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기획자에 대한 기대와 기획문에 대한 단평

본격적인 비평문이나 논문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획자는 글을 잘 쓸 수 있어야 한다. 미술계 현장에서 평론가와 기획자와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으며, 각각의 전문성이 확보되고 유지될 만큼의 제도화가 미비한 상황에서, 이러한 추세는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평론가가 전시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보다는 기획자가 여러 매체를 통해 평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점에서, 양자의 역학 관계는 바뀌고 있으며, 작가들 또한 기획자의 취향이나 성향, 동향 등, 그들의 눈높이에 더 민감한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애써 전시를 해도 이런저런 이해관계 때문에 제대로 된 비평적 조명을 받기 힘든 상황에서, 조직단계부터 전시의 개념적 체계를 갖추는 일은 단순한 필요조건인 정도가 아니라, 필수 요소라 하겠다. 전시장은 한산해도 미술 관련 사이트들은 북적댄다는 점은 씁쓸하긴 하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도 다가온다. 요즘은 손바닥안의 인터넷 시대이기에 말 못해서 죽은 귀신은 없지만, 미술이란 것이 쉽게 담론화 되기에는 여전히 무겁게 다가오는 현실임은 부인할 수 없다. 

기획 문이 어느 정도의 자족기능을 갖춰야 그 다음 단계의 담론도 가능하다. 아무리 해석이 열려있다 해도 기본적인 방향타는 기획자가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획자는 누구보다도 먼저 작가들과 작품들을 접하고, 왜 이 전시에서 그 작가의 그 작품인지, 그것들이 한데 엮여야 하는지에 대한 최초의 단서를 던져주는 이이기 때문이다. 더 기대를 한다면, 관객들로 하여금 수많은 전시회 중에서도 그 전시회만큼은 꼭 가보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을 만큼의 흡입력이 있으면 좋겠다. 과장광고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많은 이의 참여가 전시를 마무리 짓기 때문이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미술계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 간 기획자들은, 어느 날 낙하산 인사처럼 나타나 ‘미술평론가’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남발하는 이보다는 훨씬 신뢰할만하다. 평론가라는 수상쩍은 직업보다는 기획자에게 훨씬 더 분명한 역할이 기대되며, 미술계 현장은 이미 그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미술계의 보다 많은 수를 차지하는 작가들에게서 나온 ‘민심’이자 자연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기획자의 관점으로 작가와 작품을 보는 것은 이론적 관심사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이론보다 현실이 더 풍요롭다는 것은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다. 또한 어떤 선진적인 이론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체화된 형태로 보여주는 일은 작가와 기획자의 몫이다. 이론과 실제의 관계는 선후의 문제라기보다는 차이의 공존과 대화의 문제이다. 그러나 다양한 차이가 공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미술계는 이도 저도 아닌 비슷한 부류들끼리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낳았을 뿐이지만, 기획이나 비평에 대한 원론적인 역할이 망각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획자의 글쓰기 범위는 간단한 ‘기획의 변’부터 기존의 미술사나 미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야심에 찬 텍스트까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전시는 기존의 비평적, 미학적, 미술사적 용어를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용어나 유파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된 근대에 스스로 역사화를 의식한 미술은 각종 선언문들로부터 유파를 시작하곤 했으며, 작품 생산과 거의 동시에 미술사적 의미 부여를 서두르곤 했다. 물론, 기획에 글쓰기가 포함되고 있으니만큼 그 폐해 또한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거창하고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그룹 전을 보다보면, 관련도 없는 작품들을 모아놓고 기획자의 미학적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으로 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애꿎은 작품들을 마이크 삼아서 자기선전에 열을 올리는 부류들이 종종 있다. 왜 이 작품들이 한데 엮여있는지가 불분명한 경우, 관객들은 작품들 속에서 길을 잃고 기획 글에서 또한번 길을 잃는다. 핵심이 없는 기획 문에 흔히 딸려오는, 작가들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겠다는 ‘다원주의’는 이도저도 아닌 것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다. 

머릿속으로 엮여질 수 있는 작품과 실제로 어울리는 작품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평문이 작품의 의미를 명확히 부각시킬 때, 기획에 있어서 선택은 보다 정확해질 것이다. 비평가와 달리 기획자는 단지 어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의미부여를 넘어서, 선택된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연출될 것인가에 대한 전시 공학적인 연구를 작가와 함께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비평가와 기획자는 큰 변별점을 가진다. 디지털 아카이브에 의해 작가들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공유되고 있는 만큼, 기획자와 대충 인연이 닿는 몇몇 작가들로 전시를 꾸리는 것이 아니라, 기획을 통해 새로이 발견되고, 또는 기존의 작가라도 재 맥락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발견적 가치가 없다면, 전시로서의 가치와 매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는 기본이고, 그것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가 중요하기에, 기획자 또한 창조적 역할이 있다. 가령 어떤 기획으로 5명의 작가를 초대한다면, 기획자의 머릿속에는 관련 작가 20명 이상의 리스트는 있어야 할 것이다. 

단지 인기가 있거나 경쟁력 있는 작가를 뽑는 문제가 아니라, 기획자가 부여한 맥락에 부응하는 작가를 선별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성을 가진 기획자들이 만들어내는 적절한 맥락들은 다양한 작가 군들에게 전시 기회가 돌아갈 수 있게 하고, 차별적 담론을 낳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전시회가 홍수를 이루어도,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아르코 기획자 워크숍에 참여한 7명의 (예비)기획자들의 기획 글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말도 안 되는 비문의 남발, 엉뚱한 인용, 어떤 구체적인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임을 끝내 잊고 마는 추상적인 글 등, 기성 미술계에 만연한 허접한 글쓰기에 비한다면, 소박할 정도였다. 최소한 자기 능력에 비해 과도한 미학적 자의식을 가짐으로서 생기는 폐해는 없었다. 그러나 소박함에도 함정은 있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오류는, 개인전 기획문의 경우 해당 작가의 말에 너무 의존한다는 점이다. 

김사랑이 작가 강준영에 대해 쓴 글 [모든 사랑은 집으로부터 나온다]가 그러했다.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짧은 평문에서 작가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방식은 비평이 개인의 경험을 표현한다는 소박한 전제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한 텍스트는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용과 형식과의 매개고리가 될 분석적 내용이 부족할 수 있다. 김태현이 쓴 오제성 작가에 대한 평문 역시  ‘--했다고 한다’는 말로 마무리되는 문장이 많이 발견된다. 작가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등 자전적 이야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통섭에 관심이 많은 작가이니만큼, 각 관심사만 따라가도 힘에 부칠 수 있다. 자전적 이야기는 작품 이해를 위한 한 계기에 불과하다. 작품은 단순히 어떤 인생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련은 있지만 그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작품을 낳게 한 원인과 의도, 그리고 작품의 형식 및 그 형식이 실제로 말해주고 있는 메시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필자는 오히려 그 모순과 역설의 지점부터 생산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오만, 또는 무능력 때문에 작가의 의도나 구체적인 작품의 상황을 깡그리 무시하는 텍스트도 문제지만, 드러난 현상만을 따라가려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작가의 말이나 의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많을 때, 기획자는 작가의 대변인 역할에 한정하는 것이다. 기획자는 작가의 대변인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대변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재현주의 미학만큼이나 구태의연한 가정이다. 대체로 미술가에게 말이나 글은 그 작품에 상응하기 보다는 작업, 또는 작품에 대한 희망사항이자 계획, 때로는 당위이다. 작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의도와 결과의 괴리가 더 흥미로운 작품을 낳을 수도 있다. 작가의 말이 정말 하나하나 놓칠 수 없을 만큼 핵심적이라면, 작가노트의 형태 등으로 직접 인용해 주는 편이 더 낫다. 필자와 작가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제 3의 독자가 대화에 끼어들 때, 이 3자간 대화에서 작가노트는 상호작용할 수 있는 항목이 되어 줄 수 있다. 

정재이의 이해민선 작가론 [죽어있는 현재, 살아있는 과거]는 죽은 화분이 많이 있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필자의 관심을 끈 이해민선의 작품 <직립식물>에 대한 묘사 및 설명을 시도한다. 분석 주체로부터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공감의 수사학이 설득력이 있다. 그룹전 기획의 경우 과학과 예술, 소수자, 시각성의 문제, 공공영역 같은 동시대 화두를 두루 다루고 있다. 주미영의 [cell and cellsssss]전의 서문은 ‘자연계를 포함한 모든 시스템의 근원으로서의 cell이 cellsssss 로 확장’되는 과정을 다룬다. 단순히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미시세계로부터 거시세계,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는 복합적 층위를 현대미술의 언어에서 찾아보려는 전시이다. 평문은 전시의 의미와 작가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보도 자료를 접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포맷이다. 다소 낯선 작가가 포함되어 있기에 작가 소개에 따로 지면을 할애한 것은 적절하다. 

배수현의 [창조적 일탈자-다양한 창조적 존재와의 수평적 공존] 전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통해 ‘창조적 차이’를 찾아보고자 한다. 들뢰즈의 다수파와 소수파의 구별을 인용하면서 ‘창조적 일탈자’의 예가 될 만한 작가군들을 소개한다.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다는 들뢰즈의 논의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힘을 준다. 오늘날 그 누구보다도 소수자인 이들이 바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넘어서, 소수자로서의 절실한 체험이 포함되어 있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서희연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전은 방학 때가 되면 우르르 열리기 시작하는 교육적 성격의 전시제목 같지만, 필자가 좋아 하는 인디밴드의 노래에서 온 제목이다. 가벼워 보이는 전시 제목과 달리, 이 전시가 다룰 시각성의 문제는 가볍지 않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된다. 필자는 그 문제에 대해 독자 및 관객에게 다소 간 길게 설득한다. 조형예술이 의존하는 주된 감각인 시각은 명료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그렇지 않다. 시각성에 얽힌 주제는 그 폭과 깊이가 천차만별이다. 

평문에서는 참여 작가들 간에 이 문제가 어떻게 특화되어 나타나는가를 부각시켜야 한다. 사실 시각성의 문제는 미술사 전체의 문제라 할 만큼 광범위하다. 가령 시각성/촉각성의 대립에서 페미니즘의 논의를 이끌어낸 예처럼, 단순한 시각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어떤 줄기를 잡아당길 것인가가 핵심적이다. 박은지의 [수작부리다] 전은 ‘남의 말이나 행동, 계획을 낮잡아 이르는 말’과 ‘뛰어난 작품’을 뜻하는 동음이의어인 수작이라는 전시명을 통해 소박하고 어눌한 형식을 구사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들을 모아서, 일상의 도시공간을 새롭게 환기시켜 보려한다. ‘자기 소외를 통한 저항’은 작가를 소외시키는 사회에 대고 큰 목소리를 내는 일에 소심한 이들 또한 두루 포함할 수 있게 한다. 전시 장소는 미술관과 그 일대의 일상공간을 포함한다. 그러나 반(反) 기념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 화이트 큐브가 아닌 일상공간에서 어떻게 관객의 눈에 띄게 할지에 대한 전시 공학적 고민이 추가되지 않으면 반쪽짜리 전시가 될 위험이 있다. 

출전; 2012 아르코 기획자 워크숍(인사미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