 다채로움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역설적인 색이다. 또한 그의 블랙은 명화 지우기 작업에서 볼 수 있듯 비판적 자의식을 가진 색이고, 고야로부터 영감 받은 <블랙 카프리쵸스>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하는 상징적인 색이다. 빛바랜 책자의 형식을 빌은 <블랙 카프리쵸스> 시리즈는 그의 어떤 작업보다도 내적 밀도가 있다. 보통 시리즈 작업은 한 작가를 반복 각인시켜 브랜드화 하는 대표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지금 그것이 그에게 필요하다. 발생의 단계에 있는 여러 가지를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다양성이란 단지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특성이 될 것이다.
③ 이세준
여러 캔버스들이 이어져 있곤 하는 이세준의 작품은 각 단편들이 따로 또 같이 작동하면서 세계의 복합성을 보여주려 한다. 제한된 형식에 최대한의 내용을 담기 위해 고민한 끝에, 그는 아예 ‘세상이 다의적이다’라는 주제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는 세계는 관찰 행위가 사건 자체를 변화시키고, 자세히 관찰할수록 사건의 불확실성과 우연성은 높아지며, 동시다발적인 사건들이 빈발한다. 전체를 일괄할 수 없는 축제의 장처럼 다가오는 작품들은 원근법 또한 복잡하다.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것은 정해진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단축코스를 제시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전지전능한 지름길이 없다. 반대로 그는 회화라는 한정된 표면에 최대한 많은 길을 접어 넣음으로서 미로를 만든다. 이 미로에서 시간은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게 된다. 최초의 기원과 최후의 목적은 잊혀지고 지금여기를 유쾌하게 연장한다. 지름길에서 간과되는 세계의 다면적 양상을 이 우회로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간적인 형식인 회화는 이러한 방식에 적합하다. 말은 선적 논리를 따라 흐르지만, 회화를 보는 방향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서사의 측면에서 회화의 불확실성을 높이지만, 작품의 내포적 다양성과 외연적 확대를 가능하게 한다. 회화는 하나의 의미로 환원됨 없이 다양한 은유를 구사할 수 있다.
④ 강민숙
강민숙의 영상, 설치 작품은 뿌리 없는 표면을 표류하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중심과 주변과의 관계는 투명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표면을 통해서만 판독할 수밖에 없는 불투명성이 특징적이다. 가령 아래의 공과 위의 사다리가 결합된 작품은 부조리하다. 사다리 위에 공이 있다면 모를까 안정감과는 거리가 먼 그 반대의 결합은 ‘테이블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같은 초현실주의 미학이다. 산모양의 의자도 있다. 작품으로 불려나온 사물은 일상의 맥락을 탈각하는데, 그 위에 수수께끼 같은 조치가 한번 더 취해진다. 이렇게 연극적 무대 위에 배치된 ‘사물’은 ‘예술’과는 달리 밑도 끝도 없는 표면을 표류하면서 무의미, 부조리, 불가지론 같은 비슷한 계열의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동영상 작품들은 불확실한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면서 더 정처 없다. 작품 <empty travel>은 비닐봉지의 여행을 추적한 것인데, 사소한 것이 떠도는 모습이 지루하면서도 서정적이다. 작품 <블랙 코트>는 의자를 덮은 코트가 바람에 흩날린다. 알맹이 없는 표피의 스러짐은 공허와 불안을 자아낸다. 이러한 중심 없는 표류에도 세계를 훑어가는 주체의 시선은 존재한다. 내가 보았다, 내가 느꼈다, 내가 했다는 식의 1인칭 주어의 방식은 대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타자와의 대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기 안의 타자와 말이다. 타자와의 대화는 더 신비롭고 다양한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4. 사회적 소통
① 이예승
이예승의 작품은 허상과 실상의 경계에서 착각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높인다. 가령 달라붙는 옷을 입고 포장하는 동작을 컨테이너에 투영했더니 사실과 다른 선정적 장면이 연출된다. 환영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과의 부딪힘이 일어난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유희로 해소되기보다는, 소통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예기치 못한 반전이 야기하는 충격은 소통 인플레 시대에 진한 소통을 야기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예승에게 소통은 특히 타자와의 소통이다. 그림자를 활용하는 설치작업은 재현의 기원을, 창이 아닌 그림자로 소급시킨다. 그림자는 창과 달리, 타자의 실루엣을 통해 부재하는 실재를 유추하게 한다. 주체와 대면하는 객체라는 투명한 관계가 아니라, 그림자만큼이나 불투명한 관계이다. 불투명성은 소통을 방해하지만, 동시에 방해는 타자와의 더욱 강렬한 만남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예술의 낯설게 하기, 소격효과 등은 그러한 예이다. 이예승에게 타자는 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존재이다. 탈북자, 다문화 가정, 조손가정들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만든 작품은 또 다른 타자인 작가와의 소통을 통해 상호적 치유를 시도한다. 애초에 작가가 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외국에 머물면서 겪은 소통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었다. 작가에게 닥친 고립무원의 경지는 예술의 원초적 역할의 하나에 집중토록 했다.
② 고재욱
고재욱은 작업을 통해 다양한 사회집단과 만난다. 완성된 자신의 작품을 추후에 많이 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과 일종의 협업을 한다. 작업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은 적게나마 참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 신화를 일군 IT 산업들은 대부분 작은 참여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냄을 통해 가능했다. 자신과 무관한 화려한 스펙터클을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이 약간이라도 개입된 것에 대해서는 찾아서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정보소비자를 정보생산자로 호환시키는 기술은 예술도 참고할만하다. 그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be the reds>, <be the blue>, <be the korean> 등의 시리즈를 통해 대중들의 집단 성향을 탐구한 바 있고, 동료 작가 30명에게 1시간씩을 할애해서 인터뷰를 한 작품도 있다. 영화 [스타트랙]의 공간이동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진을 보내서 수신인과 같이 찍어서 되 돌려받은 프로젝트는 여행이나 기념과 많이 관련되는 사진촬영의 특성을 이용한다. 사진은 자신을 대신하여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타인들과 만났다. 120장 중 에서 30장이 돌아왔다. 고재욱이 시작은 했지만, 예기치 못한 결과물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가 곳곳에 편재하는 사진들은 나르시시즘과는 무관하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온전한 창조물을 자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손을 떠나 그가 개입되지 못하는 흥미로운 부분을 포함한다.
③ 웁쓰양
‘얇고 까불고 굴러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름부터 재기발랄한 웁쓰 양의 이력은 다소 특이하다. 이과를 나와 상업 디자인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30살이 넘어서 그림을 시작했다. 그녀의 다양한 이력은 미술계 자체를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놀이하는 바탕이 되었다.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로 말문을 텃다가 나중에는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고3 아들, PC방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아 죽인 커플 등, 웁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충격적인 뉴스에 끌린다. 직접 취재하여 묻힌 사건을 작품으로 끄집어내기도 했다. 작가는 뉴스의 일방적인 소비자가 되지 않고, 뉴스를 텍스트 삼아 개입하고 사실과 진실 사이의 관계를 캐묻는다. 현상적 사실에 숨겨진, 붙잡기 힘든 진실은 게임처럼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파헤쳐 진다. 그녀의 관심을 끈 뉴스는 온 라인 게임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표현했다. 사건의 타이틀이 제목이 되는 작품들에는 ‘글리치’가 발견된다. 그것은 버그, 에러, 래그 등으로도 표현 되는 컴퓨터의 오작동을 말하는 것인데, 바이러스와 달리 자기 화면만 문제가 되는, 약간 불편한 정도의 문제를 일으키는 일종의 잡음이다. 그림은 실제 일어난 사건과 게임의 장면, 그리고 글리치가 결합되어 있다. 웁쓰양의 작품은 제거되어야 할 잡음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잡음은 사실과 진실 사이의 틈을 벌리는 계기가 된다.
④ 김소철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읽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 또한 읽히기를 바란다. 김소철의 작품 <맥아더 동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작가의 사회적 관심이 표현된 작품이다. 맥아더 동상을 부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정치적 논란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상은, 인천에서 태어난 그가 그것이 서 있는 자유공원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자유수호의 정신’이 표현된 그 동상 앞에서는 오늘도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로 넘친다. ‘누구의 어떤 자유인가?’라는 질문은 자유가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자유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피할 수 없다. 기념비는 민족국가가 강화되던 19세기에 많이 건립되었으며, 우리도 군부 정권 시대에 많이 세워졌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퍼트려야 하는 보편적 가치의 증거로서의 기념비는 ‘문명의 기록은 야만의 기록’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에 대한 작가의 사회적 태도가 작품으로 나타날 때는 반(反)기념비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가 어떤 사회의식을 가졌든 간에 현대미술을 하는 한 반기념비성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괴리들로 넘친다. 작품 <노란 색에서 붉은 색으로>, <밝은 색에서 어두운 색으로>는 사적 개인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성격을 띄지만, 공동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닌 작품을 통해 구축된다는 사실로 인해 의도와 결과 사이의 행복한 일치는 보여지지 않는다.
출전; 2012 하반기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아르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