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귀원은 합성사진, 또는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만들어 상품물신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를 풍자한다. F.R.P에 우레탄으로 도장된 인간상들은 총천연색의 환상이자 현실이다. 편재하는 현실 속에서 찾아진 환상은 3차원 상에 우뚝 서 있다. 그는 돈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야만의 시대’(전시부제)로 간주한다. 하나의 가치로 환원이 일어나는 현대사회는 사실과 환상을 어느 때보다도 근접하게 한다. 유행하는 옷을 차려입은 청소년의 머리통이 에이리언이고, 여성 직장인 머리에 SM 하위문화의 성적코드가 이식되어 있는 모습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학생은 미래의 직업을 위해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 대표적 집단이며, 직장인은 그 결과를 나타내지만, 양자는 그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그 밋밋한 노동 형태로 인해 자극적인 소비문화를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노동과 여가에서의 동시적인, 현대사회에 만연한 이중의 소외이다.
그의 작품은 웬만한 것은 충격으로도 다가오지 않는, 엽기문화에 길들여 있는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생산된 조각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 작업이 재미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고, 그 기준은 재미있는 이미지들이 업데이트 되어 있는 인터넷 사이트 등에 퍼날라서 ‘리플’도 받고 싶다는 천진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그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예술과 문화 사이에서,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젊은 작가들은 재미와 흥행이 있는 양지쪽으로의 지향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작품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정은 둘째치고라도, 추운 곳에서 홀로 흙을 주무르고 독한 화학물질과 함께 일일이 수공으로 작업해야 하는 생산의 과정과, 아늑한 장소에서 손가락으로 버튼이나 자판만 두들기면 되는 소비문화의 차이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코드는 가볍고 빠르며, 작업은 무겁고 느리다. 작업, 특히 조각은 결국 묵직한 현실계에 속해있다.
여기에 작가들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현실과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기회 또 한 가질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것도 미미한 상호작용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생산물을 통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예술의 진정한 야망이 있다. 진귀원이 대중문화의 코드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부분은 예술이 해야 하는 긍정적 항목 중의 하나를 수행한다. 아방가르드 시대와 달리,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싶지만,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물신적 체계의 가장 큰 희생자 중의 하나가 예술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 비판은 현대미술의 자기비판의 과정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지배적 동질성에 대항하는 차이를 추구함과 동시에,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이상적 사회를 예견한다. 비판이 없으면 야만은 지속된다. 야만이 확대 재생산 될 수 있는 시스템 역시 역대 최강이다. 작가는 대중들이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에서 참조한 보편적 코드를 활용하여 지금여기의 삶을 지배하는 어두운 규칙을 폭로한다.
특히 그가 모든 것이 상품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곤 하는, 나름대로 질서 바른 사회를 문명이 아닌 야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어떤 기준이든 그것이 유일한 것이 되었다면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각 사회가 하나의 현실원칙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않았다. 서로 다른 영역이 공통의 문법으로 서로 엮이는 과정은 세계화, 보다 정확히는 세계 시장화의 예에서 보듯이, 보다 많은 다수의 패배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전시장은 진귀원이 조각을 통해 그리는 야만의 시대의 풍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대중에게 혐오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공공미술과를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공공성은 무난한 장식품이 아니라, 바람직한 공공적 삶과 대치되는, 극복해야할 요소에 맞춰져 있다.
전시는 여자의 일생이라는 서사를 가진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무너짐은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인다. 마치 18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드의 작품 <---의 일대기> 같은 풍자적 교훈극의 구조이다. 서사는 관객의 동선과 일치한다. 관객이 처음 보는 것은 <라코스테걸>(2009)이다. 그녀가 착용한 유행하는 옷, 신발, 헤어스타일이 한눈에 파악되고, 그녀의 불안한 표정이 앞으로의 상황을 예감케 한다. 갖가지 상품에 둘러싸인 젊고 예쁜 여자는 소비문화의 모순을 관통시킬 수 있는 적절한 캐릭터로 선정되었다. 그 다음 보게 되는 <루저>(2012)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를 입고 있지만, 빈약한 몸을 가진 청소년의 모습이다. 끝없는 목마름을 야기하는 소비사회의 구조에서 루저는 결코 예외적 소수가 아니다. 풍요의 사회는 역설적으로 루저를 항시적으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갖기도 전에 빼앗긴다. 루저의 에이리언 머리는 유행하는 옷을 갖고 싶어 범죄도 불사하는 세대의 공격본능을 보여준다.
모든 캐릭터에 심어놓은 다소간 공격적으로 보이는 이빨은 작가의 이빨을 떠서 만든 것으로, 그 또한 이러한 문화에서 초월적일 수 없음을 드러낸다. 세 번째 <어반 아나콘다>(2009)는 도시 뒷골목에서 거대한 뱀이 어린 여학생을 머리부터 통째로 삼킨다. 그것은 경쟁과 전쟁으로 인해 상시적인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를 감싸는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다. 사람은 먹잇감으로 쓰러져 있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상품의 로고들은 선명하다. 그것은 외부의 위협일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먹혀버린 내부의 위협을 상징한다. 네 번째 <인터뷰>(2010)는 무직자에게 지옥인 세상에서,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면접관 앞의 대기자들이다. 선택과 심판을 받는 나란히 앉은 5명의 여성은 몸매와 자세, 의상이 모두 ‘용모 단정한’ 여성 직장인에 맞춰 똑같이 생겼지만, 그들의 상상은 각각 다르다. 바늘로 감싸인 검은 마스크 같은 변태적인 기구를 착용한 여자, 눈까지 입으로 대체된 채 비명을 지르는 여자, 긴 머리를 날리며 자기만의 깊은 세계에 빠져있는 여자 등 다양하다.
그러나 면접관은 그들의 머릿속까지 인터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트랩트>(2011)는 애도 어른도 아니지만 집중적인 마케팅의 대상인 세대의 발목을 잡는 사회의 덫들이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긴급체포>(2012)는 종종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명품 백을 사기 위해 공금을 횡령하는 여직원의 범죄를 표현했다. 이야기의 기본 줄기에는 끝없는 상품 소비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 주인공을 괴물로 만들고 곤궁에 빠트리며, 끝내 자멸하게 한다. 벽에 못으로 걸은 수십 개의 색색의 마스크 작업 <맹목적 의지>(2012)는 현대인을 추동하는 욕망들을 상징한다. 눈자리에도 입이 박혀 있는 그것들은 맹목(盲目)적 괴물이다. 다양한 복면과 얼굴 표정은 실체는 없이 껍데기만 있다. 눈이 입인 얼굴은 입이라는 욕망의 상징이 눈까지 잠식하는 사태이다. 그는 생생한 육체의 언어를 활용하여 눈=입=욕망이라는 등식을 표현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특히 언어라는 상징적 구조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그 주체를 만든다. 지배 질서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는 상징적 구조는 개인의 욕망 또한 만든다. 기호, 특히 상품기호들의 우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은 계속 타올라야 할 욕망의 대상을 수집하는 대표적 감각기관이다. 보는 인간은 보여 짐 또한 인식하는데, 진귀원의 작품은 이러한 시선(eye)과 응시(gaze)의 역학 관계 속에서, 상품의 기호가 결정적임을 보여준다. 상표는 사회적 인간이 상대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코드가 된다. 보고 말하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인간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감는 유명 상표들은 욕망하는 인간이 만나는 실재가 상품 세계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욕망은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고 뻗어나가야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상품의 생산과 소비라는 유일한 회로로 빨려 들어간다. 사회는 욕망의 회로와 상품의 유통구조를 일치시키려 한다.
체계는 규정될 수 없는 욕망을 코드화 시켜 값을 매기고 유통시킨다. 코드는 등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유도하는 결과는 철저한 불평등이다. 자연, 몸, 무의식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까지 값을 매갤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은 값을 중심으로 서열화 되기 때문이다. 가격 매기기는 마치 수학공식처럼 중성적인 행위인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서열화를 낳기 때문에 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생겨난다. 현대의 야만은 이러한 맹목적인 경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전시에서 문명화 과정은 야만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시킨다. 현대의 야만은 더 많은 약자를 만들어내는 억압적 체계에 의해 생산된다. 야만은 주먹이나 총칼이 아니라 법과 시장을 통해, 그것이 파생시키는 이데올로기와 허위의식, 도그마와 상식 등을 통해 행해진다. 야만은 퇴행을 의미하지만, 사실 투명한 이해관계에 근거할 법한 법규들의 등장은 역사의 진보에 의해 나타났다.
앨버트 허쉬먼은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열정이 인간을 사악해지도록 부추키지만, 이해관계에 얽매어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고전적 자본주의에 의해 부각된 이해관계와 사라져가는 열정을 대비한다. 허쉬먼은 인간의 이해관계를 열정에 대립시키고, 인간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야기되는 긍정적인 효과와 열정에 휘말리게 될 때 생기는 재난의 상태를 대비한다.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 학자들은 인간 행위에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비인간적이고 냉정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이해관계는 이성만큼이나 투명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열정과 이해관계]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충동과 어떤 성향들을 억누르고, 좀 더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일차원적인 인간성을 만들어 내리라고 기대하였다.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들리는 이런 입장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상존하던 분명한 위험을 걱정하고, 인간 열정의 파괴적인 힘을 걱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전의 모든 사악하고 파괴적인 악덕들은 합리적 이해관계가 아닌 비합리적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 일시적인 열정이나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합리적인 의지’나 ‘합리적인 이기심’이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도덕적 덕목으로 꼽혔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공사의 영역에 있어 인간사를 처리하는데 보다 이성적인 방법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다. 이해관계가 인간행위의 지배적 동기라는 생각은 가능한 사회질서를 위한 현실적 기초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지적 흥분을 야기 했다.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예측성이다. 반면 대부분의 열정적 행위는 변덕스럽다는 점이 강조된다. 불확실성, 특히 인간의 가변성은 없애야 할 주요 난관이 되었다. 인간은 이해관계에 충실할 때 확고부동하고 질서정연해지며 이는 열정에 휘말렸을 때와 정반대이다. 열정은 광폭하고 위험하지만,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고 무해하다는 것이다. 상인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귀족계급의 열정적 유희와 방종, 또는 군대나 해적의 야만적 약탈보다는 부드럽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적 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의 파괴적이고 불길한 요소를 억누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업은 곧 또 다른 전쟁, 그것도 항시적인 전쟁이 되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무해하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완전히 드러난 이후에야 사라지게 되었다. 진귀원의 작품에서 파국적 상황 속의 다국적 기업의 로고는,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이해관계가 왜곡된 방식으로 파괴적 본능을 다시금 불러냄을 알려준다. 맹목적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만큼이나 계산하는 기계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협소하게 이해된 이해관계는 다시금 인간적 열정을 관철하는데 숙고해야할 이성적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며 작업하는 이들 또한 열정과 이해관계 간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진기원은 그가 풍자극의 무대 위에 불러낸 캐릭터들에 모두 자신의 이빨을 이식시켰는데, 그것은 비판이 스스로에게도 겨누어짐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