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은님 : 생명의 시작 Am Anfang
2021.8.5-8.29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입구
진정한 ‘나’를 보여주는 것. 남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기란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어떠한 모습이 진정한 ‘나’인지조차 쉽게 정의내리지 못한다는 건 인간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다.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어찌 보면 이제는 당연한 사회 현상으로 여겨지지만 때때로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는 듯 채우기 힘든 공허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 내면의 공허함이 커져 자칫 잘못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자아에서의 출발이 아닌 타자를 향해 출발하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비슷한 형상을 한 인간 군상들이 부대끼며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를 인식시키는 고마운 존재가 되는 동시에 상대방과 비교하고 내가 비교를 당함으로써 우리는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고조시키기도 하므로 욕심을 덜어내고 생각을 비워내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전시장 전경
이번 노은님의 <생명의 시작 : Am Anfang> 전시는 바로 그러한, 헛된 욕심을 덜어주고 본연의 ‘나’로 회귀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어떠한 의도도 전부 제거된 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생명들을 그려내는 노은님은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이다. 그녀는 원시 생명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살아 숨을 쉬는 대상을 향해 세심하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리고 어떠한 설정과 구상 없이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캔버스에 담아내는데 그 모습은 작가 자신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생명의 시작 Am Anfang, 2020, Acrylic on canvas, 160x400cm

(左) 무제, 2003, Acrylic on paper, 29.7x70cm
(中) 무제, 1996, Acrylic on paper, 28x64cm
(右) 무제, 1984, Acrylic on paper, 29.5x66.5cm

전시장 전경
자연은 노은님에게 있어 미지의 세계이자 평생의 화두였다. 오랜 세월 작업 과정을 거치며 그녀가 얻은 진리는 자연은 항상 우연과 당연이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매년 돌아오고 그러한 자연의 순환 속에 우리는 자연과 함께 변하며 그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지만 언제가 우연이고 언제가 당연인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그녀는 인간과 동물, 식물을 동일 선상에 놓고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는 존재들로 인식하며 가장 단순한 형태로 작품 속에 등장시킨다.

(左) 무제 o. T. 1998, Mixed media on paper, 100x70cm
(右) 올빼미와 반달, 1992, Acrylic on paper, 100x70cm

전시장 전경

소풍 Ausflug, 2021, Acrylic on paper, 78.5x143cm
원시적인 것 즉, 생명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은 창작의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동굴 벽화와 같은 원시 미술의 세계를 주목하고 태초의 생명에 대한 힘을 동경했다. 거침없이 뻗은 필획과 쨍한 원색들은 작품 속 대상들의 생명력을 더욱 충만하게 하였고 ‘점’이라는 상징적인 모티프를 통해 영혼이 깃든 생명의 눈(目)을 표현하였다. 작품 속 수많은 점들은 노은님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으로서 자신의 옷과 신발 등에 점을 찍고 입어 일상에서도 생명력 넘치는 매 순간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에서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할 무렵, 노은님은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남들에 비해 볼품없다고 생각하며 창피해하였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멍청한 짓임을 깨닫게 된 것은 그녀조차 알지 못했던 예술적 표현 능력을 알아본 한스 티만 교수 덕분이었다. 교수는 그녀가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이야말로 진짜 그림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게 한 인물이다. 지금의 노은님이 남을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온전히 붓에 몸을 맡기는 데에는 한스 티만과 같은 주변 인물들이 알아봐 주고 지지해준 덕택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전시장 전경

암초상어 Riffhai, 1990, Acrylic on paper, 45x55cm
노은님의 작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심중의 번뇌와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잠시 나의 곁을 떠나는 듯하다. 살아서 숨 쉬는 자연의 생명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자연의 순수한 본질에 대해 서서히 일깨워준다. 그것은 어떠한 억압이나 강제가 없는, 아주 자유롭고 거짓 없는 작업 과정의 산물이었다. 자연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고 흐르는 자연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힘의 변화를 작품에 반영시킬 수 있었던 원천은 바로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선 용감한 노은님만의 여정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안채원 chaewon630@naver.com