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리 힐 작가가 5살짜리 아들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미소를 짓고 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2019년 11월 26일부터 게리 힐의 개인전 《게리 힐: 찰나의 흔적 Gary Hill: Momentombs》를 개최한다. 게리 힐은 미국 출신 작가로, 초기에는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70년대 초부터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영상,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비디오 아트로 전향하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열린 상태로서의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테크놀로지, 가상과 실재공간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2019년까지의 그의 주요 작품 24점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 제목 'Momentombs'는 Moment(찰나), Momentum(가속도), Tomb(무덤) 3가지 단어의 합성어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를 은유적으로 포괄한다. 이는 찰나에 소멸된 이미지와 언어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덤과 같은 가상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고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닌 열린 해석이 가능한 언어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 기획 의도를 설명 중인 김찬동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장
26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는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박현진 큐레이터, 게리 힐 작가, 요한 노박 협력 큐레이터가 참석하였고, 전시 소감과 개별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왼쪽부터 박현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큐레이터, 게리 힐, 통역사, 요한 노박 DNA갤러리 디렉터(협력큐레이터)

<벽면 작품>(2000), 단채널 영상/음향 설치
몸을 계속해서 벽에 내던지면서 힘들게 단어 하나하나를 말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강한 스트로브 조명이 단 한번 번쩍일 때 몸이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데, 단일한 순간들이 편집을 거쳐서, 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 몸의 장면과 선형적인 텍스트를 연결했다. 기계, 조명, 영상이 서로 일치될 때 번쩍거리며 어두워진다.

<학습곡선>(1993), 변형 5인치 흑백 모니터, 합판, 스테인리스 스틸, 플레이어
확장된 책상 끝 가장자리에 76cm 높이의 휘어진 스크린이 설치되는데, 그 안에는 부서지는 완벽한 파도의 영상이 담겼다. 이는 서핑에 대한 오마주 작업으로, 가파른 학습곡선을 가진 응용/이론 이분법을 문자 그대로 구축한 것이다. 서 있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작업으로 영상과 관람객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잘린 파이프>(1992), 2개의 알루미늄 파이프, 5인치 흑백 모니터와 프로젝션 렌즈, 3개의 스피커, 증폭기
잘린 파이프는 몸으로 연결되는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은유적 단면이 된다. 작품의 주요 주제는 스피커의 이미지를 오브제 그 자체와 자기 성찰적인 텍스트를 읽는 소리에 문자 그대로 투사하는 것을 통해서 강조된다.

<자체 제작과정이 담긴 클라인 병(로버트 모리스 이후)>(2014), 복합매체 설치
<클라인 병>은 표면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고 안과 밖이 모호한 수학적 형태인데, 작가는 병이 만들어지는 것을 촬영한 후에 그 영상을 병 내부에 투사시켰다. 이는 가상 공간이 해체되는 것을 보여준다.

<장소의 주인>(2019)
게리 힐 작가가 동전을 튕겨 올리는 행위를 그것을 떨어뜨릴 때까지 반복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작가는 결국 떨어져 구르는 동전을 찾으려고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나는데, 이때 관람객은 텅 빈 화면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동전의 소리를 따라간다. 다른 결과에 대한 기대, 우연을 의심하는 듯한 관람객의 행동은 인공지능의 모호한 현존과 함께, 일종의 전제된 감시를 나타낸다.

<관람자>(1996), 5채널 비디오 설치
노동자 17명이 미동 없이 서있는 약 14m의 영상이 전시장 한쪽 벽면에 담겼다.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작용도 없으며 각자 홀로 서서 관람객들을 응시한다. 보통은 관람객이 주인이 되어 바라보는 입장이지만, 관람객이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경계를 허물면서 상호 주체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순환 호흡법>(1994), 5채널 비디오/음향 설치
떠있는 배 한 척, 나무 자르는 남자, 모스크의 내부 등을 포함한 5개의 이미지가 영상에 나타난다. 시간과 속도의 차이에 따라 5개의 이미지가 순환적으로 움직이고 왜곡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폭뢰>(2009/2012), 복합매체
벽면의 배경에는 기타를 연주하는 작가와, 아내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바닥에 보이는 확장된 이미지는 작가가 약 복용 후 그의 아내가 촬영한 것으로, 그가 잠들 때까지를 기록한 내용이 화면에 나타난다. 게리 힐 작가의 향정신성 퍼포먼스를 로우 레코딩으로 보여준 작업이다.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1992-92) 작품 중 일부
4인치 흑백 모니터와 렌즈가 설치된 7개 원통형 튜브로 구성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지식의 보관소로 여겨지던 책이 그 원래 기능을 상실하고 스크린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투과하는 스크린으로써의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원래의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공존을 제시한다.

<손으로 듣는 HanD HearD>(1995-965) 설치 전경

<원초적인 말하기>(1981-83), 8채널 비디오/음향 설치
미술관 전시홀 공간에 맞춰 새롭게 제작했으며, 8개의 버전으로 색과 작가가 말하는 이미지가 교차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미지가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바뀌고 목소리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작가는 관용적인 표현에 주목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과 함께 상호간의 대화를 보여준다.

전시장 한켠에 있는 아카이브 & 미디어 룸에서는 게리 힐 작가의 인터뷰 영상과 국내외 도서를 살펴볼 수 있다.
《게리 힐: 찰나의 흔적 Gary Hill: Momentombs》는 11월 26일부터 2020년 3월 8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제 2, 4, 5 전시실과 전시홀에서 관람할 수 있다. 게리 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나 미디어의 매커니즘을 통달하여 이를 잘 엮어내는 작업을 하기에,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한 후 감상하면 작품 이해가 쉽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게리 힐 개인전 중 아시아 최대 규모로, 융복합 및 다양한 매체로써 기존의 언어를 해체해나가는 작가의 특별한 해석을 느껴볼 수 있다. 게리 힐의 작품 세계를 총 망라한 이번 전시를 통해 미디어 아트 뿐만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미술을 어떻게 풀어갈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원고작성 및 사진촬영 : 홍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