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번 전시는 국공립미술관에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회고전으로 한국추상미술의 대표작가 정창섭의 60년 화업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선정 이유에 대해 이순령 학예연구관은 “정창섭 화백은 60여년간 꾸준히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모색했던 한국현대미술 제1세대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이번 회고전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정창섭은 서울대 회화과 제1회 졸업생으로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등단했다. 1950년대에는 거친 표면의 마티에르 기법과 대담한 선을 강조한 입체주의, 큐비즘의 영향이 강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등에 관해 실험하다가 한지를 발견하게 됐다.

“나는 종이와 만나기 전 유채 작업을 했는데 영 이게 아닌데 듯싶어서 3, 4년이 멀다 하고 실험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어요. 유채의 그 끈적끈적하고 기름진 것이 싫어서 테레핀유를 아주 많이 섞어 쓰곤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70년대에 들어서서 한지(寒紙)와 만났는데 그때 느낌은 요걸 한 번 써보자가 아니라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한지와 만나자마자 그것에 몰두하기 시작했지요._작가 어록 中”

그는 과감하게 유화를 버리고 한지를 캔버스 위에 붙이고 엷게 번지는 듯한 화법을 구사했다. 이전의 엥포르멜과는 전혀 다른 모노크롬을 시도했다.
이후 작가는 종이의 주원료인 닥을 이용해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간다. 물기를 머금은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놓고 손으로 직접 주무르고 두들겨 종이 결을 살린 <닥>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묵고>연작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는 완성 단계에 이른다. 이 시리즈는 닥 반죽을 염색해 은은한 색감을 가미하고 사각형의 그리드를 나열해 엄격한 질서정연한 구도를 만든다.
마치 깊고 넓은 울림을 자아내는 듯한 절제미가 돋보이는 한국 추상미술을 구축했다. 바로 그가 60년간 고민해 온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정신과 물질 등이 모두 하나가 되는 ‘물아합일(物我合一)’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정창섭 화백의 끊임없는 실험과 시도는 한국추상미술 성립에 기여한 선구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