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be Hasty
서두르지 마시오
2025.8.8.-9.6
페리지갤러리 

페리지갤러리는 역행하는 사회와 반복되는 과오, 불확실한 미래 속의 ‘시간성’에 주목한 전시인 《Don’t be Hasty (서두르지 마시오)》를 2025년 8월 8일부터 9월 6일까지 개최한다. 35세 이하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시간에 대해서 과거를 현행시키기도 하고 현재를 유보하기도 한다. 

갤러리 입구

전시의 제목은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생명체 ‘트리비어드’ 캐릭터의 대사에서 인용하였다. 김모희 큐레이터는 “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시간성에 주목하면서, 전쟁이나, 재난 등으로 인한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시간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루고자 했다”라며 “전시가 겉으로 시간을 드러내기보다 전시장 안에서 경험하고 기억하고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의 관계성을 탐구하고자 했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용재, <Dummies_01>, 2023, 리넨에 유채, 약 20x20cm

전시장 가장 왼쪽에 위치한 작품은 《Dummies_01》이다. 작가는 “더미(Dummy)'가 실제 사람의 신체 구조와 반응을 모사한 특수 인형을 의미한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개념을 회화로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한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사실 어느 곳도 가리키지 않는 손가락'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모호한 제스처는 어디에서나 상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범용적 이미지가 된다. 그러므로 작품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게 되며 때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는 의미가 비어 있는 이 작품을 오히려 더욱 미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내어 무의미함을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용재, <background independent_2>, 2025, 캔버스에 못, 유채_빗각틀, 35x24x5cm
이용재, <chroma-key>, 2025, 캔버스에 못, 유채_빗각틀, 60x60x12cm
이용재, <background independent_1>, 2025, 캔버스에 못, 유채_빗각틀, 73x60x12cm

이용재의 다른 작품들인 《background independent_1》, 《background independent_2》, 《chroma-key》는 '배경 독립성' 개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시간을 정의하려면, 배경으로부터 독립된 배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크로마키와 같은 색으로 끝없는 반복 과정을 통해 작업했다”라고 설명했다. 카드뮴이 함유된 물감을 선별해 색의 채도와 보존력을 높인 이 작품들은 시간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각화한다. 

서민우, <quasi moderato, shoreline>, 2025, 나무에 수성스테인, 콘크리트, 스피커, 앰프, 오디오 케이블, 라텍스, 인조 가죽, 스테인리스, 
44.4x46.3cm, 8분 28초

작가는 스피커에서 의도적으로 고음역 주파수를 제거하여 음질이 낮은 소리를 구현했다. '작업실에서 제작한 원본 음원의 상당 부분이 주파수 조작 과정에서 깎여 나가 사라졌지만, 이러한 손실 자체가 작품의 핵심'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이것이 과연 음원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음악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촉발한다. 이 작품은 그래서 《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과 함께 배치되었을 때, 이 음원이 오히려 원본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에서 《quasi moderato, shoreline》의 소리가 변형되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서민우, <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 2025, 스피커, 라텍스, 오디오 케이블, 철, 스테인리스, 앰프, 나무에 수성스테인,
음원: 서민우_해안선(remake), 페리지 공간 녹음, 가변설치, 8분 28초

《해안선을 위한 사행 운동》은 시간의 다층적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사운드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사물, 인간, 동물이 각각 다른 시간성을 갖고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개별적 존재들의 사회적·물리적 위치가 만들어내는 고유한 시간을 공간적으로 구현했다. 작품은 5개의 스피커가 비균등하게 작동하며 서로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소리를 동시에 재생한다. 각 스피커는 독립적인 시간 흐름을 갖지만, 공간에서 중첩되어 들리며, 관람객은 결코 같은 소리를 경험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순환과 반복을 넘어 끊임없이 변주되는 순간적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위치에 따른 소리의 방향성과 강약의 변화에 집중하며 봐줬으면 한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음원은 강릉 해변의 바닷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를 기반으로 재구성되었으며, 여기에 전자음을 더해 메커니즘을 한 번 더 거쳐 만들어졌다. 또한 '해안선'이라는 제목은 파도가 칠 때마다 변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수평적 구성을 이루는 특성에서 착안했다.


김상하, <그 그림자를 죽이거나, 혹은 따르거나>, 2025, 싱글채널, 컬러와 흑백, 스테레오 사운드, 25분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작품의 소리가 관람객의 귀를 관통하는데, 그 소리는 바로 김상하 의 《그 그림자를 죽이거나, 혹은 따르거나》이다. 작가는 일제 강점기 당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원본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에 얽힌 소문을 따라간다. 영상 속 내용은 목소리가 거세된 무성 영화 속 배우, 영화 속 살인 액션을 반복적으로 따라 하는 퍼포머, 말(소리)과 글(자막)은 여기저기 산포되어 있던 소문을 한곳에 투사하여 여러 겹의 레이어로 엮어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영화의 실체를 찾기보다 또 다른 소문-이야기에 초점을 둔다.

작가는 당시 민족 영화가 검열이라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상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상영 당시 힘의 주체가 일방적이지 않고 계속 바뀌는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단순히 수용적인 존재가 아니라 검열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상상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능동적 주체였음을 발견했다. 

공간 구성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어두운 조도를 설정하고 여러 검정 줄을 매달아 처녀귀신의 머리카락처럼 섬뜩한 감각을 연출했다. 작가는 “소문이나 기억의 형상들이 비가시적이지만 현재에도 귀신처럼 따라오는 존재라고 여긴다”고 말하며 “관객이 검정 줄을 통해 촉각적이고 섬찟한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간담회 전경

이번 전시는 영상, 사운드 설치, 회화라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간성에 대한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전시를 다 보고 난 뒤, ‘우리가 시간 안에서 무엇을 추억하고 갈망하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우현서 atmanriv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