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스트독갤러리의 연례 프로젝트 ‘The Flag Station’, 그 두 번째 전시에 참여한 구현모, 허구영, 홍명섭의 ‘Committal Dimensions’ 전의 작품들은 개념적 성향을 가졌지만(또는 개념주의 작가라고 분류되곤 하지만), 그들의 작품 속에 내장된 개념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지 않다. 매장, 공약의 의미도 있는 단어 ‘Committal’로 말을 지어내자면, 그들은 서로 모여서 어떤 한 개념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공약을 묻어버린다. 개념을 없애버린다거나 처음부터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품에 묻어버린다. 개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앞 선 표어가 아니라, 맨 나중에 올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코드들이 겹겹으로 떠다니는 시대, 작품으로 육화된 개념, 육안으로 본 현실과 육성만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대개 본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질(인간의 본질, 역사의 본질, 회화의 본질....)이 너무 많이 논구되고 언급되어, 더 이상 본질이 본질로 다가오지 않는다. 단지 본질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설파해야 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 또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된다. 

그러나 예술은 개념이 추구하는 바의 그 ‘본질’ 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으며 생동감 있는 게임이다. 작업이란 머리를 쥐어 짜내는 논리적 끝말잇기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놀고 싶은 유혹을 발산하는 독특한 게임의 창안이다. 물론 이 게임은 보편화되어 사회적 규칙이나 시대의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시작할 뿐, 그 열매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 규칙을 스스로 공표하지 않는다. 더듬거리며 나아갈 뿐인 부드러운 덩굴 손 같은 예술의 첨단은 견고한 조직화와는 거리가 멀다. 개념이란 무덤의 묘비처럼,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에나 정의될 수 있다. 하던 일 멈추고 자기 정의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행위는 작업이 잘 안 되고 있음, 또는 할 수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기반성조차도 아닌, 지배적 체계에 각을 맞추려는 순응과 타협의 몸짓이라면 더욱 씁쓸해진다. 예술은 어떻게 시작 된지 모를 어떤 것을 열심히 작동시킬 뿐이다. 왜 그것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었는가는 작품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것이 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애써 작업이란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현대예술은 재현이 아니다. 개념화를 위해 멈춘 순간이 아니라, 끝없이 작동 중인 것에 진짜 개념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이 전시의 세 작가의 작품은 매우 다르다. 억지로 공통점을 찾기 보다는 차이를 통한 연결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 이 셋을 기하학적 패턴과 비교하고 싶다. 유리컵을 대나무 모양으로 줄줄이 연결시킨 허구영의 작품이 선적이라면, 거대한 스테인레스 봉을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한 홍명섭의 작품은 둥글게 굽어있다. 일상의 한 모퉁이나 바람 타는 나무의 어지러운 궤적을 따라가게 하는 구현모의 작품은 흩어져 있다. 선의 끝과 끝이 만나면 원이 되고, 그것을 구기면 카오스 패턴이 된다. 그러나 공통점도 느껴진다. 허구영의 작품에서 성장을 추동하는 선적 흐름 사이에 끼어있는 재, 영원회귀나 윤회를 생각하게 하는 홍명섭의 원, 일상의 시공간을 늘려 놓거나 섞어 놓고 고독한 유폐의 공간을 연출한 구현모의 작품에서 죽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삶 한가운데 자리 잡은 죽음이다. 바타이유의 말처럼 죽지 않은 채 삶의 끝자락을 체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예술이다. 가장 강렬하고 고양된 삶을 살아가는 작가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 항은 작품 속에서 하나가 된다. 

허구영의 작품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는 제목부터 묵시록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스타일은 묵직하기보다는 경쾌하다. 여러 종류의 투명 유리컵이 전시장의 하얀 벽에 기댄 채 종류별로 열을 짓고 마디를 이루며, 대나무나 수초처럼 자라난다. 컵이라는 단위구조 외에 결절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컵 안에 조금씩 들어있는 재이다. 학위논문을 태운 재라고 한다. 재의 실체는 이론과 작업간의 긴장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학위논문은 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학위논문에 그가 어떤 의미와 감정의 무게를 실었든 간에, 작업할 시간을 갉아 먹으며 골치 아프게 생산되었을 그 과제물은 블랙 유모어의 형식으로나마 작품에 기여한다. 켜켜이 쌓인 컵들은 그렇게 마신 술 또한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나마 작업의 뮤즈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다른 쪽 벽에는 시험관을 사선으로 배열하고 재 이외에 물도 넣었다. 녹지 않는 재는 떠있거나 가라앉아 이물감이 있다. 

맥주 컵이나 소주 컵과 달리 시험관은 보다 중성적인 용기로 다가온다. 그것은 줄지어 연결된 모습이 아니라, 각자 존재하며 중력과 무관하게 붕 떠 있는 모습이다. 내용물 역시 다른 컵들처럼 용기의 형태나 중력과 어우러져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형태이다. 시험관 속의 물에 떠 있거나 침전된 재는 말 그대로 실험 예술처럼 보인다. 실험은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묵직한 실재를 괄호치고 형식적 요소 간의 조합에 치중한다. 실험은 그 개념이 무거울 뿐, 생산물, 더 정확히는 표본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한편 작가는 전시장 입구와 2층 계단 입구에 재를 묻힌 감자더미들을 쌓아 정물처럼 보이게 했다. 투명한 용기 안의 재는 마치 종이 위에 잉크로 쓰여 진 기호처럼 보이는데, 전시장 이곳저곳에 세 그룹으로 나뉘어 배치된 허구영의 작품은 의사소통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으로부터 노동을 통해 생산된 대상인 감자를 감싸는 재는 상징적 유사물에 해당된다. 

그것은 한 무더기의 감자를 그린 정물화와 닮아있는 유비의 형식이다. 일련의 단위구조가 선형적으로 조합된 투명한 컵들은 기호의 단계이다. 기호는 지시대상을 자못 투명하게 반영하며, 고전적인 언어학이 전제하듯, 기호와 대상은 아직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시대상을 투명하게 반영, 지시하는 재현의 언어, 선형적인 언어이다. 그것들의 궤적은 명료하고 예측가능하다. 한편 사선으로 붙여진 시험관들과 그 안에서 물 때문에 지저분하게 엉겨 붙은 재들은 더 이상 대상이나 의미를 투명하게 비추지 못한다. 내용물이 쏟아져 내릴 듯 어슷하게 기울어져 있는 불안한 양식은 현대 언어학의 가설처럼 대상/기호(기의/기표)간의 임의적 관계를 예시한다. 허구영의 작품은 미술의 역사와도 무관할 수 없는 소통의 전사를 재치 있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 역사가 해피엔딩을 향하는 진보는 아니다. 마디마디에 맺혀있는 재는 그 단선적 흐름에 내재된 잔인한 진실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홍명섭은 스테인레스 봉으로 만든 거대한 둥근 원을 설치했는데, 그는 여기에 <만질 수 있는>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였다. 천정이 높은 전시장의 끝과 끝을 잇는 듯한 큰 규모를 가지며, 바닥에 살짝 닿아 관객이 만지면, 금속 원의 장력에 따라 미동이 발생한다. 워낙 크기 때문에 원은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으며, 관객은 건축적 스케일을 가진 구조물의 그 안팎을 드나들 수 있다. 원은 텅 빈 중심이 아니라, 더듬어 감지할 수 있는 외곽들을 일깨운다. 거대한 원은 주관에 대응하는 객관적 대상으로 저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과 공간을 의식하게 한다. 미술관에 흔히 있는 ‘눈으로만 보시오!’라는 경고는 간데없고, 그의 작품 제목은 만져보기를 은근히 독려하는 듯하다. 이 원은 자아, 하늘, 신성, 완전성, 무한 등등을 상징하는 형이상학적인 원,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있을 법한 실재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적 도형이 아니다. 

그런 개념들까지 포함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의 원은 천사의 머리 위나 성인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정신적인 원이기 보다는, 우리의 몸과 함께 운동하는 훌라우프나 굴렁쇠 같은 원, 또는 메아리나 수면 위의 파장에서 보여 지는 원, 요컨대 끝없이 움직이며 육화된 원과 더욱 가깝다. 실제 공간을 초월하지 않는 이 원은 관념적인 환영을 물리친다. 관념적 소유의 기미가 보이면 그의 작품은 빛의 속도로 미끄러져 간다. 그의 원이 굳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시각적 관념이 아니라 몸과 엮이는 공간이다.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가지는 점의 집합 같은, 원에 대한 기하학적인 정의가 있을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투명한 관계에 의거한 원에 대한 이러한 공리적 정의는, 홍명섭의 작품에서 실제 공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규모로 인해 불투명해진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만져볼 수 있을 따름인 그 작품은 고전적 조각에 전제된, 전체와 부분간의 유기적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 조각의 흐름을, 기하학적으로 고안된 공간의 구성에서, 인간의 지각에 의존하는 불투명성과 실제 시간 속에서의 지속의 경험으로 간파했듯이 말이다. 이에 따르면 현대조각은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의 몸은 만물의 척도가 되는, 신인동성동형론적이고 기념비적인 기둥이 아니라, 어떠한 분명한 좌표도 없이 마주한 공간을 통과하는 시간적 흐름으로서의 몸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한순간에 작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각을 요구한다. 현상학 역시 현대조각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의미가 아닌, 경험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인식의 대상이기보다는 공존, 또는 교류의 장이다. 주관과 객관은 서로를 향해 개방된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이, ‘세계에 대한 신체의, 그리고 신체에 대한 세계의 이러한 상호적 움켜쥠’이 바로 지각의 기반이 된다. 

전시장 입구를 막아선 듯 세워진 구현모의 <농 집>은 어릴 때 숨어들던 그 작은 구석을 떠오르게 한다. 1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집, 또는 방은 한 사람이 들어가 앉으면 꽉 찬 느낌을 주는, 작가 말로 ‘모태 공간’과 비슷한 규모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에 놓여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용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이 내밀한 집(방)은 그동안 여러 주인을 바꾸어가며 전전해 왔다. 끝없이 바깥으로 내둘려 진 그것은 요즘 말로 유목을 했다. 은폐, 또는 방랑을 대놓고 드러낸,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에 잠시 멈추어져 있는 이 공간은 안이면서 바깥이다. 그는 주어온 문으로부터 공간을 짜기 시작했다. 그것은 갇힘이나 들어앉음 보다는 들고나는 공간이며, 작은 유리창으로 비치는 태양빛이 안과 밖을 연결한다. 예술 또한 주변과 구별되는 내밀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합리적 개인주의가 전제하는, 소유에 기반 하는 사적 공간은 아니다. 고립을 통한 연결은 예술의 역설적 특징이다. 이러한 이상한 연결은 불안과 희열을 동시에 준다. 

그의 작품에 내재한 양가감정은 2층의 영상작품들에서도 두드러진다.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 영상이 느리게 돌아가다가 중간에 늘어진 배경 음악이 끼어듦으로서, 작품은 환상성과 괴기스러움 사이에서 요동친다. 나무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듯하다가, 자신을 이리저리 휘젓는 거센 힘에 몸살을 앓고, 때로 신이 내린 무당 같이 전율한다. 속도의 변환은 우주의 춤으로부터 히스테릭한 몸짓까지 다양한 계열로 변주된다. 이 몽환적이고 괴기스런 풍경에서 그가 끼어든 부분은 속도 조절 밖에 없다. 조물주가 지구의 자전축을 건드림으로서 각 지역의 기후가 달라진 것과 같은 효과이다. 구현모는 일상과 자연의 리듬을 재배치함으로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어떤 이질적 요소를 드러낸다. 관성에 따라 살아가기 마련인 상식적 인간은 조그만 질서감각의 교란에도 저항하게 되는데, 그가 쾌재를 부르며 발견했을 법한 이질적 요소를 지렛대처럼 활용하여 현실을 극적으로 변모시킨다. 

전적으로 다르다기 보다는, 늘 있어왔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시각적 무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일상은 기이한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구석의 또 하나의 영상 작품 <골목>은 카페에서 쳐다본 골목 풍경에 작은 거울하나를 개입시킴으로서, 일상의 규칙에 따라 잘 돌아가고 있었던 세계를 산산이 분열시킨다. 비디오 앞의 거울은 서로 반사하는 4개의 면을 한 화면에 동시에 배열한다. 실시간으로 편집되는 현실의 장면은 화면 안에 보이는 유리문이나 지나가는 차들의 반사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속도와 각도를 약간 건드려 줌으로서 평화로운, 또는 지루한 현실은 다차원적으로 접혀진 주름을 펼쳐 보인다. 연속성은 단절되고, 단절되어 있던 것은 이어진다. 삶의 한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는 자연과 일상은 생경한 얼굴로 드러나며, 관객의 혼란은 열락으로 또는 그 반대로 계속 이동한다. 그의 작품은 질서와 무질서가 카오스모스로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다.

출전; 쿤스트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