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x110cm 크기로 일괄 인화된 유목연의 <project 4_사랑은 지고 달빛은 빛나고> 시리즈는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의 규칙이 자못 공고한 듯 적용되는 세상에서, 그가 길어올린 불확실한 미의 편린들이다. 작품에서는 세상과 예술 사이의 자리 바꾸기가 일어난다. 세상은 맥락이 불확실한 단편으로 고립되고, 예술은 죽음에 가까운 흩어짐을 엮어낸다. 자연스러운 시야와 거리가 있는 정사각형 틀은 자연이나 삶의 불확실함을 예술의 확실함으로 변형시키는 마술적 장치이다. 일률적인 크기 외에는 어떤 규칙도 없는 단편들은 훅하는 입김에도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 같은 취약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덧없는 것들을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해 작은 기념비로 고양시킨다. 색까지 흐릿해서 전체적으로 힘이 많이 빠져 있는 그의 사진은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반복적 각인에 몰두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려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유목연의 작품은 어떤 특정한 소재나 주제 대신에 아릿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그는 ‘나를 둘러싼 따뜻한 공기와 자유에 대한 아름다운 느낌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너무나 섬세해서 잡아내기 힘든 그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며, 자신의 작품을 ‘정복된 가벼움’이라고 말한다. 가벼움은 정복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적 비전은 소박한 듯 하면서도 야심차다. <project 4>시리즈 중, 빛을 가득 받는 사슴의 뒤태나 높은 나무 숲 한가운데 앉아있는 새 한 쌍은 지상에 잠시 머물다 갈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는다. 자연, 또는 도시 풍경은 짙은 운무나 눈에 쌓인 듯 흐릿하고, 찢어진 꽃무늬 벽지가 붙은 방의 더러운 벽은 지나치게 선명하다. 풍경과 인물이 뿌옇든 선명하든 둘 다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의 환상성은 어떤 뚜렷한 의도아래 이루어진 변형이나 왜곡이 아니다. 의미로 가득한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온통 세계를 뜨거운 역사의 무대로 간주하는 거시적 시점이 아니라, 차가운 일상이 흘러가는 미시적 시점이 있다. 차갑다 함은 그가 세상으로부터 길어 올린 단편이 단지 썰렁한 일상을 표현한다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의미와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한 단면임을 거부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서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사는 그가 두서없이 찍은 듯한 사진들을 손 가는대로 조합함으로서 만들어진다. 그는 사진 수백 장을 깔아놓고, 그 중 10-20장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조차도 결합이 아닌, 집합일 뿐이다. 이미지 크기를 달리하기 때문에, 매번 다르게 구조화될 이야기의 방점을 다르게 찍힐 수 있다. 책자나 퍼즐 같은 형식의 가변적인 배치방식은 이야기를 열어놓는다. 단편 자체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며, 조합하는 방식 또한 열려있다. 세상을 가볍게 소요하듯이 떠도는 그의 발목을 잡는 모든 묵직한 요소들을 경감된다. 

사진은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단도직입적으로 감성을 공략한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사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다고 말한다. 다큐멘타리가 참조대상과 연결된 실재성을 가진다면, 사적(史的)이 아닌 사적(私的)이라는 접두어는 꿈과 무의식, 상상 같은 허구 또한 포함한다. 얇은 베일이 쳐있는 듯한 비현실적 색감은 환상과 신비를 고무한다. 그렇다고 그의 사진이 몽타주나 포토 샵 같은 인위적 장치를 적극 구사하며 인위적 환타지의 연출에 골몰하는 것은 아니다. 유목연의 작품은 마치 꿈결같이 펼쳐지지만, 그것은 ‘우리를 잠재우려 하지 않고 깨우려 한다’(마그리트) 그는 그림에 가까운 사진을 찍지만, 철저히 카메라의 원초적 두 속성, 즉 셔터와 조리개만을 조절할 뿐이다. 세상과 그 사이에 카메라가 있지만, 카메라는 세상을 투명하게 보는 창도 아니고, 사진적 장치나 형식들을 낯설게 부각시키는 것도 아니며, 온통 주관적인 시선에 물들어 있지도 않다. 

유목연의 ‘사적 다큐멘타리’에는 표 나지 않은 미미한 사건들에 대한 단서가 있지만, 그것은  선조적으로 흐르는 사건의  단면은 아니다. 블랑쇼가 말했듯이, 일어났던 것(역사)은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으며, 게다가 부차적인 일로,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까지 여겨진다. 유목연의 작품에도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았으면서 정말로 행해진 사건들이 있다. 사건은 결정적이고 확고한 방식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유령 같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 것이다. 일상의 견고한 지지 기반이나 맥락이 제거된 그의 작품은 사진에 기대될 법한 리얼리즘의 모델을 느슨하게 한다. 풍경의 표면 아래에는 심층이 없고, 인물의 피부 아래에는 내면이 없다. 하나의 사진 뿐 아니라, 사진들 간의 인과관계 역시 모호하다. 촘촘한 그리드로 구획된 세상의 질서를 죄는 조임 쇠는 수직적, 수평적 양차원에서 스르르 풀려진다. 사진기의 프레임만이 이 느슨해진 세계를 한정짓는다.

그의 작품은 표면과 심층 간에, A와 B 사이에 어떤 필연성을 만들어내야 할 이원구조의 쇠창살에서 자유롭다. 세상을 지배하는 속도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천천히 관찰하면, 관념적인 좌표축으로 고정된 대상들은 불확실한 과정으로 흩어진다. 짜여 진 의미의 골조는 몽상처럼 느릿하지만 그것은 모순이나 결핍이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력에 의해 채워질 풍부한 잠재성으로 다가온다. 사진의 촬영이나 배열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칙만을 적용하는 유목연의 방식은 재현된 현실에서 보편적인 동의를 강요하지 않으며, 세계의 우연성과 불확실성에 제 몫을 찾아준다. 얇게 든 잠 속의 꿈같은, 시적인 그의 사적 다큐멘타리는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1인칭 현재의 이야기이다. 현대 소설가 알랭 로브그리예에 의하면, 그것은 3인칭의 역사적 과거로 작성된 사실주의적인 연속성과 선적인 플롯, 즉 불확실한 지역도 의미의 미결정도  해답 없는 질문도 남기지 않는 것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로브그리예는 전지적 시점에 전제된 사실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결정적이고 육중하며 일의적인 폐쇄성으로 닫히는 가운데 완성되어서, 세계가 의미를 완전히 투과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탄생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스스로 폐쇄되어서 어디라도 빈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유목연의 작품에서 선조적이고 논리적인 시간을 단절시키는 빈 공간과 우연의 장들은 타자에 의해 채워짐으로서 충만해진다. 총괄적 체계 속에 세계를 가두어 두려는 욕망은 좌절된다. 강력한 모든 체계의 영토 확장주의를 참을 수 없어 했던 롤랑 바르트 역시, 지나치게 일관성을 갖는 진리를 말하는 어떤 사고, 그것은 마치 끓는 기름과도 같다고 비유한다. 거기에다가는 무엇을 집어넣어도 나오는 것은 항상 튀김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목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빈 공간들은, 타락한 이성에 의해 폐쇄되어 있는 차가운 추상의 세계를, 모든 가능성을 향하여 열려진 공간으로 살아 숨 쉬게 한다.   

출전; 아티스트 큐레이터 1;1 토크 프로그램(브레인 팩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